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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8

검은 요원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달빛이 거실을 비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꺼운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은빛 광선을 제외하고는 짙은 어둠에 휩싸인 거실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은은하게 달빛이 내리쬐는 한가운데에 한 금발 소녀가 있었는데, 옅은 달빛 아래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은색의 빛무리 속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금발 소녀는 고개를 들고,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왠지 희미하게 느껴져서 지금 당장이라도 빛 속에 녹아들어 사라질 것 같았다.

사라질 것 같은 소녀의 존재를 붙잡는 것처럼, 검은 요원은 천천히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고요한 정적을 깨고, 검은 요원의 힘 있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방안을 울렸다.

“아, 아저씨 오셨네요.”

소녀는 검은 요원을 보며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달빛만큼이나 환하고 따뜻한 미소였고, 그 미소는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방을 순간적으로 밝힌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검은 요원을 웃으며 바라보던 소녀는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도 정말 날씨가 좋네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에요.”

소녀는 단순한 날씨를 넘어선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요원이 소녀의 곁에 나란히 서자, 금발 소녀는 작고 섬세한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달을 가린 소녀의 손바닥은 조금 투명하게 보였다.

붉은 아크릴판처럼 조금 투명하게.

“아가씨, 손이?”

“아, 이거요? 요즘 달빛을 쬐면 이렇게 되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에요.”

‘모르겠군.’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은 요원은 생각했다.

오브젝트 관련 공부를 꾸준히 해왔지만, 아직도 모르는 일들투성이였다.

죽었을 것이 분명한 자신과 소녀의 부활.

붉은 달의 정체와 소녀와의 관계.

그리고 투명하게 변하는 소녀의 신체.

정말 모르는 일투성이였지만, 지금은 아는 길로 천천히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검은 요원은 소녀가 기다리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가씨, 태양 아래를 걸을 수 있게 되는 방법을 탐정 녀석이 알아낸 것 같습니다.”

“정말요? 지금 당장 출발해요!”

소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공간을 환하게 밝히는 것처럼 밝은 미소를 띤 소녀는 검은 요원의 손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지금 가야 하는 그들의 목적지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대산, 사회의 보호가 닿지 않고 오브젝트들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검은 요원은 방안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장비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소녀도 검은 요원의 뒤를 따라다니며 준비 작업을 도왔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그들은 숙소를 나서며, 오대산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

격리실에 누워서 황금 사신들이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리모를 쓰고 열심히 푸딩을 만드는 황금 사신들.

푸딩을 만드는 황금 토끼 사신들의 모습은 주방의 미니어처처럼 보는 맛이 있었다.

‘회색 사신 푸딩’의 공급이 원활해져서 더 이상 푸딩을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황금 사신들은 여전히 푸딩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황금 사신들의 취향인지는 몰라도, 황금 사신들은 애착 인간과 나눠 먹을 푸딩을 주로 자신이 만든 푸딩으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제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 같은 감각인 건가?

미니 사신들은 이해하기가 조금 힘드네.

토끼 귀가 돋아난 황금 사신들은 작업을 마친 뒤, 자기 몫의 푸딩을 들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흩어졌다.

왠지 퇴근하는 직장인 같은 느낌.

나는 방울에 휩싸여 둥실둥실 떠다니는 푸딩을 하나 집어서 먹었다.

옴뇸뇸.

역시 이 토끼 푸딩은 맛있어.

노동자 황금 사신들이 조공으로 주고 간 푸딩들은 분명 똑같은 제임스 푸딩일 텐데 더 맛있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게 일하는 걸 보고 먹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게 부르주아의 맛인 건가!

황금 사신이랑 같이 침대에 널브러져서 푸딩을 먹는 도중, 황금 사신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것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새끼손가락을 잡아당겼다.

‘?’

의아한 표정으로 황금 사신을 바라보자, 황금 사신은 신나는 표정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했다.

전해지는 의지를 보니 어떤 장소에 대한 이야기 같았는데,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건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세희 연구소에 내가 모르는 장소가 있었나?

뚜방뚜방.

유령화를 하고 앞장선 황금 사신의 뒤를 따라서 걸어 나갔다.

신난 것처럼 폴짝폴짝 뛰는 황금 사신이는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려고 자주 뒤를 돌아봤는데, 조금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기나긴 지하 계단을 통해서 도착한 곳은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넓은 지하 시설이었다.

이런 곳이 세희 연구소에 있었을 줄이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운데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황금상이었다.

황금색이었지만 황금 사신이 절대로 짓지 않을 것 같은 뚱한 표정인 것을 보니, 나를 표현한 황금상으로 보였다.

도착한 황금 사신은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그저 황금상 하나가 덩그러니 있을 뿐인 지하실이었지만, 황금 사신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꽤 많은 황금 사신이 모여서 황금상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뛰어다니는 걸 보니, 황금 사신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장소로 보였다.

엄청나게 크네.

황금상을 올려다보면 목이 불편할 정도로 커다랬고, 매일매일 관리를 받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TV 광고로 나올 정도로 ‘회색 사신’ 굿즈가 팔리고 있었는데,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전부 이 황금상을 만드는데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이 광기는 세희인가?

예린이는 예산을 빼돌릴 정도의 권한이 없었고, 서아는 연구소 예산을 이런 데 쓸 정도는 아니었다.

세희는 멀쩡해 보이는데, 가끔 이상한 짓을 한단 말이지….

거대한 내 황금상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살짝 기분이 좋으면서도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황금 사신이 황금상을 왜 저렇게나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황금 사신이 좋아하는 곳이니까, 비슷한 성향의 검은 사신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미니 사신 정원을 주변에 살짝 전개해서 검은 사신들을 이 자리로 불러냈다.

하지만 나타난 검은 사신들은 좋아하기보다는 불안해했다.

주변을 마구 두리번거리는 것이, 뭔가의 습격을 대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안해하는 검은 사신을 손바닥 위에 얹고 천천히 쓰다듬어 주면서 물었다.

‘왜 그러니?’

하지만 검은 사신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황금상 앞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황금상 앞에 붙여진 패널을 가리키며 패널에 쓰인 내용이 뭐냐고 의지를 전달했다.

하긴 미니 사신들은 감정을 읽을 뿐이지, 말을 이해하거나 글씨를 읽을 줄은 몰랐었지.

나중에 한국어라도 가르쳐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패널을 바라보자, 패널에는 단순한 내용이 쓰여있었다.

<회색 사신 황금상>

패널에는 내 이름이 적혀있다고 알려주자, 검은 사신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이름?’

너무 불안해하는 검은 사신을 쓰다듬어 주면서 안심시켰다.

‘괜찮아. 아무 문제도 없어.’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검은 사신들이 내 주변에 잔뜩 모여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름, 불러도 괜찮아?’

‘이름, 써도 괜찮아?’

검은 사신들은 슬라임처럼 녹아내린 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름이 뭐 대수라고.

나는 바닥에 앉아서 검은 사신들을 품 안에 잔뜩 그러모아, 의지를 전달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렇게 한참을 토닥이고 나서야, 검은 사신들은 미니 사신 형상으로 돌아와서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후, 육아 힘드네.

공포를 떨쳐낸 검은 사신들은 황금 사신들의 대열에 참가해서 황금상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거대한 황금상과 그 주위를 웃으며 도는 작은 아이들을 보니 왠지 원시 종교 의식 같아 보였다.

***

간간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던 잔불이 모두 꺼진 지 오래인, 영체 방벽 인근 도시 폐허.

이제 슬슬 잠잠해지는 것 같았던 도시의 폐허에 기묘한 불길이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난장판이군.”

제임스는 바람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꿋꿋이 타오르는 신비로운 불길에 휩싸인 도시의 폐허를 보면서 말했다.

“난장판이지, 아무래도 이 지역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제임스의 말을 오브젝트 협회 소속의 친구가 받아주었다.

“정신 오염을 유발하는 ‘불타는 약’이 저렇게나 많이 지하에 파묻혀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방호복으로 온몸을 둘러싸도 왠지 맛있는 탄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이 보고서를 읽어봤는데, 터무니없더군.”

오브젝트 협회에서 나온 친구는 제임스가 제출한 보고서를 흔들면서 말했다.

보고서의 제목은 <회색 사신 관찰 보고서>.

그 보고서 안에는 미국에서 활동했던 회색 사신의 활동 내용과 그에 관련된 분석들이 잔뜩 쓰여있는 보고서였다.

물리적으로 손상을 입힐 수 없는 점이나 유령화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다시 재확인되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능력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제대로 보고된 사항이 없군. 정말 세희 연구소에 ‘회색 사신’을 계속 맡겨둬도 되는 건가?”

“그래. 내가 생각할 땐, 세희 연구소 말고는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연구소는 오히려 파국만을 불러올 거야.”

제임스는 진지한 얼굴로 세희 연구소를 지지했다.

지지의 이유가 허술하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제일 놀라운 건 이거야.”

보고서의 말미에 급하게 추가된 부분이었다.

<회색 사신은 발성 기관이 없지만, 한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이해한다.>

<영어는 단어 위주로 조금 알아듣는 수준.>

<문자나 제스처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의 친구는 보고서의 말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은 왜 특급 기밀로 지정하자는 건가? 소통이 가능한 오브젝트라니? 활용할 방도가 무궁무진할 텐데 말이야.”

“활용한 방도가 무궁무진하니까 그런 거야. 회색 사신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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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는 ‘사실 보고서에도 아예 빼버릴까도 생각했었어.’라고 작게 덧붙였다.

“회색 사신과의 관계를 계속 현재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제일 중요해. 너도 협회에 가거든 강력하게 어필해 줘.”

“뭐, 그러지. 회색 사신 정도의 오브젝트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겠지.”

정신 오염이 너무 심해서 함부로 다가오기 힘든 폐허에서, 두 남자가 회색 사신과 관련된 밀약을 맺었다.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이었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오대산 인근.

그곳에서 온몸을 꽁꽁 싸맨 트리니티 제1 연구소 소속 직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 뒤에는 석유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컨테이너를 짊어진 채였다.

[조심해라. 이 안개는 오브젝트니까.]

무전으로 제1 연구소 부소장의 목소리가 직원들의 귓가에 들려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구름 고기들이 잔뜩 헤엄치는 신비로운 풍경.

하지만 트리니티 연구원들은 그런 풍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소장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안개가 자욱한 하늘 위에는 짙은 주황색으로 빛나는 신비로운 달이 그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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