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이는 자기 몸통보다 커다란 푸딩 용기를 보더니, 굉장히 즐거워하며 품에 끌어안고 냠냠 먹기 시작했다.
옴뇸뇸.
커다란 푸딩을 품에 안고 천천히 떠먹는 사신이 귀여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색 사신을 포함해서 미국에 한 번 오시지 않겠습니까?”
살랑살랑 안테나를 흔들면서 푸딩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신이는 ‘미국’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즐거운 것처럼, 신나는 리듬으로 좌우로 흔들리던 안테나가 우리 쪽으로 좀 더 기울여진 채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우선 자리를 옮겨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죠.”
그런 말을 하면서 세희 언니가 향한 곳은 사신이의 격리실이었다.
뭐, 격리실인 것만 제외하면 의자도 있고, 과자도 많고, 방음도 되는 시설이긴 한데….
격리실을 그런 용도로 써도 되나?
푸딩을 먹느라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회색 사신을 번쩍 들어서 격리실 침대 위에 올려두고, 침대 위에 앉아 사신이를 끌어안았다.
아, 말랑따끈해.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의자에 앉아서 자리를 잡았다.
세희 언니 앞에 제임스, 그리고 그 옆에 쓸모없어 보이는 통역사.
제임스의 경호원들은 격리실 밖에 대기 중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서 쉬고 있던 황금 사신이들은 격리실에 사람이 늘어서 마냥 즐거워 보였다.
황금 사신이들은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더니, 폴짝폴짝 뛰어서 사람들 어깨 위에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리를 잡지 못한 황금 사신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럼, 왜 저희를 초대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0호 유물 때문입니다.”
제임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회색 사신은 두 종류의 0호 유물에 반응했었는데, 다른 0호 유물에도 반응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0호 유물은 한국에서 별로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푸딩 공장에서 하나 봤던 적이 있었다.
“아! 그 책 같은 오브젝트 말하는 거죠?”
“네, 보통 그런 오브젝트들을 0호 유물이라고 부릅니다.”
세희 언니는 그 말을 듣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그 ‘0호 유물’이라는 것들은 세희 연구소로 가져와서 실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는 편이 회색 사신을 장거리로 옮기는 것보다는 나아 보입니다.”
“우선 ‘0호 유물’이라는 것이 딱히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서, 0호 유물로 여겨지는 오브젝트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제임스는 목을 가다듬더니,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그리고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오브젝트도 있습니다. 0호 유물의 기준이 되는 오브젝트죠. 전 세계에서 최초로 규정된 오브젝트. ‘불변하는 검은 공’을 대상으로도 테스트를 해봐야 합니다.”
‘불변하는 검은 공’은 꽤 유명해서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최초로 발견된 오브젝트, 정확히는 최초로 오브젝트라고 규정된 초자연현상.
SDVIMVFoanVzY1YwSVhjamMzUkt1WlJKZ0NsamtaQ0sveENFK2VoZUwvWFB5dFp6TTBlM2J0SVI2U2pWek1Jaw
부서지지 않고, 옮길 수도 없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커다란 구체.
오브젝트가 아직 비밀이었던 시절에는 도시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척 속이고 있었던 구체.
“‘불변하는 검은 공’도 0호 유물인 건가요?”
“모릅니다.”
제임스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불변하는 검은 공’ 이전부터 존재했던 오브젝트들을 ‘0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불변하는 검은 공’도 다른 오브젝트에 비하면 상당히 이른 시간에 나타났으니까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회색 사신의 미국행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불변하는 검은 공’은 이동할 수 없는 오브젝트라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세희 언니는 제임스의 말을 듣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확실히 불변하는 검은 공은 이동이 불가능하겠죠. 필요성은 이해했습니다. 한국 오브젝트 협회와 협의할 필요가 있을 테니, 조금 더 알아보고 비용과 일정을 확정하는 걸로 하죠.”
그리고 제임스와 세희 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하더니 격리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마 대략적인 합의는 했으니, 전문가를 끼고 계약서를 작성하려는 걸까?
서아 언니, 또 고생하겠네.
옴뇸뇸.
미국 이야기에 흥미진진해 보였던 사신이는 ‘0호 유물’에 별로 관심이 없는지 푸딩만 열심히 떠먹고 있었다.
그나저나 미국인가.
한국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서,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웬만해선 가기가 힘든 해외여행인 데다가, 해외로는 절대로 데리고 가기 힘든 사신이까지 동반한 여행이라니!
아, 빨리 가고 싶다.
그럼, 미국에 가기 전에 사신이랑 놀러 갈 곳부터 정리해 놓아야겠어!
***
예린이는 뭔가 조사할 게 있다고 가버렸고, 대용량 푸딩도 다 먹어버린 점심시간.
세희 연구소의 햇살 가득한 안뜰에서 나는 나른한 여유를 만끽하며 누워있었다.
잔디와 나무로 장식된 안뜰과 쿠키와 과자로 장식된 정원이 유쾌하게 어우러진 안뜰은 따스한 햇살로 가득했다.
황금빛 햇살이 내리쬐어 내 몸을 따뜻하게 데우자, 기분 좋은 잠기운이 몰려들었다.
하늘은 흠잡을 곳 없는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위로 작은 뭉게구름이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등에 닿는 폭신폭신한 아귀의 몸통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나서, 내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잎에서 나는 흙냄새와 어우러졌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만 같은 평온한 점심.
가끔 흐르는 산들바람이 안뜰을 스쳐 지나가면서 잎사귀를 바스락거리며 시원한 촉감으로 내 피부를 어루만지곤 했다.
그런 안뜰의 고요함은 후배 2호가 나타나면서 부서져 버렸다.
“와!”
정적을 꿰뚫는 것 같은 감탄사.
후배 2호가 황금 사신들이 뒹굴뒹굴하면서 노는 것을 보며 지른 소리였다.
오늘은 손님이 많은 날이네.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던 제임스에 이어서, 후배 2호가 나타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랑말랑한 뿔을 가진 황금 사신도 보였다.
황금 뿔 사신이 쓸쓸해 보여서, 친구들이 많은 곳으로 데리고 온 건가?
황금 뿔 사신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안뜰에 걸음을 내딛자, 다른 황금 사신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데다가, 뿔까지 나 있는 사신이라서 그런지 엄청난 인기였다.
현재 쉬고 있는 황금 사신들이 죄다 몰려나온 것이다.
잔뜩 몰려들어서 말랑말랑한 뿔을 만져보기도 하고,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뿔 사신은 그런 눈초리를 볼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마 자기도 뿔이 왜 생겼는지 모르는 게 아닐까?
몇몇 황금 사신은 두 주먹을 앙증맞게 움켜쥐고 눈을 꼭 감고 집중하고 있었다.
아마 ‘뿔, 돋아나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
집중하던 황금 사신들에게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뿔이 생긴 건 아니지만,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내 더듬이처럼 움직이더니 뿔처럼 뭉쳐서 하늘로 솟아오른 것이다.
아무리 봐도 내 더듬이 움직이는 능력 같은데, 그 능력도 쟤네들에게 생긴 것 같네.
짠! 하고 양팔을 벌리고 유사 뿔을 만든 황금 사신들은 자기가 만든 뿔을 자랑했다.
결국 안뜰은 눈을 감고 집중하는 황금 사신 기도원처럼 변해버렸다.
황금 사신들의 열렬한 관심에서 벗어난 뿔 사신은 인제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미니 사신 정원 위에 발을 딛었다.
조심스럽게 마시멜로 대지를 걷던 뿔 사신은 점점 보폭을 늘려가더니, 결국 환하게 웃으면서 마시멜로 대지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후배 2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감격하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
서울숲 한복판에 위치한 문신투성이 여자의 통나무집.
그 안에서 여동생이 그녀에게 투덜거렸다.
“언니, 그냥 서울 가서 살면 안 돼?”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그렇게나 불편해?”
“응!”
언제나 단호하게 서울숲에서 약초를 길러야 한다고 하던 언니가 우호적으로 나오자, 여동생은 고개를 맹렬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 언제 한번 기회를 봐서 옮겨보자.”
“진짜? 진짜지?”
“아, 그래도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좋은 곳으로는 못 갈 거야.”
“그래도 괜찮아! 전자기기를 못 쓰는 서울숲보단 낫겠지!”
여자는 약초를 기르기 위해서 서울숲을 고집했던 것이지만, 연금술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희 연구소’라는 곳이 서울에 위치한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서울로 옮긴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약초를 빻고 있는 여동생은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언니가 살았던 곳에서는 오브젝트를 ‘마도서’라고 불렀었다며? 그럼, 오브젝트는 누군가가 만든 거야?”
“오브젝트의 기원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마도서’라는 명칭의 유래는 알지.”
“누군가 쓴 책이 오브젝트가 됐다거나?”
“아니, 최초로 발견된 오브젝트가 책의 형상이었다. 그 마도서가 충격적이었기에, 계속 마도서라고 불렀지. 하지만 그 뒤로 발견되는 마도서는 책의 형상을 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았어.”
여자의 대답에 호기심이 충족됐는지, 여동생은 금세 관심을 거두고 서울 어디서 살게 될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
뚜방뚜방.
나는 새로 얻은 능력을 시험하며 미니 사신 정원을 돌아다녔다.
사실 이번에는 전혀 능력을 얻지 못할 줄 알았는데, 묘한 능력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텍스트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마 모르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도 알아들을 수 있었던, 램프의 능력 같았다.
‘안녕’이라는 텍스트를 생각하자, 회색의 투명한 구슬이 손바닥 위에서 튀어나왔다.
구슬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녕.>이라는 문자가 쓰여있었다.
물론 한글도 아니고, 지구상의 어떤 언어도 아니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문자였다.
말 못 하는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나에게 전혀 쓸모없는 능력.
그러던 중,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텍스트를 활용한 장난!
나는 공을 들여 장문의 문장을 작성한 뒤, 만들어진 구슬을 잠이 든 황금 사신의 품 안에 안겨줬다.
구슬을 내 손가락으로 착각했는지, 황금 사신은 잠결에 헤실헤실 웃으면서 구슬을 꼭 껴안았다.
나는 황금 사신 근처에 누워서 잠든 척을 하며, 황금 사신이 깨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이제 황금 사신이 깨어나는 것만 기다리면 되겠지.
히히.
***
잠에서 깨어난 황금 사신은 자신의 품에 안긴 정체불명의 구슬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뭐지?
약간 투명한 구슬 속에는 글자들이 잔뜩 떠다니고 있어서, 황금 사신은 호기심에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끔찍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저주의 편지입니다.>
<이것을 읽은 황금 사신의 애착 인간은 3일 뒤에 죽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이 구슬을 두 개로 쪼개서 다른 두 명의 황금 사신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황금 사신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는 두리번거렸다.
편지를 읽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황금 사신은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눈물을 마구 흘리면서 구슬을 꼭 끌어안고, 어딘가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이 없는 미니 사신 정원의 깊은 곳으로.
마음속으로 곧 죽을 운명에 처한 애착 인간에게 끊임없이 사과하며,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구슬을 꼭 껴안고 핫초코의 깊은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