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야 한 편에 노란 양복을 입은 선배와 엄청난 숫자의 경비들이 들어왔다.
소장실로 가는 길목은 척 봐도 엄청난 양의 경비들이 즐비했다.
나는 선배와 함께 소장실과 이어지는 통로 앞까지 오는 데 성공했지만, 여기서 소장실로 잠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소근소근 작게 목소리를 내서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이거 통과할 수 있는 거 맞아요?”
“….”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선배는 이번만큼은 힘든지 입을 다물고 고민 중이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만약 선배 없이 혼자서 여기까지 와야 했다?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보지도 않고 경비의 위치를 파악하는 능력도 기묘했고, 주머니에서 나오는 도구들도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으뜸은 선배가 ‘왓슨’이라고 부르는 램프였다.
물론 묘하게 불길한 인상을 주는 데다가 이상하게 피 냄새가 나서 싫어하는 오브젝트였다.
그리고 왠지 ‘왓슨’이라는 그림자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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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이었지만 ‘투명화’라니 그야말로 마법 같은 도구였다.
“선배, 왜 왓슨을 다시 안 쓰는 거예요? 투명화 한 번 더 쓰면 아슬아슬해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왓슨은 이번 의뢰에서 더 이상 쓸 수 없어.”
“네?”
“왓슨은 친절한데, 좀 함정이 있거든. 3번을 넘기면 미라처럼 말라 죽을걸?”
선배는 자기 외눈 안경을 툭툭 두들기면서 말했다.
지금 선배의 안색을 보니 좀 창백한 것이 피가 부족해 보이긴 했는데, 왓슨이 피를 빨아가고 있던 건가?
생각해 보니 선배는 왓슨에게 3번의 부탁을 했다.
공간을 넘어서 와달라고 한번.
공간 이동을 막는 원인을 알려달라고 한번.
경비초소를 지날 때 투명화로 한번.
선배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왓슨은 상당히 위험한 오브젝트인 거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해요?”
“그건 생각 중이지.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나지 않겠어?”
상당히 불편한 자세로 숨어 있는데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선배의 모습을 보면 좀 대단하기는 했다.
그나저나 회색 사신은 어디 갔지? 얼마 전까지 졸졸 따라왔던 거 같은데.
***
손에 들린 무거운 가스램프의 무게를 느끼며, 소장실 입구를 막듯이 있는 부소장실을 바라보았다.
기회는 분명히 온다.
나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위기가 기회라고 들 하듯이, 지금 기다리는 기회는 반대로 위기이기도 했다.
숨어서 계속 부소장실을 바라보던 중, 기다리던 타이밍이 온 것이 느껴졌다.
부소장실에서부터 소란스러움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후배, 준비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어수선하게 움직이던 부소장실의 사람들은 일제히 그곳에서 빠져나와 어떤 곳을 향해서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뛰어!”
아무도 없는 부소장실 앞을 지나, 그대로 소장실로 향하는 복도를 질주했다.
“선배?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후배는 갑자기 텅텅 비어 버린 복도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영문을 모르는 표정에 웃으면서 답했다.
“마지막 기회가 온 거야!”
***
중앙 연구소의 부소장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설마 회색 사신은 벌써 연구소를 벗어났는가?
아무리 직원들을 순찰시켜도, 유인을 해 봐도 회색 사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벌써 3일이 넘게 지나버렸다.
영체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해서 작은 것 하나 놓치지 말라고 했지만, 아직도 회색 사신의 위치는 오리무중이었다.
“부소장님, 회색 사신이 격리실 내부에 나타났습니다!”
회색 사신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 대기 중이던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탈출을 시작했다.
이미 계획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모든 준비는 되어 있었기에 탈출은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다른 곳에서 대기 중인 연구원들도 가장 가까운 루트로 탈출을 시작했을 것이다.
현재 회색 사신이 발견된 곳은 원래 사신에게 할당된 격리실 내부였기에 탈출 루트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부소장실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소장실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30년째, 소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
30년 전, 서울 광장에서 가족들만 남기고 죽어버린 남자.
그리고 오브젝트가 되어서까지 연구를 계속하는 그 무심한 남자를 생각하며 탈출 길을 나섰다.
***
나는 중앙 연구소 격리실 침대 위에 편히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탐정 일행과 같이 지내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내가 몰래 보고서를 훔쳐본 거지만.
딱 봐도 ‘엄청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악의 조직에 잠입한 탐정들!’ 같은 분위기인데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조사한 보고서 내용은 다른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사살되었다는 오브젝트의 은폐.
그것도 아귀라는 위험한 오브젝트를 사적으로 은닉.
연구소 내에서 사망한 사람을 이직 처리해서 통계 왜곡.
특히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들을 임시 직원으로 쓰면서 죽으면 기록 말소까지 하는 듯했다.
아마 탐정의 보고서가 공개된다면 중앙 연구소가 해체될 수도 있는 대사건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의로운 탐정들을 위해서 한 손 거들기로 마음먹었다.
탐정들이 고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귀’의 존재였다.
즉, 그 아귀를 직접 처리한다면 문제 대부분은 해결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탐정은 안전하게 탈출할 기회를 기다릴 수 있으니 이득.
나는 중앙 연구소가 망하면 유령 고양이랑 피아노 치는 도마뱀을 챙겨서 세희 연구소로 돌아갈 수 있으니 이득!
모두가 행복한 win-win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 연구소가 준비해 준 침대 위에 편하게 누워서 연구소 측에서 아귀를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연구소가 소란스러운 걸 보니 아귀를 곧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후배와 함께 복도를 가로질러, 그대로 소장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조용히 보고서를 끄적이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아니 오브젝트가 하나 있었다.
사람 형상의 오브젝트.
헥헥 숨을 몰아쉬며 소장실로 따라 들어온 후배는 소장실 문을 살며시 닫았다.
“선배, 설마 저 사람이 오브젝트인 건가요?”
“그래, 확실히 오브젝트야.”
외눈 안경에 비치는 저 남자는 확실히 오브젝트였다.
공식적으로 중앙 연구소의 소장은 30년간 공석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유에서였나?
[소장으로 있는 한, 연구소는 파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확실히 파괴할 수 없는 연구소라면 처치 곤란 오브젝트를 격리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일 것이다.
사실 서울 한복판에 연구소라니, 평범한 사설 연구소였다면 오브젝트 유출 사고가 두어 번 터지고 어쩔 수 없이 서울 외곽으로 쫓겨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연구소 자체가 오브젝트가 되어 버리니, 서울 한복판에서도 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던 거겠지.
“다른 오브젝트는 안 보이네. 그러면 역시 저 소장이 우리의 이동을 막는 거겠어.”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죠? 망치로 한번 내리쳐 볼까요?”
후배는 어느새 망치를 양손에 들고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돌아봤다.
아니 저런 커다란 슬레지해머는 어디서 난 거야?
“드디어 왔군. 드디어 왔어!”
갑작스레 들린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소장이 고개를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자네들은 필요한 것이 있어서 온 거겠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면 나도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 줌세.”
소장이라고 불리는 오브젝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은 정말 기뻐 보였는데, 그래서 도리어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전에 넌 누구지? 상대방의 이름도 모르는데 거래하고 싶지는 않아.”
“아 그전에 밝혀둘 것이 있군. 나는 그곳에 없다네. 자네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나는 들을 수가 없어. 그저 이 인형은 정해진 동작을 재생하고 있을 뿐이야.”
서로의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다.
일부러 그것을 연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군. 표정을 못 읽겠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래뿐이라네. 내 오른손에 자네의 지팡이를 쥐여 주면, 나는 자네들이 이 연구소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겠네.”
그리고 소장의 모습을 한 오브젝트는 행동을 멈췄다.
“어, 어떻게 해야 하죠?”
“모르겠군. 단서가 너무 없어. 여기서 거래하는 게 정답일지 아닐지.”
연구소 전체에 울리는 묵직한 진동음은 고민할 시간이 그리 길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풀려난 아귀가 연구소를 박살 내며 난동을 부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럴 땐 마음 가는 데로 하는 게 정답이지.”
이런 때의 고민은 하면 할수록 손해니까 말이야.
***
뚜방뚜방.
나는 유령화를 한 채, 혼란에 빠진 중앙 연구소 복도를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갔다.
연구소 내부는 비상등이 깜빡깜빡 점멸하고, 갈 길을 잃은 직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 비명 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 비명의 원인은 빠르게 만날 수 있었다.
오래된 신문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오브젝트.
사실상 한국에서 오브젝트의 존재가 대중에게 공개되도록 만든 존재였다.
그런 유명한 오브젝트가 상대라도 꽤 자신이 있었다.
상대의 약점을 볼 수 있고, 물리적 피해에 면역이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아귀를 직접 대면하자마자 거품처럼 사그라졌다.
대체로 능력이 터무니없는 오브젝트에게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내 눈앞의 아귀에게서는 강철탑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거 죽일 수 있는 오브젝트는 맞는 건가?
무슨 깡으로 자신만만하게 아귀를 처리하고 도마뱀과 고양이를 데려갈 생각을 했던 걸까….
죽이는 조건이 쉬우면 좀 해 볼 만할 텐데, 그 조건마저 나를 배신했다.
[시작의 오브젝트가 만든 돌]
아, 이건 죽일 수 없는 녀석이구나.
도대체 시작의 오브젝트가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