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1
소울 아카데미에서 이 얼빠여우가 따라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간에 이 녀석은 상대방의 매력이 높으면 규칙이니 규율이니 하는 것을 모두 다 무시해버리니까.
그렇지만 그건 강제적인 합류 이벤트가 아니었다. 최소한 상대방의 의향을 물어보기는 했단 말이다.
이 여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게 혐오당하는 건 신경 쓰지 않지만 진짜 진심으로 미움을 사는 걸 바라진 않으니까.
게임 속에선 필요없다 그러면 잔뜩 서운한 티를 내긴 해도 이런 식으로 스토킹을 하진 않았어!
근데 지금 이건 뭐지? 나한테 미움을 사건 말건 간에 스토킹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이 녀석은 도대체 뭐야.
난 내 아래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얼빠여우의 모습을 바라보다 두 눈을 꾹 눌렀다.
얼빠여우가 온 몸으로 알빠냐 소리치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쫓아내면 이 녀석은 알게 모르게 계속 내 뒤를 따라다니며 나를 구경할 테고, 그렇다고 옆에 있으라고 그러면 웃으면서 괴상한 짓거리를 저지를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때려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강함의 차이가 존재한다.
어쨌든 간에 이 녀석은 숲의 주인이 될 정도로 강한 생명체. 아직 난 이 녀석을 쓰러트릴 수 없다.
이게 게임이라면 온갖 꼼수와 컨트롤로 해결을 보겠지만 이건 현실이니까.
전력을 다해 메이스로 후려쳐도 더 해달라는 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을 어떻게 쓰러트리겠는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구나.”
‘닥쳐주세요.’
“얼빠여우? 그 냄새나는 입 닫아줄래? 속이 메스꺼워지거든.”
이론적으로는 할배가 한 말이 맞다. 이 녀석의 존재는 분명 도움이 된다.
여러 숲의 주인 중에서도 다재다능한 편에 속하는 얼빠여우는 데리고 있어서 나쁠 것이 없는 존재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야.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침을 뱉으면 그걸 핥아먹고 포상이라는 소리를 지껄일 것 같은 정신 나간 년이랑 어떻게 같이 있을 수가 있겠냐고?!
루시가 되기 전에 남자일적에 만났더라도 기겁할 것 같은 짐승을 어떻게 옆에 둬!
흐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어서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성적이 말을 내뱉으려고 해도 그 앞에 씨발이라는 단어가 붙을 것 같아서 더 그랬다.
아니이이이이. 네가 고양이야? 여우잖아! 근데 왜 내 앞으로 기어와서는 너 내 주인이 되거라!를 시전하냐고!
똑똑.
“알른 영애. 안에 계십니까?”
두 손가락 사이로 해맑은 여우를 노려보던 나는 문 바깥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 안톤 교수인가? 전투학 관련해서 중심이 되는 사람이라 엄청나게 바쁠 텐데 여기까지 뭐 하러 왔대?
굳이 이유를 찾자면 지난 번 현장학습과 관계된 일이려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에 한해선 완벽히 떳떳한 나라 걱정이 되진 않았다.
아니 진짜로 신기한 게 현장학습이 끝나고 나서 내 평판이 오히려 올라가 버렸다니까?
내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해서 사람들의 분노를 교수진에게 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저지른 게 저지른 거라 어느 정도 평판이 나빠질 걸 각오했거든?
근데 그 일이 끝나고 나서 아서가 다른 학생들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건지는 몰라도 오히려 내 평판이 좀 나아졌어.
말은 험하게 하지만 예전이랑은 다르게 주변을 신경 쓰긴 하는 구나. 라는 느낌으로.
애버리랑 비시, 조이가 해 준 말이라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내 평판이 이전보다 좋아진 건 사실이겠지.
아서. 대체 너 그 세치혀로 학생들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진짜 고마워!
나한테 역겨움만 선사하는 어떤 여우랑은 다르게 넌 진짜 도움이 되는구나!
현장학습에서 사람들을 그렇게 규합해 준 것도 고마웠는데 사후처리까지 해주더니!
딱 기다려! 내가 너에게 필요한 최고의 선물을 가져다 줄 테니까!
“알른 영애?”
‘잠시만요.’
“기다려. 허접 고릴라 교수. 나갈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아. 어차피 얼빠여우에 관한 문제는 지금 머리 싸매고 있는 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일단 뒤로 미뤄두자.
바깥에 나가서 바람을 쐬다 보면 지금보다는 괜찮은 생각이 나겠지.
…음. 그치만 얼빠여우를 내 방에 둬도 괜찮은 걸까? 이 변태가 또 무슨 이상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염치가 있는데. 라는 단어는 얼빠여우에게 먹히지 않는다.
당신 스토킹을 할 겁니다. 라고 면전에 대고 선언하는 미친 변태한테 상식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내 스트레스의 근원인 얼빠여우를 데려가고 싶진 않은데.
어떡하지?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여기 놔두고 갈 테니까 저 변태가 이상한 짓하면 나중에 저한테 말 좀 해주세요.’
진짜 속옷을 훔쳐간다거나하는 짓을 태연하게 저지를 것 같아서 그러는 거에요. 얼마 안 걸릴 테니까 그 동안 잠시 지켜봐 주세요.
내가 그리 부탁을 하자 할배가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럼 잠시만 쉬고 올까. 내 방에서 바깥으로 나가면서 쉬고 온다는 소리가 나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하아. 어떡하겠냐. 이미 일어난 일을.
*
루시가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 리나에게 말을 하고서 떠나간 후 루엘은 방 안을 둘러보는 리나의 모습을 가만 살폈다.
참 세상에는 별에 별 것들이 다 있구나. 숲의 주인이라는 지위를 지니고 있으면서 저토록 품위가 없는 모습이라니.
더욱 악질적인 것은 저 자가 품위를 모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에 루시가 살색이 많은 복장을 입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자는 격식을 차렸다.
한 때 귀족이었으며, 성기사였고, 영웅이었던 루엘이다.
그가 보기에 리나가 몸에 익힌 격식은 당장 궁중 귀족들 사이에 내던지더라도 흠집 하나 잡히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허나 루시가 살색의 복장을 입은 순간 리나는 모든 것을 내다던져 버렸다.
자신의 욕망에 무너져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우리 여아의 외견이 아름다운 편이라지만 저는 좀 너무하지 않으냐.
저 녀석이 숲의 주인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진즉에 범죄자로 수감되었을 것이야.
꼬리를 흔들며 방 안을 둘러보던 리나는 루시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기 무섭게 몸을 일으키더니 기지개를 켰다.
활동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제발 이상한 짓은 안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우리 여아가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문제다만 그를 보고 있는 본인의 마음도 그리 좋지 못해서 말이다.
리나는 자신의 코로 방 안의 냄새를 맡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는 방향을 정하고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왜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지? 내가 있는 근처에는 여아와 관련된 것이 없을 터인데?
…아니군. 하나가 있긴 하지.
여아와 항상 함께 존재했으며, 오랜 기간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무기인 본인이.
설마. 설마 저 녀석 본인을 노리는 것인가?
안 된다. 그만두거라!
본인은 그대에게 희롱당하고 싶지 않다!
루엘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소리를 쳤지만 리나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가뿐하게 뛰어 탁자 위로 올라선 그녀는 루엘의 모습을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여아야! 제발 빨리 돌아와다오!
지금 본인은 이 상황이 너무도 두렵다!
이 정신나간 짐승이 무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제발!
루엘이 속으로 루시가 오기를 기도하던 때에 리나가 손을 뻗어 루엘의 위에 올려 두었다.
다음에 있을 일을 상상하며 루엘이 긴장을 한 그 순간.
‘반갑구나. 메이스 안에 있는 자여.’
리나가 루엘에게 말을 걸었다.
<…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대 말고 말을 걸 사람이 있는가?’
<그것도 그렇군요. 어떻게 제가 있음을 아셨습니까?>
‘본녀는 여우이니 말이다. 혼을 볼 수 있지.’
혼을 보는 것과 여우가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다만 숲의 주인이 될만큼 능력을 지닌 이이니 그 정도 능력이 있더라도 이상하진 않겠군.
<어찌보면 차라리 잘 됐군요. 리나님. 제발 이 곳에서 이상한 일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혼자 남았을 때보다 기행이 적어지기는 하겠지.
‘그대는 대체 본녀를 무어라 생각하는 것이냐?’
<저지르신 게 워낙 많으시니 말입니다.>
‘본녀는 그저 본녀의 애정을 드러냈을 뿐이다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죄책감은커녕 그게 무어가 잘못되었냐는 듯이 나오는 리나의 모습에 루엘은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것은 광인에게 상식을 기대한 본인의 잘못인가.
‘잡소리는 되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그 아름다운 여아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말이다.’
<잡소리는 아니었습니다만.>
‘단적으로 말을 하마. 본인이 여아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돕도록.’
<싫습니다.>
리나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루엘이 모르지는 않는다. 그가 괜히 평대를 하지 않고 예의를 차리고 있을까.
허나 그와는 별개로 이 변태 여우는 루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존재는 아니었다.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그보단 이 자가 주는 정신적인 피해가 더 클 게 분명했으니까.
‘저 여아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리나님의 욕망을 위해 필요한 일이겠지요.>
‘물론 그러한 사유도 있긴 하다만 그건 후순위의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단 이야기지.’
루엘은 분명 리나가 헛소리를 지껄일 것이라 확신했지만 그녀가 말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갈 테고 그러다 보면 루시가 돌아오는 시간이 가까워질 것이니 말이다.
‘지금 여아는 너무 밝은 빛을 품고 있다. 하늘의 사랑을 과히 받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저 여아의 미모를 생각해 본다면 편애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을 한다만 누군가의 사랑이 한 군데에 집중된다는 것은 곧 다른 이들의 악감정을 모은다는 일이기도 하다.
이해가 되느냐? 분명 여아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닥칠 것이다. 여태까지는 그 시련을 어떤 식으로든 넘어온 듯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 말할 수 있을까?’
<…그 소리는 그 때에 리나님께서 여아를 지켜주겠다고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정확하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본녀가 왜 굳이 저 여아의 의향조차 묻지 않고 따라 붙었겠는가.’
부서지기 직전까지 가는 것은 괜찮다. 고난 끝에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여아의 인생에 아름다움을 더할 테니까.
허나 부서져서는 안 된다. 리나가 태연히 그런 소리를 지껄이자 루엘이 입을 다물었다.
루시와 함께 꽤 오랜 시간을 보내 온 그는 여태까지 루시가 얼마나 많은 위기를 해쳐왔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의 경우에 이 여우의 도움이 있다면.
‘정 본녀가 불안하다면 말이다. 본녀가…’
*
안톤 교수가 날 부른 이유는 현장학습의 보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전리품의 정산이 끝나고 우리 파티가 1등인게 확정되자마자 날 찾아온 모양.
역대 소울 아카데미 현장학습 중에 가장 많은 전리품을 모아왔다며 웃으며 칭찬하던 것을 보면 딱히 내게 악감정은 없는 듯 했다.
내가 벌인 일 때문에 고생하느라 눈에 다크서클이 꼈는데도 말이다.
확실히 대인배라니까. 안톤 교수.
아카데미의 1등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수호의 브로치였다. 예전에 미노타우르스에게서 내 목숨을 구해줬던 그거 말이다.
이걸로 한 번은 죽음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겠네.
제일 좋은 건 이걸 사용할 일이 없는 거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여태까지 내가 겪은 일들을 보면 앞으로 무슨 위험이 생기더라도 이상하지가 않거든.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기숙사로 돌아온 난 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얼빠여우의 변태짓을 마주해야 하는 건가.
그걸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어쩌겠어. 여긴 내 방인데. 내 방에서 도망칠 수는 없잖아.
망설임 끝에 문을 열자 인간의 모습을 한 얼빠여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입구에서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다가 날 보자마자 절을 했다.
“어서오시지요. 주인님.”
…이건 또 무슨 플레이냐? 얼빠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