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4
자신의 체면이고 뭐고 다 가져다 버린 얼빠 여우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적당한 기행은 매력이라 그러지만 그게 정도를 넘어서면 혐오스럽다고.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얼빠 여우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최소한 내 파티원들은 그랬다.
그걸 보고 조이는 눈앞에서 일어난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그대로 굳어버렸고, 페이비마저도 얼빠여우의 기행을 보자마자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모두가 경악에 빠져있는 상황 속에서 프레이만큼은 평온했다. 미친 걸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그녀는 얼빠여우의 앞에 앉아 그 턱을 향해 손을 가져다댔다.
“우쭈쭈.”
“에잇! 저리 비키거라! 나는 신께서 직접 조형하신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 개취급을 당하고 싶은 거지 너처럼 어정쩡하게 예쁜 사람에게 개취급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니다!”
얼빠여우는 변태지만 나름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변태였다.
그녀는 단호하게 프레이의 손길을 쳐내고는 내 앞으로 기어와 끼잉끼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빨리 밟아달라는 것처럼.
그 모습이 너무 징그러워서 저기에 손가락 하나 대고 싶지 않았지만 이걸로 페이비에게 축복을 줄 수 있다면 싸게 치이는 거겠지.
나 하나의 존엄만 포기하면 되는 거야. 괜찮아. 바니걸을 입고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잖아? 속으로 그리 되뇌인 나는 이를 꾹 깨물고 얼빠여우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렸다.
“저기 여아야. 미안하다만 갑옷을 벗고 맨발로 밟아줄 수는 없느냐?”
“시끄러워♡ 허접 변태 여우♡ 개새끼주제에 어디서 사람 말을 하는 거야?♡ 개새끼면 주인이 주는 대로 만족하고 꼬리나 흔들라고♡”
차가운 철갑옷으로 머리를 찍어 눌러 주었더니 얼빠여우가 내가 시킨 대로 기분 좋다는 듯 짖으며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중에 갑옷 세척해야겠다. 특히나 발 부분은 더 빡빡하게 씻을 거야.
*
“죄송해요. 알른 영애. 저 때문에.”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허접 성녀님? 조용히 하세요. 무능한 분께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걸 듣고 싶지 않거든요.”
“죄송합니다…”
방금 전의 일을 굳이 상기시키지 말라고! 지금 어떻게든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자꾸 그럴 거야?!
내가 치욕스러운 것을 참아가면서 너한테 스킬을 줬으면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치면서 먹은 다음에 입을 다물란 말이야!
얼빠 여우는 한참이나 내 발 아래에 짓밟히면서 매도를 듣더니 상기된 얼굴로 일어나서 페이비를 포함한 모두에게 축복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침이 질질 흐르고 눈이 맛 가 있는 게 꼭 마약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보여서 위엄도 뭣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제대로 보상을 지급했다.
메시지 창에 스킬을 습득했단 게 떠올랐으니 확실하리라.
그 후에 얼빠 여우는 조금 더 있다 가지 않겠느냐고 우리에게 권유를 했지만 우린 모두 힘을 합해서 그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 변태 여우와 같이 있어서 좋은 꼴을 못 보리라는 걸 모두 이해했으니까.
그렇게 얼빠여우의 저택에서 탈출한 우리들은 다시 현장학습이 진행되는 숲으로 돌아왔다.
얼빠여우를 만나 시련을 치르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을 쓴 듯 하늘의 가운데에서 달이 주변의 별들에게 자신의 빛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점심 무렵부터 현장학습이 시작 되었으니 지금쯤이면 아카데미의 1학년 학생들은 지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점이겠네.
분명 다들 들떠 있겠지. 숲에 마물이 존재한다는 걸 제외하면 친한 친구들이랑 같이 숲에 캠핑을 온 거니까 말이야.
지금쯤이면 오늘 내가 대단했네 네가 좋았네 하면서 서로를 칭찬하고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 마물의 기습은 대비하고 있겠지만 실전에 흥분한 꼬맹이들이 제대로 된 방비를 할 리가 없잖아? 분명 어설픈 데가 넘쳐날 걸?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말랑말랑한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 아카데미의 1학년들에게 현실을 가르쳐 줄 시점이라 이거지.
다른 애들한테는 참 안 된 일이지만 나 지금 얼빠 여우 때문에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올랐거든? 이걸 해소할 곳이 필요하다고.
‘여러분들…’
“허접들. 이제 내가 처음 이야기했던 그걸 할 시간이야. 설마 벌써 그걸 까먹은 허접 멍청이는 없지?”
사람사냥을 시작하자.
지금 내 마음 속에 쌓인 울분을 다른 무고한 사람들에게 풀고 말겠어.
*
아서는 모닥불을 나뭇가지 끝으로 뒤적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이번에 그와 동행을 하게 된 이들은 하나 같이 얼굴에 웃음을 담고 있었다.
“매튜님. 역시 주신 교회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분 다우십니다. 신성마법이 펼쳐지는 타이밍이 어쩜 이리 좋은지.”
“하하. 그게 다 비고 영식께서 앞에서 떡하니 버텨준 덕분이죠.”
“그게 어찌 제 덕분이겠습니까. 그는…”
아서의 파티는 오늘 하루 동안 무척이나 뛰어난 성과를 얻었다. 그는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덕분도 있었지만 아서의 지휘가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서는 이번 아카데미의 현장학습이 사이틸 숲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이틸 숲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루시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 이번에야 말로 루시를 자기 아래에 두기 위해서.
사이틸 숲의 지리가 어떻게 되는 지를 알아내고. 그 곳에 어떤 마물들이 서식하는 지, 그들을 어찌 사냥해야 하는 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마물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지, 이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공부했으며 자신의 지식을 실전에 적용시키기 위해 많은 물건을 사들였다.
덕분에 아서의 일행은 첫 날부터 오십에 달하는 마물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아서의 철저한 준비가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낼 수 없었을 일이었다.
물론 그 과정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고생을 한만큼의 보상을 얻은 덕분인지 파티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아서는 웃으며 이야길 나누는 파티원들을 보며 내일을 고민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현장학습은 선두주자에게 유리한 형태로 되어 있었다.
숲에 존재하는 마물이 한정되어 있으니 먼저 많은 양의 마물을 사냥하는데 성공하면 후발주자는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루시 알른이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그녀가 사냥할 마물이 없다면 높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
그러니 이 현장학습이야말로 그가 루시를 이기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이 곳에서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전략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내일까지는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강행군을 이어나간다. 그럼으로써 이 숲에 존재하는 모든 마물을 선점하는 거다.
불평이 나오긴 하겠지만 압도적인 실적 그리고 뒤에 이어질 휴식에 대한 확신을 주면 괜찮겠지.
좋아. 이번에야말로 루시 알른을 이길 수 있어. 그 오만한 얼굴에 패배를 새겨줄 수 있다고.
그리 생각을 하며 아서가 손에 힘을 주던 때에 수풀 너머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뭐지? 마물인가?
“모두 일어나!”
오늘 하루 동안 아서의 명령을 따르며 지시에 익숙해진 이들은 한치 망설임없이 전투 태세를 취했다.
“뭐에요. 불쌍왕자님의 파티였나요? 어쩐지 칙칙한 패배자의 냄새가 난다 싶었어요.”
허나 어둠 속에서 아서가 익히 들어온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아서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루시 알른이었나. 어떤 의미로는 마물보다 더 어려운 것이 튀어나왔군.
“안녕하세요. 불쌍왕자님.”
“그래. 반갑다. 루시 알른.”
수풀을 해치고서 나온 갑옷을 입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확인한 아서는 손에 쥔 검을 늘어트렸다.
루시 알른에 조이. 프레이 켄트. 거기에 성녀님인가.
어이가 없군. 사실상 현 아카데미 1학년으로 짤 수 있는 최선의 조합이지 않나.
지금 파티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고 지금 여기에 없는 자칼을 끼우더라도 정면전은 불가능.
실로 끔찍하군. 저와 제대로 붙으려면 현직에서 일하는 기사들을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
“이 늦은 시간에 왜 방황을 하고 있나. 밤의 숲은 위험할 터인데.”
“제 파티를 불쌍왕자님네 같은 허접 파티와 비교하지 말아주실래요? 기분 나쁘니까.”
개개인의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밤에도 사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긴 루시 알른이니 가능하겠군.
저 자는 평소에도 파티를 이끌고 강행군의 연습을 하는 이이니 말이다.
프레이 켄트나 조이도 루시 알른과 함께하며 체력이 많이 늘었으니 하루 정도 밤을 새는 건 일도 아니겠지.
성녀님께서도 생각보다 체력이 좋으신 모양이야.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거의 없는 걸 보면.
아서도 마음 같아서는 저런 강행군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소부터 루시 알른의 강행군에 익숙한 저 파티와는 다르게 아서의 파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이래서야 아무리 내가 준비를 잘했다 하더라도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겠군. 총체적인 사냥시간에 차이가 날 테니.
쯧. 준비가 부족했다. 이런 이벤트가 없을 때부터 미리미리 파티원들을 준비시켰어야 했어.
“수고하도록. 우리는 휴식을 취해야 해서 말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재차 통감한 아서가 지나가기를 권유했지만 루시 알른은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더 할 말이 있는 것인가?
“얼빵 영애.”
“네.”
루시 알른이 조이를 부른 순간 조이가 미리 캐스팅을 하고 있던 마법을 펼쳤다.
그녀가 펼친 얼음 마법은 정확히 모닥불 위에 떨어져 어두운 숲의 유일한 광원을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끄억?!”
갑작스러운 어둠에 당황하던 아서는 자신의 복부를 후려치는 묵직한 일격을 받아내곤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닥의 흙을 긁어대는 것뿐이었다.
아서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동안 어둠 속에선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
남자들의 비명소리.
하나 둘 그 육신이 바닥에 널부러지는 소리.
조용한 숲에 여러 남성들의 신음소리만이 들리게 되고 나서야 다시금 숲에 빛이 생겨났다.
그제서야 간신히 고개를 든 아서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자신의 파티원들을 발견했다.
“루시 알른! 이게 대체 무얼 하는 짓인가! 같은 학생들을 공격하다니!”
“뭐가 잘못됐나요? 허접들에게 주제를 알려줬을 뿐인데.”
“뭐가 잘못됐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봐요. 아카데미 허접 교수들이 아무 개입도 안 하잖아요.”
루시의 말을 들은 아서는 그제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숲에 퍼져서 학생들의 안전을 지키고 있을 터.
그런 이들이 어째서 이 소란에 개입하지 않는가. 소란이 일어날 걸 몰라서?
그럴 리가. 이 곳에 있는 면면을 보라.
왕자에 성녀.
공작 영애와 백작 영애.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이가 없다.
그런데 감시를 게을리 할까.
이번 해에 몇 번이나 문제가 생겼었는데 그럴 리가. 그러니까 이건.
“아카데미에서 이를 방조하고 있다?”
“불쌍왕자님. 멍청이에요? 방조 같은 게 아니에요. 애초에 현장학습은 이런 거니까.”
루시 알른은 그리 이야기를 하고서 아서의 검을 걷어차 저 멀리로 떨어트렸다.
애초에 이런 거라니.
학생들간의 싸움을 유도하고 있었다고? 아카데미 측에서?
그러고 보면 짐작이 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다른 학생을 공격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없는 것.
한정된 숲의 마물과 할당량.
많은 전리품을 모아갔을 때 주어지는 보상.
그런가! 그런 것이었나!
“불쌍왕자님께선 바보에 멍청이지만 우둔하진 않으신가 보네요.”
“우리가 모은 전리품을 뺏아갈 생각인가.”
“뺏아가다뇨. 이건 교육비에요. 불쌍왕자님에게 현실을 알려준 대가라고요. 절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시겠어요? 나쁜 건 멍청한 왕자님이니까 말이에요.”
아서는 가증스럽게 웃는 루시 알른을 보고서 헛웃음을 지었다.
진심으로 열이 받는 군.
“자 순순히 전리품을 내놓으세요. 그럼 최소 할당량은 남겨드릴 테니까.”
분하고 또 분했지만 아서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루시 알른이 바란다면 이 파티를 궤멸시키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아서는 떨리는 손으로 루시에게 자신이 하루 종일 고생해서 모은 전리품을 건네주어야 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루시 알른.”
“푸훗. 약골인 불쌍왕자님께서 복수요? 해보세요. 그래봐야 제 발 밑에서 버둥거리는 게 한계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