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을 지나 모두가 잠든 새벽, 세희 연구소 안뜰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마시멜로로 만든 침대 위에 고이 눕혀진 피투성이 서양인 여성과 몇 마리의 황금 사신이 나타난 것이다.
황금 사신은 고열에 시달리며 신음 소리를 내는 여성을 내려다보더니, 자리를 지키기 위한 한 마리만을 남기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치료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해!’
사람이 다치면 나타나는 네모난 차를 부를 사람을 찾기 위해서 황금 사신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어떤 한 황금 사신은 자신을 부른 막내를 데리러 수면실로 향했다.
***
사신이가 사라지자, 정말 깜짝 놀랐다.
사신이가 나를 밀쳐낸 뒤 검은 구체에 먹혀 사라져 버리자,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머리를 한 대 강하게 맞은 것처럼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물음표만이 가득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런 생각만이 가득 떠올랐다.
내 시선의 끝, 사신이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마시멜로 위로 자그마한 발자국이 콩콩.
그 이상한 현상을 보고 나서야, 생각이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사신이의 발자국, 역시 사신이는 무적이었어.’
뚜방뚜방.
그리고 그 발자국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신이가 재생하기 시작했다.
작은 발목부터 시작해서 점점 위로, 마지막에는 머리 위의 더듬이까지!
사신이가 돌아왔어!
나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로 만들어진 길을 뛰어서 사신이에게 달려들었다.
마시멜로로 만들어진 길 끝에서 말랑한 사신이를 꾹 껴안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왠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사신이를 품에 꼭 안으면서 돌아온 사신이를 가득 느꼈다.
사신이는 귀찮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사신이를 보고 상황을 관망하던 거대한 돼지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크게 벌리며 불을 뿜어냈다.
공기마저도 태워버리는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밀어닥쳤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겁고, 맹렬하고, 거대한 불줄기였다.
사신이는 돼지의 공격을 보고 약간 짜증이 난 기색으로 뀩, 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커다란 검은 구체가 생겨나더니, 불길을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사신이는 불안해하지 말라는 듯이 내 손을 꾹 쥐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담담한 사신이의 표정을 보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점점 고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전투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사신이가 손을 허공에 뻗고 꾹 쥐기만 해도 검은 구슬이 튀어나와서 거대한 돼지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나는 사신이에게 방해가 될까봐, 최대한 숨을 죽이고 속으로 감탄했다.
저번처럼 돼지가 검은 구슬을 잡아먹고 되쏘는 걸 방지하려는 것인지, 사신이는 검은 구체를 아주 짧은 시간만 유지하고 있었다.
검은 구체가 허공에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할 때마다, 공간에서 무언가 으스러지는 불길한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저승의 포효.
하지만 괴물 같은 덩치의 돼지는 예상외의 움직임으로 검은 구체를 피하고 있었다.
거대한 돼지는 허공에서 공간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다른 장소로 순간 이동하며 구체를 피했다.
그 모습은 마치 차원의 관문 같았다.
물론 고개를 돌리고 손을 꾹 쥐는 것만으로 발생하는 검은 구체를 모두 관문으로 피할 수는 없었다.
전부 피하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재생력을 가진 돼지에게는 그 정도만 해도 완벽한 회피라고 할 만했다.
그렇다고 돼지가 무력하게 도망 다니고만 있지는 않았다.
불을 뿜거나, 갑작스럽게 돌진해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사신이는 놀란 내 마음을 가라앉히듯이 손을 꾹 잡아주었다.
사신이가 너무 상냥해.
전체적으로 사신이가 유리해 보였다.
아니,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그야, 사신이는 싸우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돼지의 공격은 사신의 손짓 한 번에 모두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강력한 힘을 휘두르며 집중하는 사신이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내 옆에 가만히 서서 팔을 휘두르는 사신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기회를 노리는 거대한 돼지.
누가 우위인지는 명확해 보였다.
하지만 사신이의 표정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보였다.
현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돼지가 너무 잘 피해서 그런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
어슴푸레한 새벽녘, 송파구의 구석에 위치한 세희 연구소.
여명의 첫 빛이 하늘을 어렴풋이 비추자, 한 명의 보안실 직원이 순찰을 시작했다.
그의 발소리가 어둡고 인적 없는 복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복도는 그림자에 잠겨있었고, 띄엄띄엄 배치된 초록색 비상등만이 어두운 벽에 희미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새벽의 어둠은 빛과 소리를 삼켜버리는 두꺼운 커튼처럼 연구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희미한 푸른 빛을 받아들이는 창문에는 이슬이 맺혔고, 그 작은 물방울들은 새벽빛을 반사하며 바깥 풍경을 흐릿하게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연구소 내부는 스며드는 추위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보안실 직원이 손전등을 들고 어떤 격리실 앞을 지나는 순간, 애잔한 피아노 선율이 작게 들려왔다.
어둡고 스산한 복도와 어울리는 장송곡의 선율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아름답지만 음울하게 울리고 있었다.
어두운 격리실에서, 느릿느릿하면서도 힘 있는 동작으로 피아노를 치는 푸른 도마뱀의 모습이 보였다.
도마뱀이 새벽만 되면 이런 노래를 치는 걸 알고 들어도 저절로 소름이 돋아날 정도의 연주였다.
새벽의 연구소 복도를 순찰하는 직원의 앞으로 통통 튀듯이 일렁거리는 황금색 빛무리가 보였다.
황금 사신 특유의 빛무리였다.
‘황금 사신이는 잠을 자고 있을 시간대일 텐데?’
보안실 직원은 그런 의문을 품으며 손전등으로 황금 사신이 있는 쪽을 밝혔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빛무리는 손전등 불빛을 발견했는지,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점점 가까워져 왔다.
황금 사신은 어울리지 않게 평소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작은 발을 놀려서 다가오더니, 직원의 바지 밑단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뭔가 다급해 보이는 황금 사신의 표정.
직원은 다급해 보이는 황금 사신을 발견했다는 무전을 남기고, 황금 사신을 자기 어깨 위에 태웠다.
그리고 어깨 위에 앉은 황금 사신의 손짓을 따라서 복도를 바쁘게 뛰어나갔다.
황금 사신의 인도에 따라서 도착한 안뜰에는 서너 마리의 황금 사신과 피투성이의 서양인 여자가 쓰러져있었다.
여자는 핏물이 배어 나온 흔적에 비해서는 굉장히 안정된 상태였지만, 고열에 시달리는 등 치료가 시급해 보였다.
보안실 직원은 다친 것으로 보이는 여자를 보안실에 보고한 뒤, 구급차를 불렀다.
전화를 마치고 황금 사신을 돌아보자, 황금 사신은 여자의 앞에 서서 손짓으로 뭔가를 묘사하고 있었지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네모난 건 구급차를 말하는 거 같은데…. 이 여자를 치료해달라는 건가?”
직원이 황금 사신을 내려다보며 묻자, 황금 사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저히 모르겠군. 구급차는 이미 불렀으니 괜찮겠지.”
보안실 직원은 황금 사신과 대화를 포기하고, 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흙투성이의 새싹 사신이 한 황금 사신 등 뒤에 업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직원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새싹 사신이 황금 사신에 의해서 외부로 옮겨지고 있다는 무전을 시급히 넣었다.
황금 사신들은 귀여운 동생을 보는 것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새싹 사신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고, 몸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주고….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새싹 사신이었다.
[지금 콜로라도에 위치한, 영체 방벽이 불에 타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안뜰에 마련된 회색 사신의 뉴스 시청용 미니 TV.
그 안에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체 장벽이 타오르고, 하늘에서 불의 비가 내리고 있는 미국의 모습이었다.
멀리서 구급차의 소리가 들리자, 황금 사신들은 영상을 잠시 쳐다보다가 뒤를 돌아서 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허공으로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안뜰에는 점점 소리를 키워가는 구급차 소리와 정신을 잃은 여자, 그리고 보안실 직원만이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
뀩.
주먹을 세게 쥐자, 공간이 수축하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렸다.
하지만 거대한 돼지는 미꾸라지처럼 그 범위에서 빠져나가, 주변을 배회하며 나와 예린이를 노리고 있었다.
송파구에서 만난 아귀랑은 다른 방향으로 짜증 나는 오브젝트였다.
아귀의 조건은 힌트 없는 수수께끼 같아서 힘들었다면, 이 녀석은 조건은 명확한데 잡을 수가 없어서 짜증 나는 오브젝트였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괜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예린이가 보였다.
심하게 다친 데다가 제대로 잠도 못 잤으니까 피곤하겠지.
예린이의 장작 회복량이 대단해서 꽤 오래 싸울 수 있겠지만, 영원히 싸울 수는 없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적어도 피곤해 보이는 예린이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동안에 저 돼지를 잡아내야 했다.
아귀때처럼 싱크홀로 던져넣을까?
공간을 찢고 순간 이동하는 녀석인 데다가 아귀처럼 얌전히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검은 구체를 만들어 버릴까?
장작이 모자라, 적어도 예린이랑 하루 종일 놀아야 그 정도 검은 구체를 만들 수 있을 거야.
황금 사신을 잔뜩 불러서 발을 묶고, 검은 구체로 황금 사신이랑 같이 갈아버리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려는 순간, 예린이가 나에게 뭔가를 들이밀었다.
“사신아, 이거 봐봐. 처음 보는 미니 사신이야!”
예린이의 손바닥 위에는 황금 사신이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미니 사신을 내밀고 있었다.
겨드랑이로 들려서 대롱대롱 매달린, 머리 위에 잎사귀 두 개가 돋아난 남색 사신이었다.
“!”
마치 기억에도 없는 아이를 친자식이라고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도대체 언제 생긴 거지?
뚫어져라 쳐다보니, 눈을 비비며 새싹 사신이 눈을 떴다.
깊은 남색의 눈동자는 졸린 것처럼 깜박이더니, 내 얼굴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황금 사신이 내미는 새싹 사신을 손바닥으로 받자,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손바닥 위에 널브러졌다.
하아암.
그리고 졸린 것처럼 하품하더니, 의지를 전달해 왔다.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뭘 못하는지.
이번에 태어난 새싹 사신은 꽤 머리가 좋아 보였다.
새싹 사신의 능력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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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해.
짝짝, 박수를 치고 싶어지는 능력이었다.
남색 달을 죽였던, 나보다 더욱 괜찮아 보이는 능력이었다.
확실히 이 능력이라면 저 민첩한 돼지를 죽일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