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9
“칼. 네 아가씨께서는 분명 알른 가문의 피를 잇고 계시구나.”
백 명에 달하는 무리가 내달리는 것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덤비라고 외치는 루시 알른의 모습에 안톤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 누가 저를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서 채 반 년이 지나지 않은 이의 패기라 생각하겠는가.
현직에서 일을 하고 있는 기사나 모험가들 중에서도 저만한 기백을 보일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점은 루시가 백 명의 군단을 상대로 선전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선두로 달려든 베인즈 가문의 메릴 영애를 한 손으로 들어 집어던져버린 후로 시작된 협공에서 루시는 자신의 능력을 선보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공격 중 대부분을 막아내는 경이로운 방패술.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 네다섯이 달라붙어도 가볍게 떨쳐내는 근력.
그러는 와중에 포위당하는 것만은 피하는 넓은 시야와 빠른 판단력.
“허접들♡ 이게 다야?♡ 여자애 하나 못 잡아서 허둥지둥 대는 꼴이라니♡ 완전 웃겨♡”
한 번 실수를 저지르면 그대로 저들에게 찍혀 눌릴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까지.
루시 알른은 분명 알른 가문의 피를 잇고 있었다. 유구한 전통을 지녔던 기사 가문의 피를 말이다.
그를 칭찬하는 말을 내뱉었으니 옆에서 호들갑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오리라 예상했던 안톤이었지만 놀랍게도 칼은 조용했다.
뭐지? 이 녀석의 성격 상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 아가씨니까요. 이 정도는 별 거 아니죠!’ 라는 대답이 나와야 할 텐데?
그리 생각을 하며 고갤 돌린 안톤은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아래를 살피고 있는 칼의 모습을 발견했다.
“칼?”
“…아. 예. 안톤 교수님.”
“왜 그러는 거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가씨의 성장이 빠르셔서… 좀 놀랐습니다.”
칼은 되도록 루시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으려 노력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간에 그도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있으니까. 모든 것을 내다 버린 채 루시의 곁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루시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바로 달려가기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칼은 루시가 얼마나 강해지고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최근 들어서는 대련 상대의 역할을 켄트 가문의 영애가 대신하고 있기에 더.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칼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한 루시의 모습을 보고서 전율했다.
저것이 아가씨의 전력. 그랬구나. 대련 수업에서도. 아카데미의 던전을 공략할 때에도. 아가씨께선 여유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자신의 전력을 다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아가씨를 상식이라는 범주 안에 넣고 있었다! 아가씨께서는 상식을 깨부수고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계셨거늘! 기사된 자로써 이 얼마나 불경한 일이란 말인가!
아아. 오늘이 일이 끝나면 가주님께 보고를 드려야겠군. 아가씨께서 얼마나 성장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분명 기쁨의 눈물을 흘리실 터.
겸사겸사 아가씨가 자신의 주변인들과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드려야지.
“두 사람! 지금이 구경을 할 때입니까?!”
안톤과 칼이 나무 위에서 난전을 구경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 그 옆에 아카데미의 교수가 다가왔다.
마물사냥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제슬은 자신의 한심하다는 듯한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아니했다.
“왜 그러십니까? 제슬 교수?”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가 있냐고요?! 당연히 있죠! 지금 난전이 이루어지는 구도를 보세요! 난장판이라고요!”
난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서 다 같은 난전이 아니다.
혼란의 와중에도 지휘계통이 제대로 잡혀 있어서 연계가 이루어지는 전투가 있는가 하면 모두가 이성을 잃어버린 채 날뛰기만 하는 전투도 존재한다.
지금 이 곳에서 벌어지는 난전은 분명 후자였다.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군에 대한 오사가 빈번히 일어나고. 바닥에 널부러진 아군을 짓밟는 이가 부지기수이며. 루시를 공격하기 위해 다가가다 다른 사람과 얽혀 무너지는 사람이 넘쳐나는 상황.
언제 커다란 사고로 이어지더라도 전혀 이상치 않은 것이 현 시점이었다.
학생들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에서 지금 이 상황은 최악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현장학습이 끝날 때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도 않았습니다! 교수 권한으로 현장학습을 여기서 멈추고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슬의 열성적인 발언을 들은 안톤은 잠시 고민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슬 교수의 발언이 옳습니다. 다른 교수들은?”
“모두 동의했습니다. 안톤 교수님만 허락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선두로 나서죠.”
안톤은 그리 말을 하고는 나뭇가지에서 바닥으로 착지했다.
큰 덩치에 비해 너무도 가볍게 착지를 한 그는 혼란에 빠진 이들을 둘러보고는 목을 주물렀다. 어지간한 경고로는 멈추지도 않겠군.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안톤은 입을 크게 열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폐가 머무르는 장소가 빠르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겉보기에도 폐가 터질 것 같은 모습이 되었을 무렵 안톤이 입을 열었다.
“모~두 정지!!!!”
방금 전 루시가 확성마법을 이용해 이야기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클 것 같은 음량이 공터를 너머 숲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루시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던 이들도 귀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고막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으니까.
*
으갸악. 귀가. 귀가 아파! 이거 나 고막 찢어진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어 아르마디의 손길을 스스로에게 사용해 보았지만 그런다고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고막에는 이상이 없었던 모양이다.
게임에서 볼 때는 사람 목소리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냐 싶었는데 실제로 당하니까 그 심정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목소리 장난 아니네. 게임 속에서 봤던 이벤트를 실제로 경험했다는 점에서 흐뭇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그보다 고통이 더 커.
신체 스펙이 말도 안 되게 높은 나조차도 이 꼴인데 다른 학생들은 어떻겠는가.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교수들의 판단 하에 1학기 현장학습을 종료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 한 가운데에서 안톤은 자신의 묵직한 성량으로 현장학습의 끝을 고했다.
저기요. 안톤 교수님. 현장학습을 끝내는 거야 좋습니다만 지금 주변을 좀 보시죠.
여기서 당신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일단은 학생들한테 추스를 틈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톤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른 교수가 튀어나와서는 안톤에게 무어라하기 시작했다.
그치? 내 쪽이 상식적이고 저 사람이 비상식적인 거 맞지? 저걸 보니까 좀 안심이 되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구나.>
‘그렇죠.’
나의 계획은 처음부터 현장학습의 종료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크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제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상대가 어찌 될지 신경쓰지 않고 조져버릴 생각을 했다면 방법이 몇 개 나오겠지만 난 아직 살인을 저지를 생각이 없거든.
그 정도로 위험한 걸 교수 측에서 허락할 리도 없고 말이야.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난 애초부터 난전의 승리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난전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랐다.
이 이상 난전이 이어진다면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교수들이 생각하길 원했다.
왜냐고? 그래야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짜낼 수 있으니까.
어디 보자.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프레이가 조이를 데리고 아서 쪽에 붙었어야 했는데.
슬쩍 아서 쪽을 살펴 보면 아서와 조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좋아. 완벽해.
<그럼 이제 계획을 마무리 지으러 가보자꾸나.>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학생들을 지나쳐 교수 쪽으로 다가섰다.
안톤은 제슬에게 잔소리를 듣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화색을 지었다. 나를 잔소리에서 빠져나가게 해 줄 구원자라 생각한 듯 했다.
실은 더 골치아픈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인데 말이다.
‘저기 교수님들.’
“이봐. 허접 교수들. 현장 학습을 끝낸다는 게 무슨 소리야? 아직 현장 학습이 끝나려면 몇 시간 남았잖아. 너희들은 자기가 했던 말도 기억 못하는 멍청이들이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끝을 내야 한다는 교수진의 판단입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 날선 물음에 대답을 한 것은 제슬 쪽이었다. 그녀는 공손하면서도 단호한 어투로 이해를 바랐다.
방금 전의 상황에서 교수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며 여러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는 그녀의 말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내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로.
허나 안타까운 것은 내가 이성적으로 행동할 생각이 없단 거겠지.
그도 그럴 게 나는 건방진 메스가키인 걸? 이성? 합리? 그딴 거 내 알바야? 원래 메스가키는 제멋대로인 거라고!
“재잘재잘 시끄럽네 아줌마?♡ 나는 지금 이 싸움을 왜 제멋대로 끝냈냐고 묻고 있는 거야♡”
“방금 말씀 드렸던 것처럼…”
“아아~♡ 시끄러워♡ 싸움이 계속 됐으면 내가 저 허접♡ 쓰레기♡들을 상대로 이겼을 거 아냐. 그랬다면 저 멍청이♡들에게 과분한 전리품도 내 거였겠지. 그걸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묻는 거잖아?♡ 응?♡ 지능이 낮아서 이해가 안 돼?♡”
“그 부분은 유감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줌마♡ 자꾸 히스테리 부릴래?♡ 아줌마♡가 매력이 없어서 남자한테 인기가 없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내가 도발을 거듭함에 따라 제슬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와아. 눈 살벌해. 마음 같아서는 나한테 예의가 뭔지 때려 박아 주고 싶은 게 보여.
제슬의 실력과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라서 후환이 두렵긴 한데 어쩌겠어.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는 없다고.
“책임지라고♡ 노처녀 교수♡”
“애시당초 말입니다. 알른 영애께서 정말 승리하리라 확신하는 게 가능합니까? 오히려 패배해 전리품을 뺴앗길 위기를 막아드린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중간에 난전이 멈춰버린 이상 그 누구도 결말을 알 수는 없지요.”
아하핳. 걸려들었네. 제슬 교수. 평소 이성적인 당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만한 말인데 말야.
고마워. 내가 생각한 대로 말을 해줘서.
“내가?♡ 저딴 허접들한테?♡ 하♡ 노처녀 교수는 농담도 재미가 없네?♡”
“영애의 능력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현장학습의 특수성과 당시 이어지는 난전의 상황을 본다면 영애께서 패배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잠시 실례하지.”
제슬이 방금 전의 상황을 단언하듯이 이야기하던 그 순간 옆에서 아서가 끼어들었다.
그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눈으로 날 바라보다 이내 제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 제슬 교수 그대가 말을 한 대로라면 말일세. 루시 알른이 지닌 전리품이 모두에게 배분 될 가능성이 있었단 이야기아닌가?”
아서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제슬이 이성을 되찾았다.
이제야 눈치 챈 거야 제슬?
방금 전에 네가 한 말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발언이란걸?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현장학습을 종료시켰다? 그거야 좋지.
근데 교수들의 판단 때문에 이번 현장학습에서 낙제를 당하게 될 애들이 그걸 신경 쓸까?
나를 쓰러트렸다면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지도 모르는데 교수들에 의해 강제로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런 여론이 형성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잘은 몰라도 무척이나 귀찮아지지 않을까? 응? 제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