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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4

불이 꺼지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도는 전용기 내부의 침실.

조명이 꺼져 있어 타원형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사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을 반사하는 벽에는 짙은 색의 마호가니 패널이 늘어서 있었고, 그 밑으로는 두껍고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있었다.

카펫을 밟으면 폭신해서 뭔가 즐거운 기분이 드는 침실이었다.

천천히 점멸하는 휴대전화의 작은 불빛이 탁자 위에서 빛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내가 먹어 치운 수많은 푸딩그릇의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사신아….”

입맛을 다시는 소리와 함께 예린이의 입에서 잠꼬대가 흘러나왔다.

예린이는 맛있는 걸 먹는 것처럼 내 더듬이를 냠냠거렸다.

예린이는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길래, 은은한 달빛 아래서 눈을 감은 채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걸까?

행복한 예린이와 달리 나는 불편한 옷이 입혀진 채, 예린이의 품에 안겨 푹신푹신하고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유령화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예린이는 아기가 장난감을 찾는 것처럼 내가 있던 자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적당히 커다란 아귀를 소환해서 예린이의 품에 안겨주고, 타원형의 창문가로 다가가서 구름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전용기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여러 개의 달빛과 수많은 별빛.

왠지 황량한 설원처럼 보이는 하늘 위에서 떠다니는 비행기는 왠지 쓸쓸해 보였다.

손을 뻗어서 차가운 창문 위에 손을 대자, 조그마한 회색 손과 푸른색 옷소매가 보였다.

이제 슬슬 벗어도 괜찮겠지.

나는 유령화로 순식간에 유치원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하얀 아귀 하나를 소환해서 유치원복을 억지로 입히고 소파 위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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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우.

옷 때문에 이리저리 찌그러진 아귀는 불편한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억울한 표정의 아귀가 옷을 입은 것 같아서 조금 웃겼다.

히히.

이제 슬슬 미니 사신 정원으로 놀러 가려고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예린이 옆에 둘 생각으로 황금 사신을 손바닥 위에 소환하자, 황금 사신은 나를 보고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바쁘게 움직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손바닥 위에서 폴짝폴짝 뛰고, 이리저리 손짓을 해가면서 열심히 설명했다.

물론 황금 사신의 보디랭귀지는 이해하기 힘드니까, 의지를 읽어내는 데 집중했다.

동생?

새로운 막내가 나타났다는 건가?

동생이 생겨서 굉장히 기뻐 보이는 황금 사신을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또 생겼네.

요즘 너무 자주 아이가 생기는 것 같아.

뭐, 미니 사신들은 나랑 다르게 착한 아이들이라서 늘어나도 괜찮긴 했다.

만약 내 복제 같은 황금 사신들이 ‘미니 회색 사신’ 같은 거였으면 진짜 난장판이 됐을 텐데….

왠지 작아진 내가 사방을 뛰어다니며 난장판을 만드는 상황이 떠올라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관리는 귀찮으니까, 황금 사신을 쓰다듬으면서 의지를 전달했다.

‘제일 맏이인 ‘황금 사신’이 동생들을 잘 챙겨줘야 해?’

황금 사신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뭐 때문에 생긴 거지?

달이랑 관련된 뭔가를 해결해야 늘어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처리한 건 거대한 돼지의 왕이었는데, 그러면 돼지머리의 미니 사신이 생기는 건가?

별로 귀엽지 않은 미니 사신을 상상하며 의지를 전달했다.

‘그럼, 예린이를 잘 지키고 있어. 정원에 다녀올게.’

황금 사신이를 잔뜩 소환해서 예린이 주변을 꾸며준 뒤, 나는 미니 사신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

아주 오래된 꿈을 꾸고 있었다.

탄생했던 순간의 이야기.

광활하고 황량한 산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울퉁불퉁한 기암괴석과 매서운 바람만이 존재한 삭막한 풍경.

멀리 보이는 산줄기는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산봉우리는 끝없는 얼음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마치 영혼조차 얼려버릴 듯한 냉기가 그 어떤 생명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이 가혹한 공간 속에서 한줄기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얼음과 돌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세계에서 붉은색과 온기를 불어넣는 등불이었다.

그 불꽃 안에서 내가 탄생했다.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혹독한 추위와 그에 따른 굶주림을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 속에서 탄생했다.

나는 어둠을 몰아내는 등불이자, 추위를 살라 먹는 불꽃이었다.

나는 차갑고 생명력 없는 바위를 집어삼키고 허기를 이길 불꽃의 단약을 내어주는 존재였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나를 숭배하는 조그마한 인간들과 그 뒤에서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거대한 존재와 하얗게 물든 수호자였다.

꿈속 풍경이 점점 흐릿해졌다.

나는 깊은 꿈에서 깨어나, 다시 눈이 떠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운 탄생의 순간.

흐릿한 시야 속에서 보인 것은 주위를 메운 작은 것들과 나를 무표정한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거대한 존재와 하얀색 수호자였다.

아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하지만 시야가 명확해지자 보이는 것은 내가 꿈꾸던 그 풍경이 아니었다.

기암괴석 대신 푹신하고 말랑한 대지가 있었고, 추위와 강풍 대신 은은한 온기와 산들바람이 있었다.

주위를 메운 것은 나를 숭배하는 인간이 아니라, 해맑은 미소를 띤 소녀 형상의 존재였다.

하얀 수호자는 당당한 표정을 잃어버리고,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창조주는 무표정 속에 장난기를 숨기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살점을 뜯어먹었다.

강인했던 내 육체는 투명하고 부들부들하고 달콤한 무언가로 변해있었다.

나는 창조주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얌전히 뜯어먹힐 수밖에 없었다.

***

미니 사신 정원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거대한 검은 구체.

<불변하는 검은 공>과 똑같이 생긴 것이 미니 사신 정원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처참하게 무너진 과자의 탑이 있었다.

옴뇸뇸.

아마 저 구체로 올라가려고 만든 것 같은데, 재질에 비해 너무 높아서 무너진 탑의 잔해를 황금 사신들이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구체 안에 새로운 동생이 생겼다는 거지?

하지만 구체는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올라갈 방법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도대체 과자로 어떻게 저 높은 곳까지 탑을 세운 거야?

황금 사신, 너무 유능하네.

나는 구체 밑에서 뚜방뚜방 걸어 다니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늘만 날 수 있으면 간단할 텐데.

구체 밑에서 고민하던 도중, 미니 사신 정원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황금 사신들도 깜짝 놀라서 불꽃을 둘러싸고, 나도 호기심에 천천히 불꽃으로 다가갔다.

왠지 아귀가 생겼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불꽃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불꽃 속에서 조그마한 돼지 모양 젤리가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보통의 젤리랑 다르게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는 젤리였다.

황금 사신들이 침을 주르륵 흘릴 정도.

하지만 내가 먹는 걸 기다리는 건지, 젤리 돼지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맛이나 볼까?

천천히 돼지에게 다가가서 뜯어서 먹었다.

옴뇸뇸.

쫄깃하고 과즙이 터지는 혁신적인 젤리의 맛이었다.

뜯어먹은 부위를 바라보니, 뜯어먹은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다.

재생도 빠른 걸 보니, 아귀처럼 비상식량으로 써도 되겠어.

내가 등을 돌리자, 황금 사신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마구 달려들어 조금씩 뜯어먹기 시작했다.

젤리 돼지는 하얀 아귀처럼 애처로운 표정이 되어버렸다.

***

관악구, 트리니티 제3 연구소 폐허.

검은 액체에 잠식된 폐허는 여전히 사람 하나 살지 못하는 죽음의 대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인간에게도, 그리고 다른 생물에게도, 심지어 오브젝트에게도 해로운 이 점액으로 가득한 관악구는 방호복을 챙겨입은 인간들만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 폐허 인근에 마련된 조사 캠프 안에서 비밀스러운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둘밖에 남지 않은 트리니티의 연구소장들이었다.

트리니티 제1 연구소장이 밀봉된 유리병에 들어간 검은 점액을 흔들면서 말했다.

“신기하군. 정말 신기해. 어쩌면 이 액체가 인류의 미래를 밝힐 등불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 말을 듣고는 제2 연구소장은 표정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런 수상쩍은 오브젝트 부산물을 활용하겠다고? 제3 연구소장 꼴 나고 싶은 건가?”

“이 액체는 수상쩍지도, 오브젝트의 부산물도 아니라네.”

제1 연구소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도 제3 연구소장의 일지를 보지 않았나? 제조법도 알고 있고, 그 효능도 알게 되었지.”

“설마, 인류의 진화니 뭐니 하는 허황된 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하하,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대답한 제1 연구소장이었지만, 제2 연구소장은 그 웃음 속에 약간의 진심이 섞여 있음을 짐작했다.

‘위험하군.’

제1 연구소장의 표정에서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제2 연구소장은 자리에서 서둘러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어. 다음에 보자고.”

“그래.”

자리를 떠나는 제2 연구소장의 뒷모습을 제1 연구소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결국 검은 구체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그마한 젤리 돼지는 뭔가를 먹고서 자신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미니 사신 정원에 널린 수많은 과자를 강제로 먹여서 벌크업 시킨 돼지는 검은 구체에 닿을 만큼 거대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 구체의 내부는 황금 사신이 말하던, 막내가 살고 있는 즐거운 장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묘지에 가까운 장소였다.

저 멀리에 보이는 거대한 시체.

그리고 바닥에 깔린 점액은 미니 사신의 시체였다.

그 형상을 잃어버려 물처럼 녹아버렸지만 나는 확실히 보였다.

장작을 잃고 쓰러진 수많은 미니 사신의 시체.

손을 내려서 미니 사신 하나를 퍼 올린 뒤, 장작을 집어넣었다.

액체처럼 녹아버린 미니 사신은 순식간에 그 형상을 되찾고 부활하는 데 성공했다.

다리가 없고, 길쭉한 팔을 가진 이형의 존재.

하얗게 타오르는 장작을 가진 미니 사신은 나를 텅 빈 눈동자로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그 모습을 바꿨다.

나랑 똑 닮은, 검은색의 미니 사신.

검은색이니까 검은 사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검은 사신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시체와 나를 번갈아 가면서 계속 바라보던 검은 사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황금 사신이랑 다르게 확신하지 못하는 검은 사신을 보고, 나는 예린이가 열심히 채워준 장작의 반을 통 크게 잘라내서 커다란 시체에 집어넣었다.

화르륵.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내 의식이 시체 속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의식이 옮겨진 것만으로도 그 많은 장작을 순식간에 소비해 버리고, 다시 내 몸으로 의식이 튕겨 나갔다.

‘엄마!’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검은 사신은 폴짝 뛰어서 내 얼굴에 달라붙더니,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내 장작이 검은 구체를 가득 채우더니, 무한에 가까운 검은 사신들이 일어나서 달려들었다.

‘엄마다!’

갑자기 달라붙어서 펑펑 우는 검은 사신들이 조금 의아했지만, 그 애절한 감정만은 잘 느껴졌다.

‘괜찮아. 엄마는 여기 있어.’

나는 그저 울고 있는 수많은 검은 사신을 토닥일 수밖에 없었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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