Chapter: 131
‘이걸 직접 입으실 생각이십니까?’
바니걸 의상을 구해 온 알새틴은 그를 내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의상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도 비슷했다.
내가 정말로 저걸 입으려고 했다고?
바니걸 의상은 옷이 아니었다.
가리는 곳보다 드러나는 곳이 더 많은 걸 어떻게 옷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메스가키 스킬은 내게 당혹을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난 알새틴의 앞에서 당당한 태도로 바니걸 의상을 받아올 수 있었다. 내가 입겠다는 데 왜 네가 지랄이냐는 말과 함께.
겸사겸사 그의 아래에 있는 부하 중 하나에게 바니걸 의상을 착용하는 법도 배웠지.
한 때 카지노에서 일을 했었다는 그 여성은 바니걸을 제대로 입는 법과 함께 그를 활용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그녀의 입담이 얼마나 좋았었는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도 난 바니걸을 입는 방법을 헷갈리지 않았다.
옷을 다 입은 후에 마지막으로 머리에 토끼 귀를 착용한 나는 인벤토리에서 거울을 꺼내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진짜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메스가키의 얼굴과 그 옆으로 늘어져 훤히 드러난 어깨의 살갗을 가리는 머리카락.
어지간한 기사도 기겁할 수준의 훈련을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볼살처럼 말랑한 하얀 색 피부.
분명 제대로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부근이 살짝 떠 있는 붉은 색의 바니걸 의상과 다리의 피부를 가리는 체 하는 스타킹. 굽이 꽤 있는 하이힐.
잘 어울리냐 잘 어울리지 않냐를 따지면 잘 어울린다. 애초에 루시의 겉모습은 진짜 인형처럼 아름다워서 그 어떤 옷을 입더라도 그 옷을 자신에게 맞춰버리거든.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지. 근데 그걸 가지고서 감탄하는 것도 남의 일일 때 할 수 있는 거다. 내 일이 되면 감탄이고 뭐고 하기 전에 부끄러움이 먼저 찾아온다고!
할배를 인벤토리가 처박아두길 잘했어. 이걸 할배한테 보여줬더라면 할배가 이거 관련해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혀를 깨물고 싶었을 거야.
흐으. 여분의 이불을 몇 개 사둘까. 당분간 밤마다 이불을 걷어차게 될 텐데 지금 내 근련을 평범한 이불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리나님?…’
“얼빠 여우. 들어와.”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문이 벌컥하고 열리더니 얼빠 여우가 얼굴을 들이 밀었다.
변태 아저씨처럼 느슨한 웃음과 함께 침을 닦으며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내 모습을 눈에 담더니 그대로 입구에서 굳어버렸다.
뭔데. 뭔데!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라고! 지금 이를 악물고 주접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단 말이야! 네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히려 더 부끄러워진다고 변태년아!
“아름다워.”
‘그래요?’
“하. 그래? 네 변태적인 성벽에 맞나 보지?”
얼빠여우는 자신의 먹잇감을 살피듯 내 발가락에서부터 얼굴까지 차근차근 훑어보더니 이내 가버릴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아. 이걸 어떻게 말로 묘사해야 할까. 그 피부는 아기처럼 보드라워서 맛있어 보이고 그 눈은…”
‘닥쳐요.’
“얼빠 여우. 냄새나는 입 좀 닫아줄래? 역겨우니까.”
“명령이라면 그러도록 하마.”
진짜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생각을 안 하는데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다. 메이스를 저 늘어진 웃음에 박아 넣어서 이빨을 조각내 버리고 싶어. 진심으로.
‘이제…’
“이제 만족하나 보네? 어린 애가 바니걸을 입은 게 그렇게 좋아? 변태년. 진짜 역겨워. 이딴 게 숲의 주인이라니 숲에 사는 생명들이 불쌍해.”
“너무 그러지 말거라. 진짜로 녹아내릴 것 같지 않으냐.”
둥글어지는 얼빠 여우의 눈을 본 순간 진심으로 욕설이 튀어 나올 뻔 했다.
나 얘 싫어. 진짜로 싫어. 차라리 메스가키 스킬에 순수하게 화를 내거나 뒤에서 헛짓거리를 하는 애가 낫지. 앞에서 대놓고 변태짓을 하니까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져.
이거 빨리 끝내고 여기서 빠져나가자. 얼빠여우랑 조금 더 같이 있었다간 진짜 속에서 뭔가 올라올 것 같아.
‘부탁 들어주실 거죠?’
“얼빠 여우. 이제 부탁을 들어 줄 마음이 생겼어?”
“부탁? 아. 부탁. 그래.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좋다. 그대처럼 아름다운 이가 부탁을 하는데 어찌 들어주지 않을까. 평범한 아이 하나를 잠에서 깨워주는 정도야 별 것 아니지.”
다행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바로 할배를 꺼내서 여우의 머리를 깨서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을 테니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하? 뭐야? 지금 한 사람이 자신의 품위와 위신을 모두 다 팔아 넘겼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나이가 너무 많아서 자기 마음속의 욕심주머니도 같이 커져 버렸나 보지?! 어?!
“그 하이힐로 날 밟아다오.”
…
…네?
상식의 저편에 존재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미친. 돌아버리겠네 진짜. 이 정신 나간 얼빠 여우가 도를 넘은 변태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설계된 개그 캐릭터니까.
모니터 너머에서 이것보다 더한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보았지. 그렇지만 현실에서 내 두 귀로 직접 이 말을 듣게 되니 진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자. 그대가 밟기 좋도록 자세도 잡아 주겠다. 구멍이 날 정도로 강하게 해다오. 본인은 괜찮으니 말이다.”
아. 씨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여태까지 버텼는데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 나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얼빠 여우의 말을 무시하고 인벤토리를 조작했다.
<여아야. 갑자기 나를 저 안에 집어 던지면. 여아야?!>
그리고 나서 할배를 꺼내 얼빠여우를 향해 휘둘렀다. 힘조절은 하지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뚝배기를 깨서 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
알른 영애께서 리나님을 잘 설득하고 계시겠죠?
리나의 거처 응접실에서 루시가 오기를 기다리던 조이는 도저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루시의 유능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루시의 유능함에 구원을 받았던 조이가 어찌 그를 의심하겠는가.
다만. 그래. 다만 지금 일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이 그녀의 소중한 친구이기에 조이는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저기.”
“…”
“저기.”
“아. 네.”
프레이가 자신에게 말을 걸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조이는 한 박자 늦게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시련에서 뭘 봤어?”
“시련에서요?”
“응.”
시련에서 본 거? 착하고 활발하고 귀여운 알른 영애. 대마법사가 된 나. 엄청나게 맛있는 빵집. 그리고 백마 탄.
으갸아아악.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린 조이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를 지워버렸다.
이건 말 못해. 절대로 말 못해. 근데 그렇다고 아예 대답을 안 하면 켄트 영애가 이상한 걸 상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 아냐. 적당한 게 뭐 있지?
“대마법사가 된 자신이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적당히 욕심이 들어가 있는 게 그럴 듯 하잖아.
혹시나 캐물을까 싶어 조이가 긴장했지만 프레이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감흥도 없는 그렇구나 라는 대답을 내뱉을 뿐.
그 무심함에 살짝 열이 받은 조이는 자기도 모르게 프레이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켄트 영애께서는 어떤 환상을 보셨는데요?”
“나? 가족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나. 재미없었어. 그래서 벴어.”
“…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조이가 물으려 할 때 저 먼 곳에서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쪽은 알른 영애가 계시는 쪽이잖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켄트 영애!”
“응.”
소리를 따라서 내달리던 조이와 프레이는 그 쪽으로 가까이가면 가까이 갈수록 소리가 더 거세어지는 것을 듣고는 속도를 높였다.
알른 영애! 제발 아무런 일도 없어주세요! 저번처럼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그렇게 기도하며 루시가 있는 곳에 도착한 조이와 프레이가 보게 된 것은.
“죽어! 죽어버려! 변태 얼빠년!”
“꺄흣. 힘과 감정이 잔뜩 담긴 것이 나쁘지 않구나.”
바니걸 의상을 입은 채 메이스로 리나를 공격하는 루시의 모습이었다.
어. 아니. 어? 자신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풍경에 조이의 뇌가 일순 멈췄다.
알른 영애는 왜 메이스를 휘두르고 있는 거지? 또 리나님은 거기에 맞으면서 이상한 웃음을 흘리는 거고?
아니 애초에 알른 영애가 왜 바…바니… 바니걸 의상을 입고 있는 거야?! 분명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갑옷을 입고 계셨는데?!
어디 유흥 업소에서나 볼 법한 바니걸 의상을 입고 있는 루시는 분명 아름다웠다.
귀여움과 당당함과 야함이 뒤섞인 그녀의 모습은 당혹에 빠진 조이마저도 순간 눈을 떼지 못할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름답다한들 저 의상을 입은 이유가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 아직 환각에서 못 빠져 나온 건가?!
뒤늦게 조이와 프레이의 존재를 눈치 챈 듯 루시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의 당당함을 잃고 멍해진 루시의 눈동자와 당혹에 빠진 조이의 눈동자가 마주하는 사이.
“별 일 아니네.”
프레이는 조각상마냥 굳어버린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서 응접실로 돌아가 버렸다.
발소리가 저 멀리로 향하는 동안에도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이 이어졌고 그를 부순 사람은 메이스에 얻어맞고 있던 리나였다.
“하아. 눈치가 없구나. 딱 좋은 순간이었는데. 에비. 돌아가거라. 본인은 이 아이의 분노를 더 몸으로 감당하고 싶으니라.”
아쉬움이 가득 담긴 리나의 얼굴을 본 순간 조이는 이 모든 일을 이해했다.
그런. 그런! 알른 영애께서 페이비를 구하기 위해 치욕을 무릅쓰시다니! 숲의 주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저 변태에게 자신의 존엄을 팔아 넘기시다니!
“알른 영애!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혼자 감당하게 만들어서!”
*
조이는 그리 소리를 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자신의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음. 해명하지 말자.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이 생길 것 같진 않으니까.
<결국 보이기 싫어하던 사람에게 모두 다 보여버리고 말았구나.>
‘할아버지. 눈치 좀 챙기세요. 나이도 많으면서 왜 이렇게 주책이 심하신 건가요?!’
<네 발 아래에서 입맛을 다시는 저 여우보단 낫지 않으냐?>
‘저것보다 못했으면 이미 할아버지를 땅에 매장시켰어요.’
<…닥치고 있으마.>
쓰잘데기 없는 말을 지껄이는 할배를 닥치게 만든 후 조이의 몸을 슬쩍 밀어냈다. 조이가 날 위로해주는 건 참 고맙지만 지금 난 받아낼 게 있거든.
‘변태 여우. 도와 줄 거죠?’
“야. 얼빠 변태. 도와줄 거지? 입을 싹 닦아버리는 구제불능의 쓰레기가 아니면 좋겠네.”
“크흡. 이만큼 포상을 받았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지.”
얼빠 여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자신의 흐트러진 옷가지를 원래대로 되돌리고는 팔짱을 낀 채 믿음직스러운 척하려는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를 냈다.
“자. 따라오거라. 그대의 친우를 깨우러 가자꾸나.”
저기요. 하나도 안 미안하긴 한데요. 그런다고 방금 전에 했던 추한 일들이 사라지진 않거든요?
이 쓰레기 마조 변태 얼빠 여우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