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6
푸흐. 푸하하하. 아.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엄청 긴장하고 있었는데 페이비가 하는 말을 들으니까 그게 싹 날아가 버렸어.
당신이 허접한 악신의 사도라 그렇다니. 성녀님께서 할 말이 아니잖아. 페이비.
착지의 충격을 몸에서 지우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은 상반되어 있다.
구원자를 바라보듯 서서히 치켜 올라가는 페이비의 눈가와 점차 찌그러지고 있는 나크라드의 눈매.
괜히 여유를 부렸다가 페이비에게 어그로가 튀면 안 되니까 먼저 도발부터 걸어둘까.
“안녕♡ 허세 멀대♡ 여전히 자기가 멋있는 줄 아는 구나?♡ 언제쯤 사춘기에서 빠져나오려 그러는 거야?♡ 한심해♡ 허접해♡”
키득거리는 웃음을 들은 나크라드의 눈빛에 열이 깃든다. 그를 보자 있자니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속에 긴장이 새겨졌다.
메스가키 스킬이 내 동작을 강제하는 게 아니었다면 흔들리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어차피 저 녀석을 상대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말이야.
“육신을 지니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이 그 곳에 서 있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그가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음을 알렸으나 그 육신은 달랐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베네딕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건한 그 육신은 이 노인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인지를 알려주었으니.
티 하나 없는 백색의 갑옷을 걸친 노인은 자신의 왼 팔에 신성으로 이루어진 강건한 방패를 만들어 내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구나. 여아야.”
루엘. 내 메이스에 깃들어 있던 영혼이자 한 때 세상을 구했던 위대한 성기사.
메이스에 깃들어서 잔소리를 할 땐 몰랐는데 할배 진짜 괴물이었구나?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잖아.
얼빠 여우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는지 알겠네.
페이비의 정신세계에 들어오기 전 얼빠 여우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세계에선 현실의 육신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고. 중요한 것은 그 영혼이라고.
‘알겠느냐? 메이스 속에 들어있는 녀석은 그대와 혼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대가 정신세계에 들어간다면 저 놈도 자연스레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할배는 자신의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웃음을 짓다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떠냐. 이 할애비가. 믿음직스러우냐?”
‘물론이에요!’
“원하는 대답이 있나봐? 주책맞은 할배? 근데 어떡하지? 난 그 말 해주기 싫은데?”
“허. 겉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직접 들으니 좀 짜증이 나는 구나.”
뒷사정을 알면서도 투덜거리는 할배에게 메이스를 건네주자 그는 내 세 배는 될법한 거대한 손으로 메이스를 쥐었다.
그러자 메이스가 자연스레 크기를 키웠다. 할배는 내 머리와 비견될 정도의 크기를 지닌 메이스를 나무 막대 다루듯 가볍게 휘둘렀다.
“직접 싸우는 건 오랜만이라 잘 될지 모르겠군.”
‘할아버지?’
“뭐야. 허접 할배. 큰소리 떵떵 치더니 자신 없는 거야? 퇴물 할배구나?”
“…여아야. 미안하다만 잠시 입을 다물어 주겠느냐? 이러다가 그대를 공격할 것 같아서 말이다.”
전설적인 성기사라는 사람이 이 정도를 못 참아서 어쩌잔 거에요. 할배.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넘겨 보이라고요.
“너는.”
“아아. 미안하군. 육신을 얻은 것이 오랜만이라 너무 신이 났었어. 반갑네. 악신의 사도여. 이 늙은이의 이름은 루엘. 악신을 봉인했던 용사 파티의 일원일세. 악신을 모시는 그대의 입장에서는 증오해 마땅할 대상이겠군.”
할배가 앞으로 나서자 나크라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동자가 둘 곳을 모르고 흔들리고 있다.
당황을 한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하면 강한 편인 나크라드지만 그 기준을 대륙 전체로 둔다면 아직은 모자람이 많다.
악신의 완전히 부활한다면 모를까 지금은 부족할 수밖에. 당장 알른 가문의 기사 하나에 불과한 칼에게 휘둘리는 것만 보아도 그를 알 수 있다.
근데 우리 할배는 악신이 부활해서 나크라드가 완전한 힘을 얻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거든.
용사 파티의 성기사라는 이름이 괜히 달린 게 아니라고.
“거짓말.”
“거짓이라 생각하는가? 그래도 상관은 없네. 그런다고 본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허세로 날 위협하지 마라!”
나크라드가 자기 주변에 띄워져 있던 검은 색의 구체를 던졌다. 하나하나가 나를 행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닌 공격.
허나 할배는 그를 보고서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대신 느긋허니 팔을 움직여 메이스를 휘두를 뿐.
메이스를 휘두르는 할배의 움직임은 내게 경이로 다가왔다.
과거 무기를 손에 쥐어본 적이 없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매일 같이 메이스를 더 잘 휘두르는 방법을 연습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할배가 메이스를 휘두르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밖에 없었다.
잡는 법. 휘두를 때 힘의 배분. 마력을 움직이는 것. 그 끝에 터트리는 것.
그를 본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저게 완성형이라는 걸. 메이스를 가장 효율적이고 위력적으로 휘두르는 방법이 저거라는 걸.
“지금도 허세라 생각을 하는가?”
입을 꾹 다문 나크라드를 본 할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의미로는 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항상 말로만 조언을 해줘야 해서 답답했는데 직접 싸우는 법을 보여줄 수 있게 됐으니.”
보고 배우도록 하거라. 할배는 이야기를 끝마침과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
루엘은 잠에서 깨어난 그 날부터 언제나 루시의 곁에 있었다.
그녀가 수련을 할 적에도.
다른 기사들과 대련을 할 때에도.
책을 보다가 책상에 이마를 처박을 때에도.
주신의 축복 때문에 험한 말을 하게 되어 당황을 할 적에도.
잔소리가 심하다며 자신에게 투덜대는 순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기피당하며 속으로 상처를 입을 때에도.
당연하게도 그녀가 죽음의 위기에서 일어나는 그 때에도 항상. 언제나. 루엘은 그 곁에 있었다.
처음에 잠에서 깨어났던 루엘은 이 여아를 돕는 게 신의 뜻이라면 그리 하겠다 생각을 했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긴 시간 동안 루시와 함께하며 그녀라는 사람이 얼마나 올곧고 선한 사람인지를 알게 된 지금 루엘은 루시를 자신의 손녀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과거 그의 손녀를 죽이려 들었던 빌어먹을 남정네였다.
자비를 베풀 이유는 조금도. 그 어디에도 존재치 않았다.
“어딜 도망치려고.”
나크라드가 그림자에 숨으려 하자마자 루엘의 자신의 발로 그 그림자를 짓눌렀다.
과거 자신의 손으로 악신을 봉인했던 그다. 당연히 어둠의 악신을 상대하여 쓰러트린 경험도 존재한다. 그 상대법 또한 잘 알고 있고.
도망을 치려는 녀석을 붙잡은 그는 발로 나크라드를 걷어차 저 멀리로 날려버렸다.
“아직이다. 일어나도록.”
“빌…어먹을!”
어디서 벌써 쓰러지려 드는가.
루시는 그대에게 괴롭힘을 당할 적에 이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서도 일어났다. 그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놈의 발목을 붙잡았다.
남을 괴롭혔던 자는 응당 그 업보를 되돌려받을 것을 각오해야 할지니. 악신의 사도라는 네 놈의 각오는 겨우 그 정도뿐이었나?
“본인은 아직 루시에게 보여줄 것이 많다. 교보재여.”
“죽어라!”
나크라드가 소리를 침과 동시에 바닥에 퍼져있던 그림자에서 어둠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송곳이 튀어나오려 했다.
허나 그는 루엘이 발바닥에 신성을 담아 짓누르자 형성이 되기도 전에 분쇄되어 버렸다.
“신성은 단순히 신성마법을 쓰기 위한 재료가 아니다. 그 활용법에 따라 무궁무진한 결과를 이루어낼 수 있지.”
아직 성기사로서의 길 초입에 서 있는 루시 그대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언젠가는 그대도 이 길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대의 곁에는 본인이 있으니까. 그러니 한 번 눈에 담아두도록 하거라.
“죽으란 말이다!”
자신의 의도가 분쇄되었음에도 나크라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루엘에게 달려들어 박투를 시도했다.
어둠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법과 뛰어난 박투의 조합은 분명 위협적이었으나 루엘의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나크라드의 모든 공격을 방패로 받아내며 빈틈이 생겨날 때마다 메이스로 꾸준히 충격을 누적시켰다.
보라. 루시. 이것이 방패를 든 자의 싸움법이다. 이기적이고 치졸하게 움직여 상대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방패를 든 자가 해야 할 일.
본인이 언제나 말했던 악어처럼 싸우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방패라는 수면에 숨어 자신이 유리할 때에만 이빨을 내미는 루엘의 공격에 점차 깎여나가던 나크라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바닥을 굴렀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그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필살의 일격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살의를 담은 메이스 한 방 한 방이 살을 다지고 뼈를 부수었기에 누적된 피해가 가볍지 아니했던 것이다.
“아직이다.”
루엘을 그를 보고서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발을 움직였다.
아직이었다.
루시는 그대라는 재앙 앞에서 이보다 긴 시간을 버텼다. 그러니 그대도 이보다 더 많은 것을 견뎌야 하지 않겠나.
“다가오지마!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
이번에는 나크라드가 자신의 그림자 안에서 수많은 피조물을 불러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생명체들은 하나 같이 불길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바꾸어서 말을 하자면 신성의 앞에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소리였다.
루엘은 자신을 둘러싼 무리를 가만 둘러보다가 자신의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보거라. 여아야. 이는 그대가 언젠가 도달하게 될 경지이니라.”
그러자 루엘이 들고 있는 메이스의 위에 신성이 모여 들었다.
과거 세상이 어둠에 물들었을 적에 최전방에 서서 어둠을 몰아냈던 성기사가 지닌 신성은 하나의 태양과도 같았으니.
하늘을 물들이던 검은 것들이 뒤로 물러나고,
그의 주변을 둘러싸던 무리들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으며,
이 모든 광경을 만들어냈던 악신의 사도는 그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에 루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으며 바닥에 널부러진 나크라드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공포에 질린 나크라드는 바닥을 기며 최대한 멀리로 도망을 치려했지만 루엘의 발걸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크라드의 앞에 선 루엘은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복수하겠다! 이 치욕을 아르마디의 사도에게 되갚아 주리라!”
“해보거라. 그 때에 그대는 여아의 아래에 무릎을 꿇게 될 테니.”
메이스가 중력을 따라 아래로 내리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