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4
“거짓말.”
페이비는 악신의 사도가 하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 자가 하는 말을 믿을 이유가 없어요. 세치혀로 저를 현혹시켜 집어삼키려 드는 거에요. 악신을 모시는 자답게 더럽고 치졸한 수를 두는 거라고요.
페이비가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악신의 사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진득한 웃음을 유지할 뿐이었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체를 하는지 모르겠군.”
더 이상 이 사람의 이야기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어요. 지금 이 곳을 순찰하는 교사 분이랑 교회의 분들을 불러서 이 사람을.
“그렇군. 기억하지 못하는가?”
악신의 사도는 페이비의 앞으로 불쑥 다가와서는 손을 뻗었다.
그 속도는 페이비의 능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서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머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사도의 손이 페이비의 이마에 닿은 순간 그를 타고 마력이 흘려졌다.
“이젠 떠올릴 수 있겠지.”
페이비는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파도의 정체는 기억이었다.
저 멀고도 깊은 망각이라는 이름의 바닷속에 박혀 있었으나 방금 전 파도를 따라 다시금 페이비에게 돌아온 기억.
그 시작은 웃음을 짓고 있는 고아원장님의 얼굴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아이들은 수준이 높네요. 점점 더 몸에 품어지는 신성의 양이 늘고 있네요. 마음에 듭니다.’
그녀는 페이비의 기억처럼 자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전혀 달랐다.
고아원장은 페이비와 친구들을 물건을 품평하듯이 보며 이야기했다.
그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여러 사람들도 비슷했다. 어느 하나 아이들을 키우고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람은 존재치 않았다.
어라? 이상해요. 고아원장님께서는 분명 웃으며 우리가 함께해야 할 장소라 말씀을 하셨을 텐데?
페이비의 의문에도 기억의 파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다음은 지하실의 어느 방이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방을 밝히는 촛불의 너머에서 고아원장과 안경을 쓴 남자가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기억해요. 이 아이는 이번 기수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아이입니다. 조심해서 다루세요.’
‘걱정 마십시오. 제 실력을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조심해요. 이번에야말로 저희 쪽에서 윗분들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물건을 배출해야 합니다. 젠장. 지난번에 키플 그 년이 웃는 꼴을 봤을 때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아요?’
‘저도 제 출세가 달려있으니까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안경을 쓴 남자가 페이비에게 무언가를 주사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 아프다고. 이대론 죽을 것 같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페이비는 끝없이 소리 쳤지만 두 사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아원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페이비를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기도하세요. 그럼 신께서 그대를 구원해 주실 지어니. 아르마디께서 당신의 고통을 없애줄 때까지 기도하세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당시의 페이비에게는 그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를 하다가 기절했다.
이건 도대체? 이외에도 수많은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쳤다.
성경의 내용을 외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끌려가던 누군가.
대화 한 마디 없이 이루어지던 금욕적인 식사.
살얼음이 낀 것만 같던 고아원의 분위기.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사라지던 친구들.
“거짓말.”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싶나?”
“이런 게 진짜일 리가.”
“오. 그 대답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랬다. 악신의 사도가 하는 말은 옳았다. 페이비의 물음에 그 누구보다도 잘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페이비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여태까지 가장 소중했다 생각하는 장소에 대한 기억이 이상할 정도로 흐릿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에 반비례하듯 지금 머리를 휘젓는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다는 걸 깨닫고 있었으니까.
위화감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수많은 사실에 대한 위화감이 페이비가 진실을 인정하길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요.
저는 왜 예전에 제가 있었던 고아원에 다시 찾아가 본 적이 없는 거죠?
저는 왜 고아원에 있을 적에 함께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왜 고아원장님을 제외한 다른 고아원의 성직자분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왜.
왜.
왜?
끝없이 쏟아지는 기억의 파도를 마주하던 페이비는 결국 그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다 속을 게워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따라 흔들리는 백색의 머리카락은 안쓰러움을 자아냈지만 악신의 사도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만들어진 성녀여. 이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페이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목이 메어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가 없었으니까.
허나 악신의 사도는 그 침묵을 동의라 여긴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진실을 알려주마.”
악신의 사도는 고했다. 페이비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과 페이비가 여태까지 쓰이게 된 과정에 대해서.
페이비의 행적을 따라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당사자인 페이비 본인조차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도 상세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기억을 부정하던 페이비였지만 하나하나 떠오르는 기억을 구경하던 페이비는 이내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예전의 기억이.
여태까지 진실이라 믿었던 기억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위화감이.
악신의 사도가 이야기해주는 그녀의 쓰임새가.
그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그대의 의문에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
“그대가 왜 성녀임에도 신의 말씀을 듣지 못하냐고? 당연하지. 아르마디는 그대를 선택한 적이 없으니까. 그대를 본 적조차도 없으니까. 그대의 존재 자체가 아르마디를 모욕하고 있거늘 아르마디가 그대를 바라볼 리 없지 않은가.”
페이비가 고개를 들지 않으니 악신의 사도가 그 머리채를 붙잡아 강제로 끌어 올렸다.
본래도 하얀 피부를 지닌 페이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으니 그 모습은 관 속에 뉘여진 시체를 연상케 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 그대의 어린 시절을 빼앗아갔으며, 여지까지 그대를 사용하기 편한 물건으로만 생각한 이들에게? 그대가 그를 원한다면.”
“빛이여.”
아무런 예고도 없이 터져 나온 섬광에 악신의 사도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선다.
그에 따라 악신의 사도의 손길에서 풀려난 페이비는 다급히 도주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무언가 이상해요. 아카데미 거리 한 가운데에서 이런 소란이 벌어졌는데 아무런 개입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페이비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마주했다.
검은 색으로 물든 하늘.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요한 거리.
여긴 아카데미의 거리가 아니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죠? 저는 어느새 이런 곳에.
“당차군.”
기이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페이비의 뒤에 있던 악신의 사도가 내는 목소리가 그녀의 앞에서 들려왔으니까.
페이비는 자신을 가로막는 거대한 남성의 형체에 달리던 것을 멈췄다.
“복수보다도 우리의 신을 향한 적의가 더 크단 것인가?”
당혹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페이비는 악신의 사도가 내는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흐음?”
“전 복수할 생각이 없어요.”
자신이 여태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하며 페이비가 큰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여전히 페이비의 머릿속은 진실이었던 것과 거짓이었던 것이 마구잡이로 뒤얽혀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렇다 해서 그게 복수를 하고 싶다 마음먹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아르마디께서 그를 원치 않으실 테니까.”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하겠지.
허나 거기에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올바름은 올바름에 의해 쓰여야 올바름이 되는 법.
그릇된 방법으로 쓰여진 올바름은 결코 올바름이 될 수 없다.
페이비는 그렇게 배웠으며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네.”
결의에 찬 페이비의 눈동자를 보고서 저 말이 진실임을 확신한 악신의 사도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르마디의 목소리를 들은 적 없고 앞으로도 듣지 못할 만들어진 성녀면서?”
“그 부분인가요? 당신께는 감사드리겠습니다. 진실을 알려주셔서요.”
페이비가 고민했던 것은 자신이 성녀에 걸맞는 사람인가에 대해서였다.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며 신을 의심하려드는 자기가 정말 성녀라는 직합에 어울리는 사람이 맞을까?
그 물음에 악신의 사도는 답을 내려주었다.
페이비는 성녀가 아니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 성녀라는 직함을 얻은 그녀는 신의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신도 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충격을 받았을 이야기였지만 페이비에 한해서만은 달랐다.
수많은 흔들림의 끝에 스스로의 추함을 인정한 페이비에게 신의 성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는 자격의 박탈이 아니었다.
이는 그녀 자신에 대한 면죄부였다.
페이비는 성녀에 걸맞지 않은 인간인 게 당연했다. 그러니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아르마디께서 저를 봐주시지 않는 이유는 제가 부족하기 때문이란 거잖아요?”
그렇다면 해답은 단순했다.
이제부터라도 한 걸음씩 아르마디에게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아르마디의 사도인 루시가 그런 것처럼 아르마디께서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 대답을 들은 악신의 사도는 멍하니 페이비의 얼굴을 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제대로 미쳤군. 오랜 세월을 성녀랍시고 세뇌를 당하다 보니 스스로를 성녀라고 믿게 된 것인가?”
“그럴지도요.”
“신도로써는 최고의 대답이야.”
악신의 사도가 페이비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자 꽤나 벌어져 있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페이비의 앞에 선 그는 페이비를 내려다 보다 자신의 주변에 여러 개의 구체를 띄웠다.
“내가 바라는 것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대답이고.”
페이비는 저 말의 뒤에 숨어있는 단어가 무엇인지 눈치 챘다.
험한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대답을 바꾸도록 하라.
참으로 뻔하고 재미없는 협박이었다.
그러면 제가 당신이 바라는 답을 해줄 줄 알았나봐요?
페이비는 능글맞은 악신의 사도의 눈을 보고 짜증난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리곤 순간 자신이 왜 이랬나 생각을 하다 스스로가 성녀가 아님을 떠올리고는 고갤 가로 저었다.
그녀는 성녀가 아닐지언데 성녀답지 않은 행동을 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화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자신의 우위를 믿고 여유로운 이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하면 한 방을 먹일 수 있을까요?
아. 그러고 보면 저에게는 최고의 교본이 있었네요.
아르마디의 사도께서 알려준 방법이 말이에요.
“당신이 허접한 악신의 사도라 그런 게 아닐까요?”
아르마디의 사도인 루시가 했을 법한 대답을 생각하며 페이비가 입술을 움직이자 여유로워 보이던 악신의 사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빌어먹을 년이.”
“푸핫. 최고의 대답이었어. 허접 성녀!”
악신의 사도가 이를 꽉 깨문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꽂힐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가.
갑옷이 착지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페이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얄미운 웃음을 맞이하고는 똑같이 웃음을 지었다.
“안녕♡ 허세 멀대♡ 여전히 자기가 멋있는 줄 아는구나?♡ 언제쯤 사춘기에서 빠져나오려고 그러는 거야?♡ 한심해♡ 허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