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9
연습 모드에서 한창 할배와 논의를 할 적에 대전제로 정해둔 건 하나였다.
우선 내가 아르마디의 사도라는 걸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내가 그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페이비는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을 테니까.
반쯤 흘려듣고서 나중엔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을 하겠지.
허나 내가 아르마디의 사도라는 걸 인정받는다면 다르다.
신을 믿고 그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으나 자신이 거짓된 성녀이기에 사랑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페이비의 앞에 신의 사도가 나타난다면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테니까.
우리 허접 무능 주신이 페이비한테 아무런 말을 걸지 않는 한 페이비에게 내 말은 곧 신의 말씀이잖아.
안 믿을 수 없을 걸?
물론 그만큼 투정을 들어줘야하겠지만 그 정도야 페이비를 설득할 수 있다면 별 거 아니지.
메스가키 스킬로 어떤 답변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우쭈쭈해주다 보면 기분이 풀리지 않겠어?
대충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짜뒀는데 페이비의 입에서 아르마디의 사도냐는 이야기가 나와 버리니 좀 당혹스러웠다.
눈치 채고 있었던 거야? 대체 어떻게?!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상식적으로 아르마디를 허접주신이라고 부르는 미친년이 아르마디의 사도일 거라고 누가 추측해?
내가 신성마법을 쓰는 거?
그야 이거 대부분은 ‘아르마디께선 저런 미친년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구나.’ 라고 생각한다고!
나에게 신성마법을 알려준 주교도 그랬었고!
‘어떻게…’
“허접 성녀. 어떻게 알아낸 거야?”
진짜로! 말이 안 되잖아!
혹시 페이비 너 독심술이라도 배웠니?
무슨 치트 스킬을 익혀서 다른 사람의 상태창을 볼 수 있게 됐다거나?!
내 되물음에 페이비는 눈을 크게 뜨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환희는 내가 아르마디의 사도임을 확신하게 되며 주어진 것이었다.
여기 있는 건방진 꼬맹이가 주신의 사도라면 그 꼬맹이가 성녀라 부르는 자신도 마냥 거짓된 게 아니란 희망을 얻었을 테니까.
허나 그녀의 얼굴에 피어있던 환희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입을 열려던 페이비는 다시금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더니 무릎 위에 고이 올려둔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당당하고 밝던 페이비 답지 않은 모습에 그녀가 무언가를 감추었음을 확신했지만 난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 대신 페이비의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게. 그러니까…”
페이비는 여러 가지 거짓말을 내뱉었다.
허나 거짓말을 해본 적이 많지 않은 페이비는 거짓말을 할 때에 티가 났다.
목소리가 떨리고. 눈동자를 피하고. 손을 둘 데를 모르고.
누가 보더라도 나 거짓말 하고 있소. 라고 생각할 법한 행동에 내가 몇 번이나 추궁하자 페이비는 한참을 침묵하다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를 냈다.
“…타리키의 사도에게 들었습니다.”
페이비가 내뱉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악신의 사도와 거래를 했다니!
<이거라면 저 녀석의 속에 어두운 마력이 자리 잡고 있던 것도 설명이 되는 구나.>
‘…그러게요.’
성녀라는 직함에 걸맞는 신성력을 지닌 페이비가 나크라드에게 납치를 당한 까닭은 그녀의 속에 어둠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우리는 그 이유를 추측하지 못했지만 이런다면 말이 된다.
그녀가 나크라드와 거래를 했기에 그에 따라 어둠이 깃든 것이다.
<어찌할 테냐.>
‘뭐가요.’
<악신의 사도와 거래를 했다는 것은 심대한 죄악이다.>
할배는 목소리를 깐 채로 말을 이었다.
과거였다면 당장에 목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죄악이라거나. 한 번 영향을 받은 이는 돌아올 수 없다거나. 당장 페이비를 규탄해야 한다거나 하고 말이다.
그 단어 하나하나에는 깊은 증오가 담겨 있었다. 악신의 사도를 상대할 때보다 더한 증오가.
아마 그 말에 담긴 감정은 할배가 과거에 겪었던 여러 이들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나로썬 할배의 감정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악신과 거래를 한 게 뭐 어때서?
상황에 따라서 그 선택지가 효율적이라면 고를 수도 있는 거잖아?
나도 게임을 할 때 필요에 따라 악신의 사도와 거래를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악신의 사도 컨셉플을 잡고 대놓고 그 녀석을 도운 적도 있고. 안타깝게도 관련해서는 스토리가 없어서 재미없는 컨셉질로 끝나버렸지만.
어쨌든 나는 페이비를 규탄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만일 그게 효율적이라면 나도 기꺼이 악신의 사도와 거래를 할 테니까. 그게 게이머란 족속인 걸.
오히려 내게 충격으로 다가온 부분은 다른 것이었다.
페이비가 저렇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나에 대한 충격.
앞서 말했지만 페이비는 성녀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지간해선 악신의 사도와 타협할 사람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 그녀가 마음속에 지녔던 흔들림이 그만큼 컸다는 거겠지.
나는 그런 것도 모르면서 페이비라면 괜찮을 거야 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던 거고.
하아. 진짜 한심해.
뭐가 소울 아카데미 고인물이냐?
이 세상은 게임을 배경으로한 현실이잖아.
좀 머릿속 망상에서 빠져 나와서 눈앞에 있는 걸 보라고 등신아.
나는 할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페이비에게 다가갔다.
페이비는 내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가 체념을 했다가 겁에 질려서는 눈을 꼭 감았다.
나는 양 팔을 벌려서는 그런 그녀를 껴안지… 못했다.
메스가키 스킬이 그런 마음씨 고와보이는 행동을 허락할 리 없잖아?
그 대신에 나는 침대 위에 오른 발을 올리고는 위에서 아래로 페이비를 내려다 보며 손으로 얄미운 웃음을 가렸다.
‘페이비. 제가 그걸 몰랐을 거라 생각하셨나요?’
“푸하핫. 개허접 성녀. 내가 그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악신의 사도에게 유혹당하는 바보멍청이다운 지능이네.”
키득거리는 웃음 속에서 페이비가 눈을 떴다.
멍한 그 눈동자에서는 놀랐다는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페이비. 누구나 흔들릴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어쩌겠어. 허접허접개허접 성녀인 걸? 네가 멍청한 건 당연한 거라고.”
“그건 무슨.”
‘당신께서 무슨 일을 하셨든 당신은 제게 성녀님이랍니다.’
“하아. 구제불능의 멍청이라 이해가 안 되나 보네.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 어찌되었든 간에 넌 허접 성녀니까.”
메스가키 스킬은 말을 끝내면서 페이비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쨌든 뜻은 정해진 거 같으니까 다행인가?!
다리 위에 팔을 올려둔 채 페이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녀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어.
응?
아니. 잠.
“흐아아앙!”
평소의 차분하고 고결한 모습은 어디로 날려먹은 건지. 그 나이대의 여고생마냥 오열하는 페이비의 모습에 나는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뭔데. 뭔데?! 왜 갑자기 우는 건데?!
내가 뭐 나쁜 말 한 거 아니잖아?!
뭘 했든 간에 나는 널 믿어준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우는 거야?!
<감동한 거겠지. 이 녀석은 규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쵸?! 제가 뭐 잘못한 거 아니죠?!’
난 또 내가 해선 안 될 말 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진짜.
설명을 듣고 속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할배가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용서할 생각인게냐? 교리를 저버리고 악신의 사도와 거래한 자를?>
‘네.’
메이스 속에 틀어박혀서 과거에 멈춰 있는 틀딱 할배랑은 다르게 MZ한 저는 페이비를 알거든요?
페이비는 한 번 흔들렸을지라도 다시 굳건한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페이비의 잘못을 규탄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솔직히 전 페이비가 저지른 잘못이 뭔지도 모르겠거든요.
뭐 어때요? 필요하다면 악신하고도 거래할 수 있는 거지.
<…그것은 그대의 뜻이냐. 아니면 그대를 믿는 자의 뜻이냐.>
한 치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할배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방금 내가 한 말이 허접 주신의 헛소리냐 아니면 내 말이냐를 묻는 거겠지.
할배. 바보야? 그건 이미 정해져 있잖아.
‘제 뜻이 아르마디의 뜻이에요.’
허접하고 무능한 주제에 쪼잔하기는 더럽게 쪼잔한 그 변태 주신이라면 제가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한 순간 제지를 가했겠죠.
어떤 식으로든 간에.
그러니까 그 허접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하는 행동에 동의를 했다는 것!
제 뜻이 허접 주신의 뜻이라는 거에요!
이해가 되시나요?!
내가 당당하게 그리 이야기를 하자 할배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웃음을 흘렸다.
<크흐. 그래. 그렇지. 여아 너는 여태까지 전무했던 아르마디의 사도니까. 나 같은 일개 신도가 감히 그 뜻을 비난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었구나.>
‘할아버지?’
<하. 오랫 동안 잠이나 쳐자다 보니 나도 교회의 꼴통들과 다를 바가 없어졌군. 푸하핫. 실로 한심한 일이야. 너무도 한심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눈앞에서는 페이비가 눈이 띵띵 부어오를 정도로 오열을 하고 있고 머릿 속에서는 할배가 껄껄대며 웃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나는 어찌할 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얼빠 여우를 내쫓지 말 걸 그랬나. 걔라도 구경하고 있으면 마음의 안식 정도는 됐을 텐데.
*
얼마 시간이 지나서 간신히 울음을 그친 페이비는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을 씻고서 나왔다.
눈은 벌겋게 물들어 있는 게 평소의 페이비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아. 이거 스크린 샷 찍어서 ‘고상한 성녀님의 망가진 얼굴 ’같은 제목으로 커뮤니티에 올리면 분명 반응이 개 쩔었을 텐데.
분명 성녀단이 겁나게 발작했겠지. 이런 사진으로 주작해서 성녀님을 모욕하려 하다니! 같은 식으로.
걔네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는 보람이 있었는데 말야.
물론 소울 아카데미가 고일대로 고여버린 망겜이 되고서 부턴 다 사라져 버렸지만.
“ㅈ…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얼마나 우렁차게 울어댔던 것인지 페이비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괜찮아요. 페이비. 그럴 수도 있죠.’
“푸하하핫. 개허접 다운 유쾌하고 못난 얼굴이네. 완전 웃겨. 만날 그러고 다니면 안 돼?”
“으으으…”
자기가 생각해도 추했다는 생각이 드는 지 페이비의 얼굴일 벌겋게 물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놀리면 터질 것 같네.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성녀님의 얼굴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걸 볼 수 있다니.
이건 좀 즐겁네.
순간 좀 더 놀려먹어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지만 그를 억지로 참아냈다.
그랬다가 다시 울려버리면 진짜 감당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말야. 아직 페이비한테 해야 하는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다고!
일단은 페이비 너는 훗날 성녀가 될 재목이 맞으니까 무너지지 말고 노력하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하고!
교회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겠지만 힘을 기를 때 까지는 참아 달란 이야기도 해야 하고!
그리고 또 페이비의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도 해야 하고.
생각해보니까 할 말이 엄청 많네.
이런 상황에서 페이비를 울렸다가는 밤 새도 이야기를 못 끝낼 걸.
그러니까 놀리는 건 나중으로 하자.
‘페이비…’
“야. 허접 성녀.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야. 잘 들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