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정장의 남자는 후배가 넘겨 준 두툼한 자료를 휙휙 넘겨보며 말했다.
“이야~ 이 정도면 데이터는 다 모은 것 같네. 지금 자료를 보니 이걸 제출만 하면 거의 끝장인 거 같은데? 내가 올 필요 없었던 거 아니야?”
후배는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했다.
“사실 조사 자체는 끝났어요. 아귀의 실체를 보지는 못 했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구요. 하지만 지금 통제가 너무 심해서 밖으로 나가는 게 불가능해요. 특히 이 중앙연구소는 어떻게 돼먹은 곳인지 나갈 수 있는 환기구조차 없더라구요. 창문을 깨고 탈출하려고 해도 창문도 안 깨져요.”
후배는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통제가 풀리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요. 딱, 조사할 때 나왔던 ‘아귀’가 풀려나올 때의 패턴이더라구요. 연구원들이 잘 안 돌아다니고, 중앙 회의실에 모두 모여 있고, 외부 출입은 전면 통제. 소름이 막 돋는 거 있죠?”
“확실히 자료를 보니 그럴 만한 상황이네. 회색사신이 탈출해 버렸고, 사신이 한 거로 보이는 살인사건마저 발생했으니까 말이야.”
남자는 중앙 연구소 CM송을 흥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상자 0명의 최고로 안전한 국립 연구소~, 라고 하는데 살인사건이 발생해 버렸으니 대사건이지. 아귀를 꺼내 들만해.”
남자는 큭큭,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를 부른 건 잘했어. 아마 통제 풀리기를 기다렸다면 연구소에서는 아귀를 풀어놓겠지. 그럼? 후배랑 이 자료는 아귀 뱃속으로 들어가는 거고.”
“그럼 빨리 돌아가죠!”
환한 표정으로 돌아가길 보채는 후배,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너무너무 돌아가고 싶지만, 불가능해. 내 지팡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해주지만 3일에 한번밖에 사용 못 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3일은 지나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3일 안에 아귀가 안 나오길 빌어보자고.”
***
‘응?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그러자 고양이가 조그맣게 애옹하고 울었다.
아무것도 없는 격리실이지만 시원한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배 위에 아기 고양이를 올리고 있으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탈출 못 하는 고양이를 골려주려고 들어온 격리실이지만, 잔뜩 골이 난 고양이의 냥냥 펀치를 맞던 중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 신체를 접촉하는 중에는 의사소통이 된다!
그래서 아기 고양이를 배 위에 얹고 모험담을 듣는 중이었다.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털. 고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시간보내기 좋았다.
격리실이 살짝 서늘한 덕분인지, 고양이도 가슴속의 불꽃때문에 따뜻한 내 몸통 위를 마음에 들어했다.
‘뭐? 더 듣고 싶으면 더 잘 쓰다듬으라고?’
후후, 속으로 웃으며 아기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연구소의 부산스러움이 정말로 먼 곳에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뭐 격리실이 밀폐가 워낙 잘돼서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하겠지만 말이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 피라냐 나비의 살인 사건 이후 중앙 연구소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연구원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게 되었고, 직원들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
가끔 보면 직원들이 푸딩같은 걸로 유인하기도 하던데, 세희 연구소에선 나를 도대체 뭐라고 적어둔 거야?!
검은 나비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걸 보면, 이번 사건도 내가 한 거로 보고 제대로 조사도 안한 거로 보였다.
피해자가 죽어 가며 나비가 보인다고 꽤 많이 이야기한 것 같은데 말이야.
연구소 복도에는 전보다 한층 늘어난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비들이 공격 대상을 정하는 기준은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나비가 또 한 명 물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날 게 뻔했다.
연구원들이 사라진 것도 조금 이상했다. 고급 인력이라 위험한 오브젝트가 돌아다닐 땐 안전한 곳에 숨어있는 건가?
뭐 여기 계속 누워 있어도 만족스럽긴 하지만 슬슬 일어나서 돌아다녀야 할 때가 되었다. 나비가 어디서 오는지도 궁금하고, 게다가 왠지 연구소 안에 수상한 분위기가 가득한 것 같았다.
‘이제 갈 거야’ 라고 의사를 전달한 뒤 고양이를 양손으로 안고 일어나자, 같이 가자고 애옹애옹 귀엽게 울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같이 영체화해서 이동하는 능력은 없었다. 아마 고양이랑 같이 넘어가면 고양이만 따로 시간의 틈새니 뭐니 하는 연구소에 잡혀 버리겠지.
‘기회가 되면 데리러 올게.’ 이런 가벼운 약속만 남기고 고양이의 격리실을 떠났다.
복도를 나서서보니 내 격리실이었던 곳이 갑자기 잘 꾸며져 있었다.
마치 세희 연구소에서의 격리실처럼 말이다.
커다란 침대와 TV, 게임기 그리고 냉장고와 간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 잠깐 시간 보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연구소 탐방이 좀 더 흥미로울 것 같아서 조금 나중에 쉬러오는 것으로 정하고 길을 떠났다.
확실히 중앙 연구소는 넓기도 엄청 넓었고, 격리 중인 오브젝트도 굉장히 많았다. 세희 연구소는 사실 고정적으로 격리중인 실험체는 나뿐이었으니 말이다. 보통 세희 연구소 조사팀이 확보한 오브젝트는 좀 연구하다가 중앙 연구소로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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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누군가 오브젝트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 투어를 해주는 게 아니라면 그냥 신기하게 생긴 동물, 식물, 사물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였다.
어느새 나는 동물원을 돌아다니는 기분이 돼서 ‘와 웃기게 생겼네.’ ‘헉, 저건 어떻게 서있는 거지?’ 같은 감상을 남기며 관광을 하고 있었다.
내적 친밀감이 쌓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름의 특별함 때문인지 내 눈을 사로잡는 격리실이 눈에 띄었다.
그 격리실 안에는 사람 손바닥만 한 푸른 도마뱀이 박수를 치면서 양발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나는 홀린 것처럼 그 격리실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꽤 어려워 보이는 피아노 곡을 현란한 발놀림으로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아서 꽤 멋있어 보였다.
양발로 모자라는 부분에서는 분신술처럼 숫자가 늘어나더니 익숙하게 곡을 진행했다.
여기가 세희 연구소였다면 내 격리실에 하나 들여놔달라고 예린에게 졸라야 할 타이밍일 텐데…
오오,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홀린 듯이 그 도마뱀의 현란한 댄스를 구경했다.
도마뱀도 기회가 되면 아기 냥이랑 같이 세희 연구소로 데려가겠다고 다짐을 하고, 다시 나비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나비의 원천을 찾아 연구소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도중, 중앙 연구소 구석의 물류 창고에서 보기에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이인조를 발견했다.
한 명은 연구소 일반 직원.
한 명은 노란 양복을 입은 남자.
그중에 수상한 건 남자 쪽.
우선 복장과 외형이 이질적이었다.
중앙 연구소는 제식 유니폼이 있어서 옷만 보면 그 직종이 쉽게 구분되는데, 저 양복은 딱 보기에도 직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온몸에 오브젝트를 잔뜩 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외눈 안경도 오브젝트.
지팡이도 오브젝트.
회중시계도 오브젝트.
오브젝트는 해로운 게 많은데,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들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이 앞에 오브젝트가 있어.”
남자는 여자를 제지하며 내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보통 나를 보면 ‘으악 회색사신이다!’ 라고 하지 ‘오브젝트’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
저 외눈 안경으로 뭔가를 본 걸까?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남자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빤히 들여다보았다.
***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문구에 당황하여 후배에게 경고를 했다.
“잠깐. 이 앞에 오브젝트가 있어.”
눈앞에 나타난 문구는 흉흉한 것 투성이었다.
[사람의 슬픔을 힘으로 삼는다.]
[사람의 비탄을 힘으로 삼는다.]
[사람의 고통을 힘으로 삼는다.]
[대상을 가장 빠르게 죽이는 방법을 안다.]
오브젝트의 특징 중 극히 일부를 보여주는 외눈 안경이 보여주는 문구였다. 문구는 보여도 그 대상은 눈에 안 보이는걸 보니 분명 유령처럼 유체화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탐정일하고 살면서 수많은 오브젝트를 봐 왔지만, 이처럼 악의가 느껴지고 흉흉한 능력을 갖춘 오브젝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그 자체로 보였다.
이건 숫제 설화에나 나오는 악마 같은 사악한 생명체가 가질 법한 능력 아닌가!
유체화와 죽음, 그리고 흉흉한 능력을 보니 대상이 누군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회색 사신인 것 같아. 후배도 조심해. 지금 보니 알려진 것보다 2배는 흉악한 오브젝트였어.”
회색 사신과 연관된 사건은 누명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정확했던 내 판단이 잘못됐던 건가?
재기 넘치던 두뇌가 녹슨건가? 분명 대중의 공포가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