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38

송파구 싱크홀을 가까스로 피해 간 주택가에 차분한 색조로 새로 칠해진 벽을 가진 한 주택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보이는 넓은 거실에는 이삿짐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포장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서울숲에서 이사를 온 두 자매의 집이었다.

송파구 싱크홀과 가까워서 그런지, 놀라울 정도로 저렴하고 넉넉한 크기의 새집 거실에서 두 자매가 서로의 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문신투성이인 언니는 푹신하지만 약간 낡은 소파에 똑바로 앉아 TV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고 있고, TV에서 나오는 빛이 거실에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자는 이 TV라는 것을 볼 때마다 놀라웠다.

연금술도 마도서도 아닌 것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니!

하지만 TV를 즐겨보느냐는 다른 이야기였다.

TV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뉴스와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 기자들의 다급한 목소리로 깜빡였지만, 그녀가 실제로 이 정보의 홍수를 즐기고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재미로 본다기보다는 의무감에 보는 느낌이었다.

방에서 나와서 뉴스 정도는 보라는 여동생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보는 중이었다.

여동생은 편안한 표정으로 언니의 무릎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소파를 따라 몸을 쭉 뻗은 채 누워 있었다.

여동생은 화면의 깜박이는 불빛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울숲에 있을 때는 그렇게 TV가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 왜 그러고 있어?”

여자는 뉴스 좀 보라고 불러낸 당사자가 TV를 안 보는 것을 보고 가볍게 물어봤다.

“그냥 쉬는 거야.”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얼굴을 올려다보며 여동생은 히히 웃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서, 여자는 손바닥으로 여동생의 눈을 덮었다.

[트리니티 제3 연구소장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

그때 TV에서 믿기 힘든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남자가 죽었다고?

“트리니티 제3 연구소장이 죽었다고? 누가 죽인 거지? 오브젝트는 그를 죽일 수 없을 텐데!”

“언니는 몰랐나 보네? TV에서 꽤 많이 나왔어. 회색 사신이 죽인 거래.”

회색 사신?

오브젝트가 검은 액체를 극복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여자는 여동생의 말을 듣고 두 가지 결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회색 사신이 뭔가 특별하거나, 회색 사신이 죽였다는 사실이 거짓이거나.

그 오만한 남자가 자기 죽음을 가장할 리가 없으니, 죽은 것은 확실할 것이다.

사실상 세계를 망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세계를 전부 오염시킨 검은 액체의 냄새가 코끝에 남아있는 것만 같은데….

“언니 괜찮아?”

왠지 넋이 나간 것 같은 언니를 보며 여동생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

장벽의 균열을 넘자,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예린이를 위한 복수를 잠시 잊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내 인식이 닿는 모든 세계가 나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 시선이 닿는 길을 따라서, 마치 세계의 창조자가 나만을 위해 혼돈 속에 그림을 채워 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안개로 가득한 세계는 내 시선이 닿는 순간 조금 더 분명한 모습을 갖췄다.

모호한 안개는 지평선 너머로 밀려갔다.

혼돈으로 가득 찬 세계가 다시 짜 맞춰졌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도 굉장히 불안정해 보였다.

억지로 꿰매어 붙인 대지와 하늘.

이런 세계가 안정적이라면 그것도 너무 이상한 일이겠지.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를 향해 다가가기 위해, 발을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

그 순간.

내 한쪽 발은 소용돌이치는 공간에 휩쓸려 조각하나 남기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통에 깜짝 놀라서,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장작이 충분하니 이 정도 상처는 순식간에 재생됐지만, 너무 아팠다.

직접 당해보니, 공간 절단은 너무 위력적이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내 몸을 지켜주던, 물리 면역을 이렇게 쉽사리 무시해 버리다니!

저 뒤틀린 공간을 뚫고 지나가기가 싫어져서, 나무와 남색 달의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나무는 <표면에 손을 얹고 [수고했어. 이제 쉬어도 돼.]라는 의지를 전달한다.>였다.

그리고 남색 달은 <나무의 파괴.>였다.

다행히 파괴 조건은 위력적인 면모에 비해 명확했다.

사실 굉장히 복잡한 조건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명확해서 좋네.

다가갈 필요가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 내부는 남색 달의 영역인지, 미니 사신 정원이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는 공간이라서 매우 곤란했다.

최대한 공간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공간을 붙잡아서 그런지 허무하게 공간 속으로 갈려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전신에서 불꽃이 핏물처럼 흘러나왔다.

한걸음, 오른손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또 한걸음, 왼 발목이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뒤틀리며 사라졌다.

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크게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상처는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고통은 잔상처럼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SDVIMVFoanVzY1YwSVhjamMzUkt1WlJKZ0NsamtaQ0sveENFK2VoZUwvVy9TRklTelZYWERKdlEwSWxwaDFqYg

공간을 다루는 내 능력은 열화판인 데다가,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한 걸음을 내디디면 꼭 한군데 이상의 부위를 제대로 붙잡지 못했고, 잘려 나갔다.

한걸음, 송곳처럼 뒤틀린 공간이 내 한쪽 눈을 관통했다.

또 한걸음, 날카로운 칼날을 밟은 것처럼 발바닥이 절단됐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인간을 구할 때, 타협하면 언젠가는 오브젝트 사고로 모든 장작을 잃어버릴 테니까.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

굶어 죽을 뻔한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해.

지구상의 모든 장작은 내 거야.

나는 예린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나무까지의 거리는 멀었고, 내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장작은 줄어들기만 했다.

***

부시장은 현실과 꿈, 그 중간 어딘가를 끊임없이 유영하는 것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대한 뭔가가 이 공간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혼돈이 가시고 명확해진 세계에서 부시장이 발견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오브젝트, 회색 사신이었다.

부시장의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일이었다.

‘허, 제임스. 네 녀석이 드디어 미쳤구나. 이런 비상사태에 오브젝트 통제에 실패해?’

하지만, 내심 기대도 있었다.

수많은 오브젝트를 제거해 왔던 회색 사신이라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

하지만 그 기대는 회색 사신이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큰 상처를 입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가 분석해 온 회색 사신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 변덕으로 사람을 구할 순 있어도, 손해를 보면서까지 행동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상황은 의외의 상황이었다.

피부가 찢어져도, 팔다리가 날아가도 끊임없이 회색 사신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설마, 제임스 시티를 구하기 위해서 저러는 건가?’

거의 평생을 오브젝트 관련 일을 해왔던 부시장조차 처음 보는 오브젝트의 이타적인 행위.

회색 사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부시장의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수많은 오브젝트 사고를 겪어오면서, 부시장은 오브젝트의 본질을 악하다고 보고 있었다.

인간을 속이고, 파괴하고, 나락으로 내던지기 위한 괴물들.

하지만 회색 사신의 분투를 보면서 그 선입견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회색 사신만큼은 천사와 같은 이타적인 오브젝트였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생각은 회색 사신이 다칠수록 강화되었다.

발목이 잘려, 바닥에 쓰러지면 너무나 안타까웠다.

구멍이 뚫려 황금색 불꽃을 흘리면, 눈물이 흐를 정도로 슬펐다.

어느새, 부시장은 회색 사신을 응원하고 있었다.

***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고행의 길이 끝나고, 나는 나무의 앞에 설 수 있었다.

나무 앞에 도착하자,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은 공간의 뒤틀림은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 자리를 대신 한 것은 달콤하고 특이한 과일 향기.

처음 맡아보는 냄새인데도, 왠지 맡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향기였다.

드디어 끝났어.

나무 위에 손을 얹자, 왠지 나무가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고했어. 이제 쉬어도 돼.]

나무를 향해 의지를 주입하자, 처음 보는 광경이 보였다.

광활하고 어두운 밤하늘 아래, 공기는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향기는 저 멀리서부터 스멀스멀 다가오는 검은 액체의 석유 냄새에 지워져 가고 있었다.

남색 달이 떠오른 과수원 한가운데, 신비로운 느낌을 풍기는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서 있었다.

그중 유독 높고 커다란 과일나무.

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마치 별에 그 손이 닿을 것처럼 높이 가지를 뻗은 나무에 손을 대고 말했다.

“미안해. 조금만 더 수고해 줘.”

나무를 향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한 소녀가 뒤를 돌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소녀는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뭔가 이해한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미소와 함께 과수원의 풍경은 깨어지듯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패치워크처럼 기워 붙인 하늘도, 퍼즐처럼 맞물린 대지도, 나뭇잎처럼 떠돌던 공간의 파편들도 빛으로 변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부서져 내린 빛의 조각들로 가득 차올라, 마치 온 세상이 하얀빛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변해버렸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음 소거된 것처럼 멀게 느껴질 때쯤, 세상을 가득 채운 빛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빛이 줄어들면서 익숙한 윤곽과 색상이 돌아오고, 주변 세계가 다시 초점을 맞췄다.

어느새 뒤틀린 세계는 사라지고, 익숙한 밤하늘이 보였지만 약간 변해있었다.

커다란 달과 붉은 달, 푸른 달 그리고 남색 달.

달빛은 지면에 내리쬐며, 풍경을 전과는 조금 다른 색조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에는 날카로운 칼날로 아무렇게나 잘라 붙인 것 같은 잔해들이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보지 못한 양식의 건물 파편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예리하게 잘려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들이 가득한 대지를 제임스 시티의 장벽이 지평선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