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5
현장학습이 끝나고 찾아온 아카데미의 휴일. 이 때에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수련 그리고 대련.
머릿속으로는 하루 이틀 쯤은 쉬어도 되지 않나 생각이 들지만 정작 쉬려 그러면 몸이 근질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
몇 개월 동안 매일 같이 죽어라 구르다보니 구르는 것이 내 일상이 되어버린 듯 했다.
– 띠링.
여느 때와 같은 속도로 내달리던 나는 창이 떠오르는 소리를 듣고서 시선을 옮겼다.
[아카데미의 주신 교회로 향하라.]
[제한시간 내로 주신 교회로 향하시오.]
[제한시간 30:00]
[보상 : ???]
퀘스트의 내용을 본 나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발을 멈췄다.
이건 뭐지? 주신 교회로 가라고?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퀘스트를 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보상을 주겠다니까 일단 가기는 하겠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주신 교회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왜… 그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가쁜 숨을 내쉬는 프레이와 그 짧은 새에 바닥에 널부러진 조이의 모습이 보였다.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요.’
“허접하고 쓰잘데기 없어서 미뤄 놓은 일이 생각나서.”
주신 교회에 왔다가는 것 정도야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니까. 잠시 쉬고 있으라는 말을 전한 후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수련장에서 빠져 나왔다.
“하악. 여아야. 그대는 땀의 향취조차 매력적이구나.”
바깥으로 걸어 나오기 무섭게 어디선가 날 구경하던 얼빠여우가 내 앞에 나타나 역겨운 소리를 지껄였다.
하하. 그런 식으로 해서 자신을 향한 혐오스러움을 불러일으킬 생각인 거야?
나를 질리게 만들어서 자기를 만지기 싫게 하려고?
미안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실패야! 귀여운 아기여우의 얼굴로 변태 같은 표정을 지어도 귀여워 보일 뿐이거든.
얼빠여우가 말하길 저 모습이 된 이유가 내 힘이 모자라서 그랬다고 했지?
그럼 나중에 내가 강해지면 숲에서 봤던 그 모습에 가까워지는 건가.
아. 싫다. 평생 이 아기여우의 모습으로 남아있어 주면 안 되나?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게냐?”
‘교회요.’
“네가 알아서 뭐하게 허접얼빠여우?”
“따라가도 되느냐 물으려 했던 것이다만?”
뒷말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저 얼빠여우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겠다. 귀여움과 음흉함이 뒤섞인 저 얼굴을 보면 알 수밖에 없어.
방금 전에 땀냄새가 좋다 했으니 그걸 따라다니면서 맡을 생각이겠지.
변태 새끼. 진짜 취향이 나쁘다니까.
그런 주제에 내가 털을 만지려고 하면 부끄러워서 도망치는 이유가 뭘까?
진짜 변태라면 거기서도 즐겨야 하는 거 아냐?! 왜 그런 부분에서 허접한 건데!
“되느냐?”
‘마음대로 하세요.’
“하든가 말든가. 내 알바야?”
내 대답에 얼빠 여우가 기뻐하며 자그마한 발로 총총 걸어선 내 옆에 섰다.
물론 바로 옆은 아니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내가 자길 잡아채려 든다면 도망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아. 진짜 빌어먹을 허접여우 같으니라고.
<이렇게 보니 누가 변태인지 알 수가 없구나.>
‘…자그마한 동물을 귀여워하는 게 왜 변태죠?’
그건 인간으로써 가지고 있는 당연한 본능이잖아요? 할배. 음해가 심하시네요. 자기도 얼빠여우의 외견이 귀엽다는 건 인정하면서.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할아버지. 끝까지 해봐요.’
그 대답에 따라서 잠시 폐기해 두었던 아카데미 짬통 투어를 부활시켜야 할 수도 있다고요.
할배와 투닥거리며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온 나는 거리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다들 왜 저렇게 수군거리고 있는 거야? 아카데미의 교사들이랑 경비들은 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거고?
내가 아카데미 안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게임 시나리오 상으로는 이 시점에서 일어날 일이 없는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지나가던 교수 하나를 붙잡았다.
“알른 영애. 여긴 어찌.”
‘무슨 일 있어요?’
“허접 교수. 시끄럽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이야기 해.”
“그것이…”
그 설명이 끝나자마자 나는 교회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크라드가 페이비를 아카데미 거리에서 습격하고 도주했다니?!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나크라드는 어둠의 악신인 타리키의 사도. 다른 건 몰라도 숨는 능력 하나만큼은 따를 자가 없다.
아카데미 내부처럼 원천적으로 침입을 불허하는 곳이 아니라면 그를 막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아직 악신들이 진정으로 부활하려면 시간이 남은 지금도 말이다. 허나 그 이외의 능력은 다르다.
아무리 악신의 사도라 할지라도 모든 방면에서 특출 날 수는 없지.
특히나 자신의 역상성이나 마찬가지인 페이비를 손가락 하나 대는 것만으로 기절시키는 건 지금 이 시기에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데! 아아! 빌어먹을 놈의 변수! 좀 게임처럼 흘러가 주면 어디 덧나냐?!
교회 인근에 도착하자 그 주변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카데미 거리의 여러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교회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주신 교회에서 일을 하는 이 몇 명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악신의 사도가 성녀를 공격했다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으니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것이다.
쯧. 귀찮게 됐네.
‘비켜주세요.’
“허접들. 비켜. 살닿는 것도 기분 나쁘니까.”
루시가 지닌 악명은 이 곳에서도 유효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당연 학생들 사이의 소문에 대해 잘 알았고, 기피 대상 중 하나인 내 얼굴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알른 영애님?! 이란 소리를 외침과 동시에 길이 열렸지만 그렇다 한들 교회의 문을 열리지 않았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나를 만나 곤욕을 치렀던 교회의 사제들이 도주하는 대신 굳건히 문 앞을 지켰으니까.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님. 지금 교회는 관계자 이외에는.”
“좆밥 사제♡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야?♡ 자기 눈 앞에 있는 것도 못 보는 병신이라니♡ 너무 한심해서 웃길 지경이야♡”
내가 십자가 목걸이를 내밀어 보이자 사제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나는 주신 교회의 입장에서 외부인이라 칭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아그라의 저주를 두 번이나 해주함으로써 신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입증한 나를 어찌 외부인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말이야. 나는 페이비한테 기도를 받아서 공식적으로 주신교회의 신도가 됐거든? 그런 내가 외부인이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응?
“허나.”
“비켜줄래?♡ 방해되니까♡”
내 도발에 사제의 얼굴이 벌게졌지만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아. 그냥 좀 순순히 비켜 주라. 내가 너네 성녀님을 구해주겠다잖아.
너희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지 모르겠네 진짜.
내가 억지로 밀고 들어가려 하자 사제들이 나를 막으려 했다. 허나 그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들이 제 아무리 사제로써 훈련을 받았다 한들 사제일 뿐이었으니까.
나를 막으려던 이들은 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종잇장마냥 바닥에 널부러지고 말았다.
“여자애한테 힘으로 처발리는 허접♡ 좆밥♡ 거기서 찌그러져 있어♡ 안쓰러우니까♡”
“알른 영애?!”
교회의 안으로 들어가며 할배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몇 번 왔다갔다하긴 했지만 이 안의 지리는 모르거든? 당연히 페이비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상관없어. 할배에몽의 네비게이션은 언제나 정확하니까.
<신상 오른 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서…>
“거기 멈춰 서십시오!”
“못 가게 막아!”
“왜 이렇게 힘이 강한 거야?!”
강행돌파 끝에 한 방의 문을 연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페이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그녀의 모습은 시체를 연상시켰다. 느릿하게 부풀어올랐다 가라앉는 가슴께가 아니었더라면 착각을 하지 않았을까.
– 띠링.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곱씹은 순간 새로이 알림음이 들려 왔다.
[퀘스트 업데이트]
[페이비를 구하라!]
[악신의 사도에게 습격당해 정신을 잃은 페이비를 제한시간 내에 구하라!]
[제한시간 24:37]
[보상 : ???]
어째 내가 위험할 때보다 페이비가 위험할 때에 더 간절한 것 같다? 허접 변태 주신?
페도인 줄 알았는데 그냥 예쁘면 어느 쪽이든 좋았던 거야? 이 인간은 스트라이크 존이 얼마나 넓은 건지 원.
“알른 영애?! 여기는.”
“병신 주교?♡ 헛소리 지껄일거면 그냥 닥치고 있어♡”
주교는 가만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슴께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를 확인하곤 옆으로 비켜섰다.
흐응. 주교까지 올라간 사람 답게 주제파악이 빠르네.
주교의 암묵적인 허락 하에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침대 위에 누워 미간을 찌푸리고 잇는 페이비의 얼굴을 살폈다.
<신체에 커다란 이상은 없다. 다만 몸 안에 악신의 마력이 품어져 있구나.>
‘페이비한테요?’
<그래. 아마 그것이 이 여아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할배와 이야기를 나누며 대책을 고민하던 때에 얼빠여우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랐다.
야. 뭐하는 짓이야. 지금 나 엄청 급하거든?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이상한 짓 하지 말아줄래?
“그 악신의 사도라는 녀석이 이 아이를 자신의 정신세계로 끌고 갔구나.”
‘…네?’
“…뭐라고. 얼빠여우?”
“간단하게 이 아이의 정신만을 납치했단 소리다.”
자신의 시련부터가 정신과 관계된 정도로 그 부분에 있어서 특화된 얼빠여우는 능숙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상대방은 이전에 자신의 힘을 페이비의 안에 심어둠으로써 서서히 영향을 끼쳤고, 그 장악이 완벽해지자 페이비를 만나러 와 페이비의 정신을 가두었다고.
“상대의 수완이 좋구나.”
“얼빠 여우?♡ 개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할 말만 해줄래?♡”
“무얼. 해결책은 간단하다. 납치를 당했다면 그를 구출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내가 그대를 이 아이의 정신세계로 보내줄 테니 납치범을 퇴치하고 그녀를 구해오거라.”
‘제가요?’
“내가?”
“그럼 누가 가겠느냐. 지금 본녀는 겉모습만큼이나 허약해서 계약자인 그대말고는 보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칼이나 다른 사람을 보내서 날먹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거지?!
빌어먹을.
지금의 내가 나크라드를 이길 수 있을까?
그 때에 비해서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현격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추측하기로 내가 페이비의 정신세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지난번과 같은 결과를 내게 되겠지.
그 날의 기억을 상기시키자 마자 여러 풍경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몸에 난 구멍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이 흥건하게 물들고. 뼈는 부러졌다 끼워맞추기를 반복했으며. 고통에 익숙해졌다 생각할 무렵에는 언제나 새로운 고통이 그게 오만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그 때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하나다. 우연. 운이 좋았기에 나는 죽지 않고 이 자리에 또 서 있을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운이 안 좋았다면 나는 바닥에 스러져 흙바닥에 안겨야 했을 거란 소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페이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우연에 기대야 한다.
존재하는 지 하지 않는 지조차 의문스러운 우연에 말이다.
…
뭐어. 쉽네! 난 운이 좋으니까!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
공포를 짓누르며 마음속으로 소리친 후 고개를 들어서 얼빠여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또 다시 헤실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뭔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주인이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빛을 지니고 있는 한 그대는 결코 저 자에게 패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