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돼지가 로키산맥을 제 집처럼 뛰어다니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 위에 새싹 사신과 푸른 사신을 올려두고 의지를 전달했다.
‘자, 기회는 한 번뿐이야. 준비해!’
이번 작전에서 빠지게 된 황금 사신은 사료 그릇을 뺏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예린이의 손바닥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예린이는 그 모습이 불쌍했는지, 황금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계속 달래주고 있었다.
나는 남은 장작을 그러모아서 커다란 블랙홀을 만들 준비를 했다.
예비 장작은 없었다.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예린이랑 같이 미니 사신 정원으로 도망갈 장작만 남긴 마지막 공격!
남은 장작을 블랙홀로 만들기 위해 양손에 밀어 넣자, 양손이 점점 까맣게 물들면서 주변으로 아지랑이를 피워냈다.
그리고 내 어깨 위에 앉은 새싹 사신과 푸른 사신은 긴장한 표정으로 준비했다.
뭔가 큰 것을 준비하는 것을 깨달았는지, 거대한 돼지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시야를 차단해 주세요!>
<짙은 안개로 뒤덮어 주세요!>
<방향 감각을 모호하게 만들어 주세요!>
감각을 흩어버리고, 시야를 뒤덮는 안개가 깔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앞으로 손을 쭉 뻗었다.
그리고 거대한 돼지도 안개에 맞춰서 온몸에 불길을 두르고 빠른 속도로 돌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양손을 움켜쥐었다.
뀩.
***
돼지들의 왕, 산맥의 주인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생각을 거듭했다.
적을 모두 죽여야 했다.
그게 ■■과의 약속이었으니까.
나의 산맥, 나의 백성, 나의 ■■을 위해서.
돼지의 눈에 다시 한번 공간이 우그러드는 것의 전조가 보였다.
다시 한번 공간이 수축하며, 뼈와 살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간신히 몸을 빼냈지만, 이 정도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
뼈와 살이 다시 재조립되는 고통의 속에서, 적의 모습이 보였다.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흐릿한 눈동자에는 적의 존재감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은 착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적은 강했지만, 나를 이길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적의 강력함은 무한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적은 힘을 전부 소모해 버리거나, 무리하게 되겠지.
돼지의 왕은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분명히 적은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그리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오기 위해서 무리하게 될 것이니까.
<시야를 차단해 주세요!>
<짙은 안개로 뒤덮어 주세요!>
<방향 감각을 모호하게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시야를 가리고, 감각을 흐릿하게 만드는 안개가 주변에 자욱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안개가 퍼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적의 존재감이 엄청난 속도로 깎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 정도면 후속 공격이 불가능할 정도의 소모로 보였다.
돼지의 왕이 기다리던 기회였다.
그리고 적의 존재감이 깎여나갈수록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압력.
공간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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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보지 못한 규모의 공격이 온다!
돼지의 왕은 정면 승부를 펼치는 것처럼, 온몸에 불길을 두르고 돌진했다.
돼지의 왕의 혼신의 연기였다.
적의 공격이 완성되기 전에 뛰어들기 위해 서두르는 것처럼 최대한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언제든지 피할 수 있도록, 돼지의 왕은 준비하고 있었다.
안개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투명하지만, 어긋난 경계가 생겨났다.
안개 일부가 물리적으로 맞물리지 않기 시작했다.
경계에서 흐르는 안개는 단층처럼 끊어졌고, 옆으로 흐르던 흐름이 경계면을 기준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한없이 투명한 유리구슬이 주변을 가득 메웠고, 밖의 풍경은 어안렌즈로 바라본 것처럼 왜곡되었다.
투명하지만 불투명한 공간의 경계가 돼지의 왕을 가뒀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돼지의 왕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영역이 빛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공간으로 뒤덮인 것이다.
공간 자체에서 낮으면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공간이 우그러들면서 들리는 음울한 교향곡이자, 돼지의 왕이 기다리는 신호였다.
피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순간이자, 적이 공격을 더 이상 회수하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검은 구체가 생기는 것과 동시에 돼지는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 위치는 적의 바로 뒤.
완벽한 회피 뒤에 이어진 공격이었다.
돼지는 크게 입을 벌리고 물어뜯기 위해 입을 다물려고 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해 버렸다.
어느새 주변을 메웠던 안개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하늘을 대신해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황금색과 남색이 뒤섞인 기묘한 나무.
현재 돼지의 왕의 기억 속에는 없었지만, 기시감이 드는 나무.
움직일 수 없어!
어째서?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정지한 세계 속에서 단 한 존재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회색의 피부를 가진, 노랗게 타오르는 적.
적이 천천히 공중을 날아서 다가와 돼지의 어금니를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리자, 돼지의 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움직임이었다.
남색의 잔상을 남기며 천천히, 천천히 되감겼다.
안 돼!
앞으로 향했던 걸음을 천천히 되감기 시작했다.
이미 사라졌던 차원 관문이 시간을 되감듯이 다시 생겨났고, 돼지의 왕이 착지하며 부스러졌던 대지의 파편들이 다시 제자리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위치와 관련된 시간만이 뒤로 되감기는 것처럼 보였다.
온 힘을 다해서 저항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은 구체 속에 푹 잠기는 순간.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최대한의 힘으로 공간을 갈아버리던 중의 검은 구체는 그의 육체도 순식간에 갈아버렸다.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가는 마지막 순간 속에서, 돼지의 왕은 오래된 기억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잊어버렸던, 흐릿한 기억이었다.
탄생의 기억.
돼지의 왕을 내려다보는 하얀 수호자와 그 뒤에 서서 자신을 무표정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거대한 존재.
그 기억과 함께 돼지의 왕은 눈을 감았다.
***
이겼다!
드디어 끝났어.
민첩한 거대한 돼지는 죽어버렸다.
주변 공간을 일그러트리던 땅 소용돌이가 사라지면서, 돼지가 뛰어놀았던 거대한 공터는 순식간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새싹 사신은 힘들었는지, 어느새 잠든 채로 황금 사신들에게 안겨있었다.
그리고 황금 사신들은 해맑게 웃으면서, 새싹이를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막내의 활약을 축하하는 헹가래였다.
잠든 새싹 사신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보면,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디어 끝났어!”
예린이는 돼지가 사라진 것을 보고, 밝은 얼굴로 소리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사신아! 이겼, 어?”
그리고 예린이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와서, 내 손을 붙잡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푸스스.
예린이가 내 양손을 붙잡자마자, 양손이 가루가 돼서 부스러져 버리자 놀란 것이었다.
남색 새싹 사신의 능력인 ‘대상의 위치를 뒤로 되감는 능력’이 생각보다 장작 소모가 커서 벌어진 일이었다.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예린이가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니까,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히히.
장작의 빛을 최대한 억제하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좀 아프지만, 양발로 흐르는 장작을 끊어서 재로 바꾸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사신아!”
마치 죽어가는 것 같은 내 상태에 예린이는 내 어깨를 마구 흔들면서 오열했다.
그리고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쓰러져 버렸다.
이제 슬슬 장난이라는 것을 밝혀줘야지 생각하면서 눈을 뜨자, 예린이는 미동도 없었다.
‘어?’
예린이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미니 사신들이 나를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왜!
예린이를 바르게 눕히고 흔들어 봤지만,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린아, 빨리 일어나봐.
장난이었어!
심각한 일은 아니겠지?
***
세희 연구소의 이른 아침, 정체불명의 여성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 서아는 급히 출근했다.
밝혀진 여성의 신상은 제임스의 개인 비서.
제임스의 개인 비서가 갑자기 세희 연구소로 실려 오다니?
분명히 회색 사신이나 오예린과 관련이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관련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잘 나오고 있던 영체 방벽이 불타고 있다는 속보도 끊겨버렸다.
제임스와 연락도 되지 않아서, 이메일로 옮겨진 비서의 상세를 보냈다.
한국 오브젝트 협회에서는 가끔 이런 식으로 정보 통제를 시도하던데, 왜 그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살짝 걱정되었지만, 회색 사신이가 옆에 있으니 괜찮겠지.
진짜 문제가 있으면 회색 사신이가 예린이를 데리고 돌아올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정리한 서아는 이른 아침의 산책을 하던 도중, 굉장히 수상한 것을 발견해 버렸다.
살짝 열린 세희의 집무실 문틈으로 수상한 지하 계단을 발견한 것이다.
서아는 그때, 세희 연구소에 돌아다니던 터무니없는 소문 한가지가 떠올랐다.
돈을 많이 벌어도 연구소 재정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지하에 거대한 황금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
서아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무시하는 편이었지만, 저 통로를 보고 나니 약간은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지도에도 실려있지 않은 비밀 지하 계단을 휴대전화의 불빛만을 의지해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세희 연구소장은 언제나 투명하고 정직하게 예산을 관리해서 관심을 끊고 있었는데, 이런 시설을 만들고 있었을 줄이야.
계단을 한칸 한칸 내려갈 때마다, 주기적으로 예산을 체크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후회가 늘어만 갔다.
기나긴 지하 계단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지하공간은 넓고, 쾌적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황금상.
황금상은 조명의 빛을 찬란하게 반사하는 이 공간의 주인공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회색 사신 황금상.
무표정한 얼굴은 이 황금상이 황금 사신이가 아니라 회색 사신이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게 다 얼마야?”
서아의 입에서는 감탄밖에 안 나왔다.
척 보기에도 엄청난 돈을 쓴 황금상과 지하공간이었다.
공조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쾌적한 공기를 느끼며 지하공간을 돌아다니던 중, 서아의 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봤구나. 서아야.”
서아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지하 통로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서 서아를 바라보고 있는 세희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