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0
의기양양한 할배의 웃음을 보고 있자니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할배가 왜 여기에 있어?
연습 모드는 나 혼자서 스킬을 테스트해보는 장소잖아. 나 말고 다른 캐릭터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내가 너무 지쳐서 환각을 보는 걸까 싶어 뺨을 꼬집어보았더니 말캉한 뺨이 늘어나다 그 끝에 고통이 찾아왔다.
아야. 왜 꿈이 아닌 걸까. 차라리 꿈이었다면 개꿈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아무래도 그대와 본인의 혼이 연결되어 있다 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 듯 싶구나.”
‘할아버지랑 저와의 영혼이요?’
“노친내 냄새나는 할배랑 나랑? 으. 기분 나빠. 역겨워.”
메스가키 스킬로 번역된 말이 기분 나빴는지 할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내게 다가와서는 주먹을 들어 내 머리에 꿀밤을 날렸다.
분명 할배가 주먹을 드는 것이 보였고 그를 휘두르는 것도 보였는데 난 그걸 피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할배의 주먹이 내 머리에 닿아 있었고 나는 정수리 뼈에 금이 갈 것만 같은 고통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
뭐지?! 이해가 안 돼. 왜 아무 반항도 할 수 없었던 거야?! 심지어 철벽 스킬조차 할배의 주먹에 반응하지 못했어.
이게 무슨.
“여아야. 말을 곱게 하거라.”
‘그게 제 맘대로 되는 일이냐고요!’
“시끄러워! 내가 왜 틀니 낄 것 같은 할배 말을 들어야 하는데! 진짜 극혐! 완전 꼰대!”
내가 무어라무어라 그러자 할배가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방금 전의 고통이 몸에 새겨진 탓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이이이!
나 억울해!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제일 힘든 게 나라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나한테 왜 저러는 거야!
내가 평소에 뭘 못해줬는데!
물론 할배가 하는 잔소리를 대부분 흘려듣기도 하고!
가끔 화가 나면 화장실이나 짬통 투어를 시키기도 하고!
어차피 말밖에 못하지 않냐면서 약 올린 적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 할배한테 나름 잘…
음. 이렇게 보니까 업보인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난 억울해! 억울하다고!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할배는 주먹을 휘두르는 체만 하고는 겁먹은 내 모습에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죽을 위기에서도 눈을 치떤 녀석이 왜 이리 겁이 많은 게야.”
…그러니까 지금 할배가 나 놀린 거지?
할배애애애애! 자기 손녀 뻘 되는 법한 어린애 괴롭히는 게 그렇게 좋은 거야?!
허접 주신의 성기사라서 취향도 닮은 모양이지? 응?!
두고 봐! 연습 모드에서는 당신이 육신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당신은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메이스일 뿐이라고!
“하하. 미안하구나. 용서해다오. 네가 한 여러 일들을 그 정도로 퉁 칠 수 있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잖으냐.”
그건 그렇지만.
으음.
하아. 알겠어요. 할배. 당신이 저한테 해준 것도 있고 제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할게요.
당장에 물어봐야 할 더 중요한 질문이 있기도 하고.
할배와 내 영혼이 연결되어 있어서 정신세계도 같이 공유된다는 건 알겠어. 근데 그럼 현실의 내 몸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 거지?
이 곳이 내 정신세계라면 게임에서 그랬듯 현실이 정지된 상태는 아닐 거 아냐.
‘할아버지…’
“할배. 현실의 내 몸이 어떻게 돼있는지 알아?”
“잠들어 있다.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기절하듯이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그래서 숙소에 들어가 있을 때만 연습 모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메시지가 뜬 거구나. 바깥에서 연습모드에 들어갔다가는 길바닥에 널부러질 테니까.
허접 주신치고는 무척 세심한 배려네.
그럼 연습모드에 들어와서 확인할 건 다 확인해 본 셈인가?
대충 보기에도 게임이랑 별 다를 거 없어 보이니까 다시는 들를 일이 없을 것 같다.
창을 띄워 연습모드에서 나가기를 선택한 나였지만.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문구가 떠오를 뿐 나는 연습모드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뭔데! 이 곳의 주인인 내가 나가고 싶다는 데 왜 바깥으로 내보내주지 않는 건데! 왜!
나 지금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메이스에서 탈출한 악귀가 날 잡아간단 말야!
“여아야. 어디를 급히 가려 그러느냐.”
나가기 버튼을 연타하던 나는 뒤편에서 들려온 할배의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저어. 그게…’
“할배. 허접 검사랑 얼빵 영애가 기다리고 있을 거 아냐. 노망이 나서 그런 기초적인 것도 생각 못 하는 거야?”
“괜찮다. 어차피 떠나올 적에 오래 안 돌아온다 싶으면 그냥 돌아가라 그러지 않았느냐. 저들이 알아서 해결을 할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제가 필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봐요. 프레이랑 대련을 한다거나 조이에게 마법수련의 조언을 해준다거나 그리고 그리고 또.
“되었다. 그런 것은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 그대의 앞에 있으니 말이다.”
뭐가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그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끝에는 내가 개처럼 구른다는 결과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아서 그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신성박투술의 창시자로써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전수하도록 하겠다.”
인자한 웃음을 짓는 할배의 눈에는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열망이 새겨져 있었다.
포셀이랑 비슷하게 굴릴 것 같다는 이야기는 취소할게.
걔가 나를 미친 듯이 굴리기는 했지만 꼴에 가문의 아가씨랍시고 마지막 선을 지키기는 했어. 최소한 숨을 돌릴 시간 정도는 줬다고.
그렇지만 할배는 다르다.
그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그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기술을 내게 전수할 수 있을지 뿐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곳은 정신세계이지 않으냐. 육체적인 피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쵸. 아무리 구르더라도 현실의 몸은 쉬고 있으니까 아무리 거센 수련을 거듭하더라도 육신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그런데 제 정신은요? 정신적 피로는 신경쓰지 않으시는 건가요?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있으니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거 꽤 중요한 문제라고요!
“…우선 신성박투술이라는 게 뭔지부터 설명을 해야겠구나.”
이 사람 자기 불리한 부분은 은근슬쩍 넘겨 버렸어!
“이는 과거 본인이 창시한 신성을 활용한 투술이다. 신성마법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신성이 직접적으로 현실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게지.
예전부터 성기사단에서 알음알음 전수되던 것이나 이를 체계화하여 하나의 투술로 정립한 것은 본인이 최초이니라.”
할배는 그리 이야기를 하고서 주먹에 신성을 모았다.
그는 햇살처럼 따스하던 것과는 다른, 그림자를 불태워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처럼 열성적인 신성이었다.
“교회의 인간들이 들으면 불경하다며 학을 뗄 소리다만 결국 신성도 마력이나 기운같은 일종의 에너지다. 그로써 펼칠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는 하나 근간은 비슷하다는 소리지.”
그리고는 신성을 담은 주먹을 뒤편으로 쭉 당기더니.
“그러니 이를 활용한다면 기사가 검기를 덧씌우듯 우리도 공격에 신성을 덧씌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허수아비를 향해 내질렀다.
그 동작은 정석적인 정권에 가까웠지만 그것이 불러낸 결과는 달랐다.
할배의 권은 훈련장을 반파시켰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허수아비는 형체를 잃어버렸고, 바닥에 깔려 있던 벽돌들이 박살이 나 흙바닥이 드러났으며 벽에는 구멍이 뚫려 횡한 하얀 색의 풍경을 드러냈다.
…저 허수아비가 박살날 수 있는 거였어?!
아니 그 전에 이 훈련장이 이렇게 부서지는 게 가능한 일이었다고?!
내 상식에서 벗어난 풍경에 경악을 하고 있자니 할배가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전 자신이 벌인 위업이 별 거 아니란 것처럼.
“방금 전의 일격은 마력과 신성을 동시에 사용해 위력을 늘린 것이다. 본인이 만들어낸 신성박투술의 요점이자 지금부터 본인이 그대에게 가르칠 것이기도 하지.”
하하. 할배. 제가 게임 속에서 봤던 신성박투술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절기가 아니었는데요.
그건 그냥 데미지를 몇 퍼센트 정도 늘려주는 패시브 스킬에 불과했다고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택도 없는 것을 가르치진 않을 테니. 한 때 성기사들의 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보았던 본인이다. 이 수행의 끝에 그대는 분명 강해질 수 있으리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할배는 나를 굴리겠지.
할배의 눈에 담긴 열정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이야기를 할 때마다 더 뜨거워지는 것을 보면 분명해.
어차피 저항해봐야 의미가 없다면.
하. 어쩌겠어. 굴러야지.
강해져서 나쁠 건 없잖아?
허접 주신이 내게 바라는 역할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왠지 모르게 추측은 할 수는 있어.
그 녀석은 아마 게임 속 주인공이 걸었던 행적을 내가 걷기를 바라는 거겠지. 어쩌면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되길 원하는 걸 수도 있고.
그 바람을 따라 스토리의 끝을 보기에 아직 나는 부족해. 지금보다 한참은 더 강해져야하지.
지금의 나도 게임 속에서 키우던 여러 캐릭터들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고인물이라는 인종을 단순히 빠른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
우리같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건 언제나 최고의 효율이라고.
‘좋아요. 최선을 다할게요.’
“여자애한테 집착하는 할배라니 완전 꼴불견이네. 푸훗. 그렇지만 뭐. 좋아. 해줄게.”
“그렇게 나와야지.”
할배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베네딕의 손과는 달랐다. 베네딕의 쓰다듬에 애정과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면 할배의 손길에는 믿음과 거침이 담겨 있었으니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장이 제 모습으로 복원됐다.
이거 망가져도 다시 돌아오는 거구나. 하긴 정신세계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상하진 않지만.
“처음에 할 것은 신성을 다루는 연습이다. 이전에 신성마법을 쓰는 법을 배우며 어느 정도 숙련되었을 터이나 박투술은 신성마법을 쓰는 것과 다른 부분이 많거든.”
할배는 그리 이야기를 하고서 다시 주먹에다 신성을 쥐었다.
이번의 것은 따라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듯 집약된 신성은 아니었다. 그렇다 한들 경외롭다는 점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우선은 이 정도 위력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자꾸나.”
할배는 그리 이야기를 하며 허수아비를 향해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허수아비의 목이 꺾여 바닥을 뒹굴었다.
으음. 저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권술을 따로 연습한 건 아니지만 결국 저거 주먹에 신성을 담아서 내지를 뿐이잖아.
내 신체 능력을 생각해본다면 저 정도쯤이야 뭐 별 거 아니지.
“해보겠느냐?”
할배가 비켜선 자리에 선 나는 방금 전 할배가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며 주먹에 신성을 담았다.
좋아. 스킬의 보조 덕분에 신성을 움직이는 게 한결 수월해. 이제 이걸 주먹 위에 덧씌운 다음에 허수아비를 향해 전력으로 내지르면 허수아비의 머리쯤은!
“아야!”
박살나는 건 제 손 뼈였고요.
진심을 다해 박살낼 생각으로 내지른 충격은 그대로 돌아와 내게 물리학 법칙 중 하나를 강의해 주었다.
뭐야! 허수아비 저거 왜 저렇게 단단한 거야?!
이 정도면 어지간한 바위도 분쇄할 위력이었다고! 진짜로!
주먹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발을 구르고 있으려니 뒤에 있던 할배가 웃음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자아. 엄살 피우지 말고.”
엄살이라뇨! 저 지금 진짜로 아프다고요! 뼈가 박살난 것 같단 말이에요!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제 고통을 엄살로 치부하다니! 할배! 당신 진짜!…
“다시.”
항의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나는 할배의 근엄한 눈을 보고서 다시 허수아비 쪽으로 고갤 돌렸다.
…연습모드 같은 거 시험해보지 말 걸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