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4
프레이? 쟤가 여기는 어쩐 일이래?
만날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다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미적미적 오는 녀석이.
설마 지금 당장 대련하자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오늘은 사양이야. 나 방금 칼이랑 대련하면서 온 몸의 힘을 다 써버렸다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 말이야.
사실 말이 휴식이지 또 연습모드에 들어가서 할배랑 구르게 될 예정이지만 어쨌든 현실의 몸은 쉬게 해줘야 해.
키를 보면 알겠지만 나는 아직 성장기 아가라고!
성장기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는 건데 나 키가 여기서 멈추는 건 아니겠지? 그치?
루시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느 쪽이라도 평균 이상이잖아.
베네딕은 종이 정말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인간이고, 환상 속에서 보았던 루시의 어머니도 여자치고 큰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근데 내 키가 여기서 멈추면 이상하잖아. 세상에는 유전자라는 게 있다고. 부모의 키가 크다면 자식의 키도 큰 게 정상이야!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는 키가 클 수 있겠지? 언제까지 남들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거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희망의 나래를 그리기는 했지만 현실이 녹록치 않을 것임을 난 알고 있었다.
우선은 메스가키 스킬이 문제야.
내가 말하는 거. 행동하는 거. 글을 쓰는 거. 어느 하나 메스가키 답지 않은 걸 허락하지 않는 이 녀석이 과연 내가 성장하는 걸 허락할까?
보통 메스가키 캐릭터는 자그마하고 예쁜데 건방진 거잖아. 키가 커서 가키스럽지 않게 되는 걸 허용할 거 같지 않단 말이지.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어. 페도 변태 허접 주신이 과연 내가 키가 크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까?
커뮤니티가 있었다면 농ㅋㅋㅋ 쭉ㅋㅋㅋ 이딴 소리나 지껄일 것 같은 그 변태가?
“루시.”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에 1센치라도 크면 다행이라는 현실을 깨우치며 좌절에 빠진 나에게 프레이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시죠?’
“뭔데. 허접 검사.”
“너 나랑 대련할 때 봐 준 거야?”
응? 갑자기 그건 왜?
아. 방금 전에 나랑 칼이랑 대련하는 걸 구경한 건가. 그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겠네.
칼을 상대할 때와 프레이를 상대할 때는 마음가짐이 다르니까.
그도 그럴 게 칼을 후려치듯이 프레이를 후려치면 얘가 진짜로 큰 부상을 입게 되잖아.
난 프레이와 함께 성장하고 싶은 거지 프레이를 박살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상대가 그걸 알아차린 마당에 고개를 저어봐야 프레이를 기만하는 행위가 될 것 같아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힘을 아꼈어요.’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왜 너 같은 허~접한테 전력을 다하겠어? 그러지 않아도 처바를 수 있는 좆밥인데.”
어어? 저기요. 메스가키 스킬님?
저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그냥 전력을 내지 않았다고만 이야기 할 생각이었는데요?
프레이의 자존심에 메이스를 박아 넣을 생각이 아니었다고요!
저기 봐요! 항상 약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프레이가 지금은 정색을 하고 있잖아요!
“내가 좆밥이라고?”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이제 다른 사람의 호감도를 올리는 데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건 사실이야.
그래도 어느 정도 친해진 사람한테 미움을 사고 싶진 않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까이 지내던 애가 돌아서면 마음에 데미지가 두 배로 들어온단 말이야!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악화되기만 할 것을 확신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내 침묵에도 불구하고 메스가키 스킬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녀석은 강제로 입꼬리를 올렸고, 피식거리는 웃음소리를 내게 만들었으며, 남을 깔보는 눈을 하게 만들었다.
이래서야 대답하기도 싫다는 의미가 되어 버리잖아!
프레이는 살짝 찌그려진 미간으로 나를 노려보다 이내 등을 돌려 떠나가 버렸다.
‘할아버지. 어떡하죠.’
<뭐 어떠냐. 저 녀석이 허접인 건 사실인데.>
‘지금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요!’
저 심각하다고요! 예?!
제가 소울 아카데미의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프레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에요. 성능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요! 제가 소울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고 나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 바로 프레이라고요!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할 때면 저 녀석이 항상 옆에 있다보니 정이 들어버렸단 말이에요!
그런 프레이한테 미움을 살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농담이나 하고!
할배! 저를 괴롭힐 수단이 생겼다고 너무 의기양양한 거 아니에요?!
어디 한 번 상호확증파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가 알게 해 드려요?!
<아니 생각을 해보거라. 평소 대련을 할 때에 그대가 내뱉은 말들이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더냐?>
억울하다는 듯이 내뱉은 할배의 말에 난 곰곰이 내가 했던 여러 가지 말들을 돌이켜 보았다.
할배가 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정확한 팩트였다.
<저 정도로 기분이 상할 녀석이었으면 진즉에 네 옆에서 도망쳤겠지.>
‘…그렇죠?’
<그러니 별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프레이가 떠나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기와 디저트가 내 앞에 나왔지만 난 도저히 그걸 맛있게 먹을 수가 없었다.
*
오늘 아침. 평소처럼 훈련을 하기 위해 발을 움직이던 프레이는 우연히 루시와 칼 교수가 대련하는 모습을 눈에 새겼다.
두 사람이 대련을 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가깝게 지내던 둘이니까.
그럼에도 프레이가 두 사람의 대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그 대련의 수준이 너무나도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결코 상대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쾌검.
그 모든 것을 받아내며 꾸준히 기회를 노리는 방패.
둘이 움직이는 한 수 한 수 사이에는 너무도 많은 노림수들이 있어서 한시라도 그를 놓치는 순간 흐름을 따라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프레이는 하려고 했던 모든 일을 잊고 둘의 대련이라는 파도를 올라타 그를 구경했다.
전체적인 흐름을 쥐고 있는 건 검수.
애초에 저 쪽이 더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상대에게 가르침을 주는 형식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방패를 든 이라 하여 가만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루시는 상대에게 몰아붙여지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틈을 부여잡으려 노력했다. 상대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루시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를 분석하던 프레이는 문득 이런 생각을 품었다.
나와 대련을 할 때에 루시가 저랬던가?
아니.
루시는 저렇게 필사적이지 않았어.
프레이는 수도 없이 루시와 대련을 해보았다.
1학년 중에서 서로의 수준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둘 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물론 두 사람이 같은 경지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루시는 프레이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둘 사이의 극명한 승률 차이가 그를 증명하기도 했고.
허나 프레이는 그를 극복할 수 없는 차이라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 프레이였기에 그녀는 언젠가 루시를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허나 그 믿음은 이 순간 박살이 나 버렸다.
자신의 바로 앞을 걷고 있다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저 만치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프레이에게 있어 경이와도 같았던 그 대련을 결정지은 것은 루시의 과감한 판단이었다.
그녀는 치명상을 입을 각오를 하며 공격의 기회를 만들었고 그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결코 무너트릴 수 없을 것 같았던 벽이 루시의 메이스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본 프레이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루시에 의해 비웃음을 산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의 마음속에 붉은 것이 자리 잡게 되었으니까.
화가 난 건가?
아냐. 그거랑은 좀 달라.
이건 도대체 무슨 감정이지?
그냥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가?
그래. 분명 그런 걸 거야.
프레이는 그를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하고 훈련을 하러 향했지만 그런다 하여 붉은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감정은 프레이의 마음속에 진득하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루시에게 확답을 들은 지금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런가. 루시는 나를 맞상대라 여기지도 않고 있었던 거구나.
루시에게 도발을 들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프레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점점 더 붉은 것이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이라는 것에 서투른 그녀는 왜 지금 자신이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는 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 누군가 나에게 이걸 설명해 줄 사람이 없을까.
그를 고민하며 무작정 아카데미 안을 돌아다니던 프레이는 의무실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대체 알른 가문에서 어떤 식으로 훈련을 시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의사들은 이를 타박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골절상이라고 하죠.”
“뭐 어떻습니까. 뼈에 살짝 금이 간 것 뿐인데. 어차피 포션 먹고 하루 쉬면 낫는 거잖습니까.”
“제가 이래서 기사를 싫어한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그 안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프레이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한 쪽은 양호 교수. 다른 쪽은 칼 교수인가.
…그래. 칼 교수라면. 루시와 가까운 저 사람이라면 루시가 만들어낸 붉은 감정에 대해서도 잘 알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프레이는 한치 망설임없이 의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칼의 앞으로 걸어가선 입을 열었다.
“칼 교수. 물어 볼게 있어.”
“급한 일입니까 켄트 영애?”
“응. 아주.”
“알겠습니다.”
양호 교수의 잔소리에서 빠져나갈 명분이 생긴 칼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이를 데리고 의무실 바깥으로 도주했다.
그 뒤에다 대고 양호 교수가 무어라무어라 소리를 쳤지만 칼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목표로 한 포션을 주머니에 넣는 건 성공했으니까.
“감사합니다. 켄트 영애.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검에 관한 물음인가요?”
“아니. 그거랑 다른 거.”
아카데미의 정원을 걸으며 프레이는 자신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태까지 루시가 자신을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걸 깨닫고 나니 마음 속에서 붉은 것이 묻어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이걸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느냐.
프레이 특유의 짧막한 어휘로 이루어진 설명은 순식간에 끝을 맺었다.
그 모든 설명을 귀담아 들은 칼은 피식 웃고는 프레이의 물음에 답했다.
“서운하셨군요? 아가씨가 저만치 훌쩍 나아가 버려서.”
“서운해?”
그런 감정을 모르는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이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려나.
아니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어쨌든 저 서운함을 없애기만 하면 그만이잖아.
지금 켄트 영애께서 아가씨께 서운함을 느끼는 이유는 아가씨가 저만치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니까.
켄트 영애가 앞으로 달릴 수 있도록 도와드린다면.
나쁘지 않네. 아가씨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곁에서 같이 달릴 페이스메이커가 있는 편이 낫기도 하고.
“켄트 영애.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켄트 영애의 붉은 감정을 없앨 수 있는 방법입니다.”
“뭔데?”
“제가 검을 가르쳐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프레이가 고갤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