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5
칼은 프레이의 감정을 서운함이라 정의했다.
루시가 자기를 내버려두고 저만치 앞서 나아갔기에 서운함을 느끼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프레이는 칼과 헤어지고 나서 도서관에 찾아가 사전을 열었다.
사전 속에서 서운함은 이렇게 정의됐다.
아쉽고 섭섭한 것.
프레이는 아쉬움도 섭섭함도 몰랐기에 두 단어에 대해 조사해 보았지만 사전은 돌려막기를 좋아했다.
아쉬움은 섭섭함에게 짐을 돌렸고, 섭섭함은 서운함에게 짐을 돌렸던 것이다.
덕분에 프레이는 서운함이라는 감정의 정의를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쓸모없어.”
사전을 닫아버린 프레이는 사전의 책장에 이마를 박고는 얼마 전 칼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켄트 영애께서는 아가씨가 혼자서 저만치 훌쩍 떠나가 버린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계십니다. 자기 혼자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걸까? 하고 말이죠.’
아마 칼 교수가 한 말이 맞을 거야.
내 마음에 붉은 색이 생겨난 건 루시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단 걸 알게 된 후였으니까.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붉은 색을 없애기 위해선 칼 교수가 이야기 했던 대로 루시가 서 있는 곳에 도달해야 하는 거겠지.
‘이젠 허접 검사라고 부를 수 없겠네.’
웃음을 흘리며 그리 말하는 루시의 모습을 상상한 순간 프레이는 느꼈다.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져있던 색이 희미해지는 것을.
그 뿐만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색이 스며드는 것을.
거기에 놀라 고개를 치켜 든 그녀는 다시금 사전을 펼쳐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 내 마음에 자리 잡았던 색이 서운함.
그럼 그게 희미해지면서 자리 잡은 다른 색은 뭘까?
프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자신에게 답을 알려준 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이래 뵈도 교수니까요. 학생의 고충을 지나칠 수가 없네요.’
칼 교수에게 도움을 받으면 다른 색의 정체도 알게 될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생각하고 고민할 바에 먼저 행동을 하는 편이었다.
*
프레이에게 좆밥이라는 소리를 내뱉은 다음 날.
날 꼴도 보기 싫어할 수도 있다 걱정했지만 프레이는 여느 때처럼 아침 훈련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거 봐라. 그 정도로 상처받지 않는대도?>
할배는 그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거 보라는 것처럼.
저기요. 할배. 저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어요.
근데 여자애가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면 위로를 해줘야지. 네 입은 평소에도 더러운 데 뭘 걱정하냐는 소리를 하면 되겠어요?
이 인간 살아있을 적에 분명 인기 없었을 거야.
세상을 구한 영웅이자 고결한 성기사면 뭐해. 다른 사람한테 공감해 줄 줄을 모르는데.
겉모습이랑 업적만 보고 관심을 가지더라도 할배의 인성을 보고 나면 기겁했을 걸.
‘안녕하세요. 프레이.’
“안녕. 허접 검사.”
“루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프레이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라? 평소랑 프레이의 표정이 다른 느낌이네.
뭐라고 해야 할까.
프레이의 눈빛은 흐리멍텅하단 말이지.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의 눈빛은 검을 휘두를 때만큼이나 선명했다.
“나 널 이길 거야.”
‘네? 갑자기요?’
“하. 너 따위가?”
“응. 다신 날 얕보지 못하게 할 거야.”
중간에 메스가키 스킬이 또 다시 내 뜻을 왜곡했지만 프레이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이어나갈 뿐.
“기말고사 대련 때 내가 허접 좆밥이 아니란 걸 입증할 게.”
그러니까 그 때까지 따로 수행을 하겠다면서 프레이는 제 할 말을 끝마치고 떠나가 버렸다.
<네가 저 아이에게 향상심을 새겨준 모양이구나.>
‘…어. 그러니까 제가 싫다는 거 아니죠?’
<지금 저 말이 널 싫어하는 것처럼 들리더냐?>
아뇨. 근데 그냥 한 번 확인하고 싶었어요.
프레이가 나를 이기고 말겠다 선언하고 떠나갔지만 그렇다 한들 내 일상이 바뀌진 않았다.
다만 그 사이사이에 본래 프레이가 있던 자리가 비었을 뿐.
예를 들어 대련 수업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본래 나를 맞상대 해주는 사람은 프레이였다. 정확히는 그녀 이외의 지원자가 없으니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껄끄러운 존재였으니까.
인성이 더럽기로 유명한데다가 같은 학년의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인간이 바로 나다.
근데 미쳤다고 나한테 대련을 신청하겠어?
분명 처발린 다음에.
‘개허접 쓰레기 주제에 나한테 대련을 신청한 거야? 혹시 얻어맞는 거 좋아해? 마조야? 발로 짓밟아 줄까? 농담이야. 너 같은 좆밥을 밟으면 내 발이 오염될 것 같아서 싫은 걸.’
같은 소리를 들을 텐데 프레이 수준의 괴짜가 아니라면 그 누가 나를 상대해줄까.
그래서 대련 시간에 칼이나 안톤하고 무기를 맞댈 생각을 하던 나였지만 예상외의 지원자가 있었다.
입학시험을 칠 때에 내 뺨을 후려쳤었던 어… 그러니까… 얘 이름이 뭐더라.
얼굴을 꽤 자주 봤는데 이름은 모르겠단 말이지. 만날 때마다 좆밥 영애니 병신이니 좆밥이니 하는 소리만 지껄여서.
“오늘은 널 박살내 줄 거야. 쓰레기 년.”
좆밥 영애는 분노가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그리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다고 나와 좆밥 영애의 대련 결과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가 워낙에 커야지.
좆밥 영애가 그렇게까지 약한 건 아니었다. 1학년에 재학 중인 여러 학생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분명 상위권이거든.
프레이랑 비비지는 못하겠지만 아서나 자칼 정도가 상대라면 어떻게든 승리의 가능성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문제는 상대가 나라는 것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어지간한 가문의 기사를 상대로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괴물이니까.
그래서 대련 수업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좆밥 영애는 단 한 번의 유효타도 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좆밥 영애와 대련을 하는 건 무척이나 심심한 일이었다.
그녀의 공격은 내 방패에 가로 막혀 튕겨나갈 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메이스를 휘두르자니 그러다 얘 어디를 부술 것 같다는 걱정이 돼서 곤란하고.
으음. 연습이 안 되네. 시간 낭비하는 느낌이야.
다음번에는 얘가 덤비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칼이랑 대련하자고 그래야겠다.
자신의 분을 조절하지 못하고 무작정 검을 휘두르다가 또 다시 넘어진 좆밥 영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힘을 배분하지 않고 무작정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다 보니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여기까지 하자 그럴까. 이 이상 해봐야 쟤가 다칠 뿐일 것 같은데.
‘영애님. 슬슬 그만하죠?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일어나지 마. 좆밥 영애. 또 일어나봐야 바닥을 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좆밥인 걸 인정하고 바닥이나 기어다녀. 너한텐 그게 어울리거든.”
내가 얠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가. 메스가키 스킬의 번역이 거셌다.
조금만 더 가면 좆밥 영애의 머리를 발로 짓밟으면서 비웃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뭐 근데 메스가키 스킬이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쟤도 내 어투에 어느 정도 적응이 돼 있을 테니까 괜찮…
“…흑.”
바닥을 짚고 있는 좆밥 영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 어라?
음?
아니. 야. 왜 갑자기 울고 그래.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내가 어지간히 강하게 이야기를 해도 이를 악물고 반격을 하려던 애잖아.
내가 뭘 그렇게… 나쁜 행동을 하긴 했지. 근데 나만 나쁜 행동한 것도 아니고 너도 내 뒷담화 까고 욕하고 다 했잖아!
순진한 피해자인 척 먼저 울어버리면 어떡해! 이럼 나만 나쁜 년이 되잖아!
울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좆밥 영애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모인 게 보였다.
그 사람들의 시선은 짜게 식어 있었다.
둔한 편인 나조차도 저 시선의 의미가 알른 영애가 또 저질렀구나. 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하. 평판이 떨어지는 게 눈에 선하다.
루시 코인은 왜 이렇게 악재가 많은 거야.
조금 올라간다 싶으면 바로 무슨 일이 생겨서 떨어지기를 반복하니 원. 롤러코스터도 이것보다는 낙하구간이 덜하겠다.
이름에 코인을 붙여서 그런가? 다른 걸 붙이면 좀 더 낫나?
(주)루시라고 하면 좀 안정적으로 올라가려나?
아냐. 이것도 얼마 안 가서 상장폐지 될 것 같은 느낌이네.
그냥 루시라는 이름 자체가 문제인 게 분명해.
눈앞의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현실도피를 하고 있자니 저 멀리서 칼이 다가왔다.
“알른 영애. 베인즈 영애. 잠시 바깥으로 나갈까요?”
그래. 이 한복판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느니 그게 낫겠다.
그나저나 쟤 성이 베인즈였구나. 이번에는 기억해두자. 다음 번에도 속으로 좆밥 영애라고 부를 순 없잖아.
바깥으로 나와서 칼이 베인즈 영애를 위로하자 그녀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는 자존심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문턱이 무너지니 그를 돌이킬 수가 없어진 것이다.
우에엥 거리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미묘했다.
쟤가 나랑 악연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춘기 여자애니까. 나보다 한참 어린 애가 우는 걸 보고 있으면 동정심이 생긴단 말이지.
과거 뺨 맞은 것에 대한 복수는 이미 끝마친 지 오래니까 더 이상 쟬 미워 할 이유가 마땅찮기도 하고.
화해하자고 해볼까.
원래 이런 건 연장자가 먼저 손을 내미는 거잖아. 먼저 관대함을 보여주자고.
메스가키 스킬이란 벽을 뛰어 넘고 미안하단 소리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를 안 하는 것보다야 낫잖아?
성공하면 평판이 좀 나아지는 거고 실패하면 평소랑 똑같은 거니까 손해볼 것도 없고.
한참이 지나 간신히 베인즈 영애가 진정되었을 무렵 그녀에게 다가갔다.
베인즈 영애는 그런 나를 잔뜩 부어오른 눈으로 노려봤다.
직설적인 적의네. 막 빙의했을 무렵에 저런 눈을 봤으면 쫄았을 것 같아.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증오어린 시선을 넘어 왔는데. 이제는 이런 거에도 익숙해졌다고.
‘괜찮으세요?’
“괜찮아? 좆밥 영애? 풋. 눈물을 질질 짜느라 어마어마하게 추해졌는데.”
“닥치고 꺼져. 루시 알른.”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푸핫. 쳐발려놓고 눈을 치켜 떠봐야 저언혀 안 무서운데? 꼬와? 꼬우면 어쩔 건데. 좆밥 영애. 질질 짜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냐고. 허접~ 좆밥~ 울보~ 추녀~”
“닥치라고 그랬잖아!”
응. 역시 빡세구만.
이럴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눈앞이 막막하네.
이래서야 날 미워하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아서랑 화해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구나.
쪼잔 악신이 날 괴롭힌답시고 아서랑 나를 따로 보낸 게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아서는 날 미워하고 있지 않을까.
어라? 생각해보면 허접 주신보다 쪼잔 악신이 내 인간 관계에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지 않아?
…허접 주신! 분발해 봐!
자꾸 이러면 나 네가 아니라 쪼잔 악신을 믿는 수가 있다고!
– 띠링.
[새로운 퀘스트가 지급됩니다.]
[당신이 인기 없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