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6
“아. 젠장. 또 발소리야.”
“일단 경계태세. 상황을 보자.”
제이콥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현장학습이 시작되고서 삼일 째 아침. 이 숲은 지옥이 되어 있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낙제를 면하기 위해 다른 파티를 습격했고, 습격당한 자들은 또 다시 성적을 위해 자신들보다 약한 파티를 공격하고 있었다.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지옥 같은 현장 속에서 제이콥의 파티는 약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이콥의 파티는 이러한 것을 고려해서 짜여진 파티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이번 현장학습에서 높은 성적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들끼리 모여 낙제를 면할 수준의 전리품만을 모으고서 나머지 시간 동안은 느긋이 숲에서 캠핑을 즐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이 파티는 무력적으로 뛰어나지 못했다. 아카데미의 던전에 들어간다면 10층의 보스를 상대로 고전을 하다 패배할 정도로.
덕분에 그들은 루시 알른이 약탈을 시작한 첫째 날의 밤을 기점으로 항상 다른 파티의 먹잇감이 되어야 했다.
목숨을 걸어가며 필사적으로 모았던 전리품을 뺏기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전리품을 모으려 마물을 상대하다 또 다시 다른 파티의 습격을 당해 다 사냥한 마물을 빼앗기고,
여러 고난 속에서 전리품을 하나하나 모으다 또 다시 다른 파티에게 습격을 당하고.
제이콥의 파티에게 이번 현장학습은 학습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건 괴롭힘이었다. 힘이 부족하다는 너무나도 큰 죄 때문에 당하는 괴롭힘.
제이콥이 꿈꾸던 현장학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힘을 모아 마물을 사냥하고 밤늦은 시간에는 밤 하늘의 별 아래에서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며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그런 것이었단 말이다.
분명 즐거웠어야 할 현장학습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제이콥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빼앗기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나도. 우리도.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 경험을 쌓았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반격을 해 볼 거야.
그래. 우리도 빼앗아 볼 거라고! 그리 결심을 하고서 검을 굳게 잡았던 제이콥이지만 그는 수풀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욕을 잃어버렸다.
“반갑네.”
아서 솔라딘. 솔라딘 왕국의 제 3왕자이자 현 소울 아카데미에서 지닌 무력으로 열 손가락 안에 들 괴물.
그 뒤에 있는 이들도 아서와 파티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제이콥의 파티로써는 제 아무리 발악을 한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젠장. 하필이면! 제이콥은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에 반항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저들의 무력에 박살이 날 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비를 구하는 편이 옳다. 우리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제발 빼앗아 가지 말라고.
“아.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그대들의 전리품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니까.”
“…정말입니까?”
“그래. 빼앗아 갈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겠는가?”
그 말이 옳았다. 아서가 그들에게 약탈을 자행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대화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냥 내놓으라는 한 마디면 제이콥의 파티는 무릎을 꿇어야 했으니까.
“그럼 왜.”
“나는 지금 한 가지 계획을 짜고 있다네. 그를 위해서는 우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지.”
“예? 그게 무슨.”
“현장학습을 이 꼴로 만든 원흉이 히히 웃으며 즐겁게 다니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는가?”
현장학습을 이렇게 만든 원흉. 그것이 누구인지는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이 숲에서 돌아다니는 모든 이들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까.
루시 알른.
현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닌 신성.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을 보유한 이.
그와 동시에 소울 아카데미에서 계속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세기의 천재.
입학시험에서 제이콥의 목숨을 구원해주었던 사람.
“본인은 말일세. 그녀에게 자신이 저지른 원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생각이라네. 마음 같아서는 우리 파티만으로 그를 되갚아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루시 알른이 너무 강해서 말이야.”
“그래서 아카데미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 모아 협공을 하겠다는 거군요.”
“그렇지. 본인은 루시 알른에게 자그마한 변수도 주고 싶지 않거든.”
어중간하게 준비를 한다면 루시가 되레 모든 걸 박살낼 게 분명하니 철저하게 준비해서 무너트리겠다는 아서의 말에선 집념이 느껴졌다.
그가 이번 일에 얼마나 몰두를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일에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합당한 보수가 주어질 걸세. 루시 알른이 지니고 있는 전리품을 공평하게 배분할 생각이니까.”
루시가 지니고 있는 전리품의 공평한 배분.
지금 루시는 첫 날부터 아카데미의 수많은 파티를 약탈하며 전리품을 끌어 모았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전리품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 수는 상당할 터.
그를 빼앗아 모두에게 공평히 나누어 준다면 제이콥의 파티도 낙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정말입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제이콥의 친구가 목소리를 내자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명예를 걸고서 약속하지.”
일국의 왕자가 자신의 지위를 걸고서 한 약속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아니했다.
제이콥의 파티원들이 희망을 보고 웅성이기 시작할 무렵 이 파티를 끌어 모은 장본인인 제이콥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아서 왕자님.”
“본인의 권유를 거절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예. 알른 영애께선 제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십니다. 전 그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아마 루시는 진즉에 제이콥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으리라. 새로이 역사를 써나가는 그녀라는 별에게 제이콥 같은 미물은 중요치 않은 존재일 테니.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땅의 미물은 하늘의 별을 잊을 수 없는 법이었다. 고개를 숙인 제이콥을 본 아서는 가만 그 뒤통수를 바라보다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의 친구들이 어떤 의견을 지녔는지는 묻지 않는가?”
“아! 그건.”
“아뇨. 왕자님. 저희도 동의합니다.”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신 분을 어찌 공격하겠습니까.”
제이콥이 당황해서 고개를 들기 무섭게 뒤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하나같이 제이콥의 의견과 자신들의 의견과 같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본인이 그대들을 적이라 규정할 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저희 뺏길 것도 없습니다! 빈 주머니에서 먼지나 가져가시죠!”
항상 수다스러운 제이콥의 친구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이야기를 하자 아서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쿡쿡 거리던 그는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그대들의 뜻을 존중하지. 대신 우리의 방해는 하지 말게. 그랬다간 본인도 그대들을 공격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서가 떠나간 후 제이콥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진짜 무섭다. 왕의 피를 이으신 분이라 그런가 기백이 장난이 아냐. 잡아먹히는 줄 알았네.
“야! 이 미친 새끼야! 합의도 안하고 그런 걸 지르면 어떡하냐!”
“진짜 왕자님한테 뒤지는 줄 알았잖아. 이 쓰레기야!”
“뒈져! 씨발! 너 혼자 마물 사냥해서 전리품 구해 와 이 새끼야!”
허나 제이콥이 그 이상 방금 전 일을 돌이켜볼 수는 없었다. 그보다 먼저 그의 뒤통수에 친구들의 애정담긴 손길과 발길이 쏟아졌으니까.
*
지난 이틀 동안에 너무 심하게 약탈을 하고 다닌 탓일까. 아카데미의 다른 학생들의 경계심이 많이 올라가 있었다.
이제는 페이비가 앞에 나서더라도 안심은커녕 먼저 무기를 들이밀기에 바빴지.
그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지네가 눈을 부릅뜬다고 해서 우리 파티의 무력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페이비의 버프를 받은 후 조이가 선공으로 마법을 때려 박고 그 혼란 속에서 내가 돌파해서 어그로를 끈 다음에 프레이와 함께 각개격파를 하는 이 구조를 어떻게 막아낼 건데.
넷이서 협공을 하더라도 나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는 허접들이.
그렇게 또 다시 하나의 파티를 털어먹은 나는 그들이 교육비로 내어 준 전리품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내가 여태까지 모은 것들을 확인했다.
히야. 내가 많이 모으기는 했네. 이 정도면 게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인데?
발로 뛰어다니면서 모은 거라서 그런가 엄청 뿌듯하네. 이거면 현장학습의 1등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를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던 중에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정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리나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본녀가 이 곳에 올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겠느냐?”
“아…”
얼빠 여우가 목소리를 높이자마자 조이의 동정 어린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는 페이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학생들을 약탈할 적에는 미묘한 시선을 던지던 페이비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도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진짜 얼빠 여우 너 대단하다. 네가 얼마나 징그러우면 다른 애들이 날 동정하냐.
내가 혐오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그녀를 내려보자 여우의 모습을 한 얼빠여우의 꼬리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 시선이 참으로 좋구나. 좀 더 노려봐 주겠느냐?”
‘죽어.’
“왜 살아 있는 거야? 역겨워. 죽어. 자살해.”
“으음. 미식이 따로 없구나. 마음 같아선 더 맛보고 싶지만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만하자꾸나.”
얼빠 여우는 그리 이야기를 하고서 다시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여성치고는 상당히 키가 큰 편인 얼빠여우와 꼬맹이와 다름없는 나다. 얼빠 여우가 사람의 모습을 취함에 따라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봐야 했다.
징그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짜증이 났다. 이상하게 얘랑 같이 있으면 분노의 상한선이 낮아지는 것 같아.
“가축이면 가축 답게 네 발로 기어야지?♡ 왜 사람 흉내를 내는 거야?♡ 앉아♡ 역겨운 변태 여우♡”
“왕!”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개처럼 짖는 얼빠여우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풀리…기는 개뿔!
아. 젠장. 이 변태랑 같이 있으니까 점점 나까지 오염되어가는 느낌이야.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왕!”
“숲의 주인이면서 상황파악을 할 능력도 없어?♡ 허접♡ 주제 이하♡ 변태짓밖에 못하는 머저리 가축♡”
얼빠여우는 내 말이 기쁜 지 웃으며 헥헥거리다 이내 조이와 페이비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서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물론 그 때에도 그녀는 여전히 네 발로 기어다니는 상태였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힘을 합쳐 그대를 공격할 생각인 듯 하더구나.”
‘아서를 중심으로요?’
“멍청한 불쌍왕자님이 한 가운데에 있지?”
“알고 있었느냐?”
당연하지. 이 숲에서 그토록 깽판을 쳤는데 내 쪽으로 증오가 안 모일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평판이 나락인 나다. 당연히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지.
“내 그대들을 저택에 숨겨줄 수도 있다만.”
‘필요 없어요.’
“가축의 집에 숨으라고? 싫어. 짐승냄새가 배길 것 같으니까.”
숨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지? 마물의 전리품들이 알아서 내 앞으로 걸어와 주는데 말야.
“대책이 있느냐?”
‘당연하죠.’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