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시티의 제임스 공항에 내리자, 미묘하면서도 뚜렷한 변화가 느껴졌다.
공항의 구조나 모습은 한국의 공항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확실히 다른 느낌이 났다.
한국어가 들리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표지판에 영어가 잔뜩 쓰여있어서 그런 걸까?
한국어가 들리지 않고, 표지판에 주로 영어가 쓰여있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뭔가 달랐다.
배치나 디자인, 중요하지 않은 세세한 부분에서 달라서 신기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보다 살짝 앞서 걸어가던 제임스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미국에, 그리고 제임스 시티에.”
제임스의 모습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고 표현에 대담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공항 게이트를 넘어가자,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의 활기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상점과 식당에는 보지 못한 브랜드들이 즐비했고, 생소하면서도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세희 언니랑 서아 언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사신이도 투명한 간이 격리실에 편하게 앉아서, 공항 내부를 신기한 듯이 두리번거렸다.
주변을 돌아보는 것에 따라서 반응을 바꿔가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더듬이!
당장에라도 격리실로 들어가서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공항 한복판에서 그러면 안 되겠지.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그냥 격리실에 같이 타고 왔을 텐데.
제임스가 공항 밖으로 우리를 안내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인상적으로 넓고, 우리들의 앞으로 쭈욱 뻗어나가는 커다란 도로.
그리고 그 도로 끝에는 거대한 구조물인 ‘제임스 타워’가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은 커다란 도로 중앙에 위치한 도시의 중심.
제임스 타워는 높이뿐 아니라 존재감도 대단해서, 이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 우선 짐부터 풀어놓고 향후 일정에 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제임스는 간이 격리실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설계된 커다란 차량으로 나와 사신이를 안내했다.
나와 사신이가 탑승한 차량은 부드러운 진동과 함께 ‘제임스 타워’를 향해갔다.
***
문신투성이 여자는 여동생과 함께 한때 번화했던 동네의 흔적을 따라서 차량을 몰았다.
그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낡은 건물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곳을 헤쳐 나갔다.
일부 건물들은 벽에 균열이 생기고, 몇몇 건물들은 위태롭게 기울어져 부스러져 가는 골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커다란 지진 같은 재해에 충격을 받은 뒤에 방치된 것 같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런 쇠락의 배경 속에서도 놀랍게도 재생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친 피부에 새살이 돋는 것처럼, 마치 폭격당한 주택가처럼 이리저리 망가진 건물들 사이로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과 도로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방치된 건물들과 비교되는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한 새 건물들.
부서진 포장도로와 달리 매끈한 새로운 아스팔트 도로.
그런 건물과 도로들을 보면서 여자는 말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네.”
트럭에서 내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이사하기 전에 살펴본 송파구 싱크홀 사고 당시의 영상을 생각해 보면 이보다 훨씬 나쁜 상태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반 시설이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해질녘의 가로등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전선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었고, 수도관도 여전히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자가 고요한 서울숲을 떠나서 정착하기로 한 곳은 송파구였다.
그 이유는 가격이 합리적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위치가 좋다는 연금술적인 이유, 두 가지가 있었다.
중앙 연구소 붕괴 이후, 송파구는 커다란 싱크홀이 생겨서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송파구 변두리는 꽤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싱크홀의 존재는 지역 사람들에게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많은 주민을 경계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불안감이 송파구를 선택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
오브젝트들이 잔뜩 도사린 싱크홀에 대한 불안감으로 부동산 가격이 크게 하락해서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집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오브젝트를 물리칠 수 있는 수호자를 데리고 있는 입장에서 꽤 합리적인 거주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가격을 제외한 다른 이유는 ‘세희 연구소’가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연금술사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회색 사신’ 그리고 ‘세희 연구소’의 근처라는 점도 여자에게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주변을 돌아보던 중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애옹.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니 새하얀 고양이가 여자를 보면서 자그마하게 울고 있었다.
털이 고르고 깨끗하고 새하얀 귀여운 아기 고양이.
보통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깨끗한 걸 보니, 누가 기르던 고양이인가보다.’
하지만 여자는 저 고양이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살아있는 생물의 냄새가 나질 않는 걸 보니, 오브젝트로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기 고양이를 유심하게 살펴보던 중, 여동생의 외침이 들려왔다.
“언니, 이것 좀 도와줘!”
커다란 장롱을 들어 올리려고 낑낑거리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고, 다시 고양이 쪽을 바라보니 하얀 고양이는 어느새 사라진 생태였다.
뭐, 상관없나.
예전 세계였다면 마도서는 발견 즉시 파괴해야 했지만, 여기는 다른 세계니까 이 세계의 규칙을 따라야겠지.
처음에는 이 세계의 안이함이 우습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은 왕국보다 훨씬 발전했고, 훨씬 더 잘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오브젝트 배제보다는 공존을 택하는 쪽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가끔 보게 되는 뉴스도 그랬다.
연구소에서 탈출한 오브젝트가 과도하게 많은 것을 볼 때, 계획된 연출로 느껴졌다.
실수를 핑계로 오브젝트와 사람의 공존을 노리는 이 나라의 지배층의 계획이 아닐까?
아무리 오브젝트 격리가 까다로워도, 지금처럼 탈출이 잦은 건 부자연스러우니 말이다.
“언니이!!”
여동생의 다급한 목소리에 여자는 생각을 멈추고 이삿짐이 잔뜩 쌓인 트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회색 사신이 떠난 연구소는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새로운 오브젝트들이 커다란 합금 컨테이너에 실려 연구소 내부로 이송되었고, 그 작업을 돕기 위해서 보안실 모니터링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희 연구소가 한동안 받고 있지 않았던 신규 오브젝트들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사실 최대한 연구소가 안정된 시기에 이송 작업을 하는 게 좋지만, 제임스에게 연락이 오기 전부터 준비하던 이송 작업이라 어쩔 수 없었다.
지루한 표정의 보안실 직원은 격리실 카메라로 새롭게 들어온 오브젝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연구소 정도면 이제 슬슬 오브젝트 더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이번에 회색 사신이 피규어가 엄청 많이 팔렸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연구소 지위를 유지하려면, 신규 오브젝트는 받아야 할걸? 오브젝트를 안 받고 관광객만 받으면 세희 연구소가 아니라 세희 동물원이었겠지.”
보안실 선임 직원은 품 안에 안긴 황금 사신에게 푸딩을 먹여주며 말했다.
야금야금 숟가락에 올려진 푸딩을 작은 입으로 뜯어먹는 황금 사신을 보면서 보안실 선임 직원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금도 연구소 같진 않죠. 보안실 와서 하는 일이 황금 사신이에게 밥 주는 건데, ‘아기 사신이 유치원’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CCTV 화면을 확인하며 이야기하던 직원은 격리실 한 곳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배. 지금 유령 고양이 격리실이 비어있는데, 괜찮은 건가요?”
“아, 그거? 괜찮아, 괜찮아. 별문제를 안 일으키는 오브젝트니까, 회색 사신이처럼 며칠씩 안 들어오는지만 체크하면 돼.”
평화로운 세희 연구소의 일상이었다.
***
일반인 출입이 불가능한 ‘제임스 타워’ 부속 연구실에 들어오자, 격리실을 유령화로 뚫고 나왔다.
이제는 나와도 괜찮겠지.
주변에 잔뜩 배치된 연구원들이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제임스가 짝짝 박수를 쳐서 주의를 끌고 말했다.
“자자, 신경 쓰지 말라고. 회색 사신은 무해하고, 붙잡아 두기도 힘드니까 자유롭게 해도 괜찮아.”
그 말을 듣자 왠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제임스를 쳐다보는 연구원들.
그리고 제임스의 뒤로 몰래 다가가서 품속에서 오브젝트 막대기를 하나 꺼내더니, 그걸로 제임스를 찔렀다.
오브젝트 막대기에서는 시퍼런 전류가 튀며 제임스를 지지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해. 지금 제정신이니까, 그걸로 지져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한참을 지져지던 제임스는 겨우 벗어난 뒤, 콜록거리며 기침했다.
“와, 고용주도 사정없이 지져버리네요.”
예린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고용주라고 정신 오염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심각한 사안의 경우 즉각 사살도 가능하지.”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 거야.’라고 제임스는 덧붙였다.
연구소 운영에 호기심이 많아 보이는 예린을 보고, 제임스는 엄청 두꺼운 연구소 룰북을 넘겨줬다.
예린은 룰북을 빠르게 넘겨보며 감탄했다.
“와, 엄청 사소한 것까지 규칙이 있네요. 그런데, 이런 거 저한테 보여줘도 되는 거예요?”
“이미 인터넷에 올린 규칙이야. 오브젝트는 전 인류의 위협인데, 꽁꽁 싸매봐야 인류 멸종일 뿐이지.”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오브젝트 격리로 돈을 벌려는 한국 연구소와는 꽤 다른 분위기였다.
“자, 연구소 안내를 해주기 전에 가장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도록 하자.”
제임스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연구소의 넓은 복도를 따라 발을 옮겼다.
복도의 높은 천장이 공간에 웅장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연구소의 구조는 깔끔한 라인과 간결한 우아함이 어우러진 현대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세희 연구소랑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깨끗한 흰색으로 칠해진 벽면은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잔뜩 붙어서 내부 격리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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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를 알 수 없는 장비들이 즐비한 첨단 장비들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서 도착한 곳은 엄청 넓은 장소였다.
드높은 천장과 화려하게 꾸며진 실내는 마치 고급 호텔의 로비 같은 느낌을 풍겼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달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건물처럼 거대한 검은 구체가 둥실 떠올라 있었다.
<불변하는 검은 공>
옮길 수 없고, 부술 수도 없는 오브젝트.
그 외 외부 작용은 없음.
그나저나 이렇게 커다랗고 눈에 띄는걸, 예술 구조물이라고 속였단 건가?
뚜방뚜방.
천천히 가까이 다가서 살펴보니, 왠지 구체의 표면이 말랑말랑한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서 구체에 손을 대자, 고요한 호수 표면에 손을 댄 것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제임스와 예린이 호들갑 떠는소리가 왠지 멀게 느껴졌다.
따뜻한 물 같은 촉감.
나는 점점 그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