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뜰을 바라보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세희 연구소 부소장실.
그런 익숙한 풍경 속에서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황금빛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 한 가운데, 화분 하나가 태양의 포근한 품에 안긴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화분의 중앙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남색 새싹이 축 늘어진 채 돋아나 있었다.
“여전히 기운이 없네.”
내 혼잣말이 조용한 부소장실에 울려 퍼졌다.
식물처럼 생긴 더듬이를 가졌으니 태양 빛을 쬐면 건강해질까, 싶었지만 여전히 새싹이는 비실거리는 상태였다.
황금 사신이도 어디선가 물로 만든 물뿌리개를 구해와서 축 늘어진 새싹이의 머리 위로 물을 주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실 새싹이의 격리 장소 변경은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황금 사신이처럼 사람들에게 기운을 얻는 건가 싶어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휴게실로 옮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분주한 직원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휴게실에서도 기운을 되찾지 못했었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힘들어 보이는 표정의 새싹이.
새싹이를 관찰하며 시간이 상당히 지났는지, 해가 늦은 오후로 접어들면서 태양은 비스듬히 비치는 부드러운 색으로 빛나며 호박색으로 부소장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 햇살 속에서 나는 턱을 기대고 앉아 생기를 잃은 잎사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햇살의 따스함과 부소장실의 고요함에 취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렇게 나는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
0호 유물 테스트가 끝나자, 나는 사신이를 목말 태우고 박물관에 온 기분을 내고 있었다.
정리 중인 유물들을 돌아보니 ‘0호 유물’이라는 것들은 수첩이나 만년필 같은 개인 소지품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파닥파닥하는 사신이의 작은 발을 붙잡고 유물들을 한 바퀴 다 둘러보자, 정리를 마친 제임스가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걸로 예정했었던, 0호 유물 반응 테스트는 모두 마쳤군. 사실 이제부터는 연구소 소개와 제임스 시티 관광을 해야 하는데, 그건 힘들겠어. 그 난리가 나버렸었으니.”
아 그러면 벌써 돌아가야 하는 건가?
너무 아쉬운데.
해외여행이 쉽지 않아서 아쉬운 점도 없진 않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사신이였다.
사신이랑 해외여행을 갈 기회?
특급 오브젝트인 사신이를 데리고 가려면 오브젝트 협회의 반출 허가부터 시작해서, 여행을 갈 나라 쪽에도 허가를 맡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임스가 요청한 게 아니었다면 거의 불가능한, 웬만해서는 절대로 생기지 않을 일이네.
그런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제임스는 다른 제안을 해왔다.
“아쉬운 것 같은데, 로키산맥 쪽 연구소로 가보는 건 생각해 봤나? 자연환경도 아름답고 거대한 영체 방벽도 있어서 제임스 시티 못지않은 곳이야.”
“아, 그래도 되나요?”
“내가 부른 손님인데, 안될 리가 없지.”
제임스가 손짓하자,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여자가 한 명 다가왔다.
“아쉽게도 나는 제임스 시티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같이 가기는 힘들겠어. 대신 비서 한 명을 붙여줄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이야기해 줘.”
제임스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받은 비서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서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그럼, 제가 지금부터 안내하겠습니다. 영체 방벽 연구 단지 진입 허가와 항공기 수배로 2일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오니 이 호텔에서 쉬고 계시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호텔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가?
나는 좀 더 연장된 사신이와의 여행에 들뜬 기분을 안고, 호텔 안내도를 찾아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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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말고 다른 시설도 많던데, 사신이랑 함께라면 분명히 재미있겠지.
***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뜨니, 어느새 늦은 아침이 와버린 부소장실이 보였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풀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서류작업이 그렇게나 힘들었었나 보네.
불편한 자세로 햇빛 좀 받고 있었다고 이렇게나 길게 푹 잠들어 버리다니.
예상외로 책상 위에 엎드려서 오래 잠든 것치고는 상태가 꽤 좋았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내려보니, 화분에 대롱대롱 매달려 턱을 괴고 있는 황금 사신이가 보였다.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 그리고 동생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황금 사신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살랑살랑 생기를 머금고 흔들리고 있는 새싹이가 보였다.
“살아났구나!”
신경 쓰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살랑살랑 움직이던 잎사귀가 마치 내 말에 깜짝 놀란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미안한 감정을 담아서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자, 다시 잎사귀는 햇볕 밑에서 천천히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왜 생기를 되찾은 걸까?
햇빛이나 달빛을 쬘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 그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다른 변수가 있었을 텐데….
설마 내가 근처에서 잠을 자서 그런 건가!
그러고 보니 처음 나타난 곳도 수면실이었지.
확실하게 하려면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분명 그럴 것 같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수면실에 공간을 내서 새싹이 격리실을 만들어놔야겠네.
앞으로 해야 할 작업과 계획들을 정리하며 창문 밖을 바라보자, 안뜰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금 사신이들이 안뜰에서 무언가로부터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
밤이 되지 못한, 아직은 이른 저녁.
예린이는 물놀이하느라 지쳐서 그런지, 나를 껴안고 TV를 보던 도중에 잠이 들었다.
냠냠.
예린이는 잠이 든 상태에서도 내 더듬이를 행복한 표정으로 물고 있었다.
나는 예린이의 품속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온 뒤, 나랑 비슷한 크기의 미니 아귀를 불러서 예린이의 품에 안겨주었다.
예린이는 몸을 뒤척이며, 내 더듬이 대신 아귀의 더듬이를 입에 물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근새근 잠든 예린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세희 연구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전에는 자주 했던 장난이지만, 지금은 하지 못하는 장난을 다시 하기 위해서였다.
푸딩 훔쳐먹기!
처음에는 번번이 푸딩을 빼앗겼던 황금 사신들이지만, 요즘은 황금 사신들이 나보다 훨씬 민첩하고 몸을 잘 쓰기 시작하면서 성공하기 힘들어진 장난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시간을 빠르게 가속할 수 있으니까!
세희 연구소 안뜰로 이동하자, 해맑은 표정으로 푸딩을 안고 있는 황금 사신이들이 보였다.
황금 사신이들은 저 맛있는 푸딩을 혼자 먹지 않고, 언제나 인간과 같이 먹으려고 해서 저런 식으로 같이 먹을 인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살금살금.
나는 기척을 숨기고 푸딩을 안고 있는 황금 사신의 뒤로 돌아갔다.
푸딩을 향해 손을 휘두르자, 황금 사신은 기민하게 몸을 튕기며 내 손을 피해냈다.
내 장난을 피하고자 단련된 황금 사신의 화려한 몸놀림이었다.
분명 내가 더 몸도 크고 속도도 빠를 텐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점점 늘어지기 시작했다.
체조선수처럼 푸딩을 안은 채 화려하게 공중으로 떠오른 황금 사신의 모습이 점점 느리게 보였다.
이윽고 완전히 멈춘 것처럼 보이는 황금 사신의 품 안에서 푸딩을 천천히 빼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히히.
나의 속도를 본 황금 사신의 표정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푸딩이 천천히 품 안에서 떠나가자, 먹이를 빼앗긴 아기 새 같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푸딩 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황금 사신들은 내 복제니까, 더듬이를 움직이는 것처럼 분명 시간 가속도 언젠가는 따라 하겠지.
하지만 그전까지는 이 장난을 마음껏 칠 생각에 즐거운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푸딩 그릇을 들고 이동하는 내 뒤를 따라서 황금 사신이 쫓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황금 사신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푸딩 그릇을 다시 낚아채 가 버렸다.
안 돼!!!
나는 시간 가속을 이용해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황금 사신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그 험준함으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로키산맥을 따라서 거대한 영체 장벽이 파수꾼처럼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령형 오브젝트를 막기 위해 최근 건설된 장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 가며, 인간이 출입할 수 없는 곳과의 경계를 표시해 주고 있었다.
그 방벽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초소는 높은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초소 안에는 6명의 군인이 수많은 영체 카메라를 확인하고 있었다.
영상에는 흐릿하지만 확실하게 장벽 너머로 유령형 오브젝트들이 잔뜩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두 명의 교대 인원이 도착하자, 근무를 마친 두 명의 군인은 안도감과 피곤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화 소리가 돌에 부딪혀 울려 퍼지는 높은 계단을 내려가며 잡담을 나누는 군인의 목소리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실려있었다.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머리를 바짝 밀어버린 군인이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지. 그 많던 ‘대뇌 포식자’는 요즘 거의 안 보이고, ‘불타는 돼지머리’만 잔뜩 보여.”
최근에서야 장벽 너머에서 발견된 오브젝트 ‘불타는 돼지머리’는 그 수를 불려 가더니, 지금은 영체 방벽 너머는 불타는 돼지머리만 잔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장벽이 길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그들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도대체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유령 오브젝트들이 가득한 곳으로 조사를 나갈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야.”
“오브젝트 협회에서 뭔가 해결책을 주지 않겠어?”
군인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머리를 밀어버린 군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과연 유령 오브젝트에게 뭔가를 할 수나 있을까?”
계단을 내려가는 군인들의 등 뒤로 거대한 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진동할 정도로 큰 소리였지만, 군인들은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이 그저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
사신이랑 함께 한 호텔에서의 신나는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고, 우리들은 어느새 ‘로키산맥 영체 방벽’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이 공항은 거대한 연구 단지 안에 자리 잡은 공항이라 그런지, 고립된 느낌과 함께 세련된 느낌도 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 복도에는 간간이 지나가는 연구원들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지대라서 그런지 공기는 청량하고 상쾌했는데, 사신이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사실 사신이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이는 건, 어제부터 계속 그랬다.
뭔가 삐진 것처럼 뚱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었는데, 황금 사신을 볼 때 심해지는 걸 보면 황금 사신이랑 뭔가 트러블이라도 생긴 걸까?
사신이의 표정을 살펴보는 도중, 비서가 우리들의 짐을 찾아 들고 다가왔다.
“그럼, 우선 준비된 숙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제임스가 붙여준 비서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자, 공항에는 묘하게 안심을 주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깨끗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제임스 시티와 닮았기 때문인 걸까?
그리고 공항 전체에서 사신이랑 살짝 비슷한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