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1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페이비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을 내놓을 것처럼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위로해 준 나에게 폐를 끼친 것이 무척이나 죄스러운 듯 했다.
“돌아가는 길에 만난 아이에게 최대한 해명을 해보았습니다만, 제 말재주가 부족했나 봅니다.”
그러니까 이 소문이 퍼진 경위는 이런 셈이었다.
내 방에서 엉엉 우는 바람에 얼굴이 엉망이 된 페이비가 돌아가는 길에 자신과 친한 아이와 만났다.
그 아이는 페이비의 얼굴을 보고는 무슨 일이 있었다 생각을 했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퍼트렸다.
소문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현재 이 아카데미에서 어떤 의미로든 유명한 두 사람인 나와 페이비이다 보니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고 이제는 한 두 사람이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당사자라 더럽게 억울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입장을 바꾸어 보면 재밌는 소문이긴 해.
능력은 있지만 성격은 더러운 개썅년이 아카데미에서 제일 착하고 고결한 사람을 괴롭히고 울렸다?
그것도 아무도 볼 수 없는 밀실에서?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소재잖아.
내용 자체도 자극적이고 선악의 여지도 명확한데다 변주의 여지도 넘쳐나지.
나도 아무 연관이 없는 상태에서 저런 소문을 들었다면 오. 꿀잼. 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예전에 여러 가십거리를 읽으면서 그랬었으니까.
그치만 저 소문의 당사자는 나지.
하아. 빌어먹을.
“그래서 이런 식으로 수습을 하러 왔어요.”
결국 지금 사람들 사이에 퍼진 소문의 근간은 내가 페이비를 괴롭혔다는 것에 기원한다.
그러니 나와 페이비가 사이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 근간을 깨트릴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 페이비의 이야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이 이 정도로 진정될 것 같진 않지만.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내 곤란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페이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페이비. 전 신경 안 써요.’
“푸핫. 허~접 성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저기 있는 허접한 좆밥 들러리들이 짖어댄다고 내가 그걸 신경 쓸 거 같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앉아요. 같이 식사나 하죠.’
“앉아. 내가 특별히 개허접 울보인 너랑 밥을 먹어 줄 테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흐응. 이렇게 되면 페이비랑 같이 먹을 메뉴를 하나 더 시킬까.
안 그래도 이 스테이크 하나 만으로 부족하단 느낌이었으니까 잘 됐네.
이상하게 요즘 들어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찬다니까. 할배랑 연습모드에서 훈련을 시작하고서부터 계속 이래.
평소에 내가 움직이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다고 살이 찔 리는 없지만.
혹시 이거 키가 크려는 징조 아닐까?!
왜 성장기가 되면 식욕이 왕성해진다고 하잖아!
그래. 분명 그런 걸 거야.
그래야만 해!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먹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먹어두는 게 맞아.
그래야 더욱 더 활발하게 성장을 할 수 있을 거 아냐.
언제까지 지금처럼 짜리몽땅한 꼬맹이로 살아갈 순 없다고!
나도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 볼 거야! 페이비나 조이처럼!
“저기.”
메뉴판을 펼치고 눈을 붉히고 있으려니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내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기에 난 고개를 들기도 전에 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조이?’
“뭐야. 얼빵 영애.”
거기에는 부채로 살짝 벌게진 얼굴을 감추고 있는 조이가 있었다.
*
오늘 아침 다른 영애에게 페이비와 루시에 관한 소문을 들은 조이는 어이가 없어서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루시가 페이비를 괴롭힐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페이비를 구하기 위해 바니걸 의상을 입을 정도로 페이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페이비를 괴롭혀서 눈물 흘리게 만든단 말인가!
애초에 페이비가 조금 괴롭힌 당한다고 눈물을 흘릴 사람이기는 한가?
그녀는 성녀로써 온갖 험한 곳을 돌아다니면서도 눈물 한 방울 떨어트리지 않았던 사람인데?
차라리 페이비가 루시를 만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지.
대충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헛소문임을 확신한 조이는 자기 주변에 있는 영애들에게 저런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 단언해 두었다.
허나 루시와 페이비에 관한 소문은 아카데미 내부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야기가 자극적이고 등장인물도 유명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사교계에서 자주 마주했던 조이는 헛소문을 읊어대는 사람들을 보고서 수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려나.
알른 영애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페이비는 아닐 거란 말이지.
자길 도와 준 사람한테 폐를 끼쳤다는 사실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할 게 분명해.
그러니까 페이비를 위해서라도 이 소문을 해소시켜야 하는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다른 영애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가며 그를 고민하던 조이는 루시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페이비를 보고서 발을 멈췄다.
왜 저 두 사람이?
대놓고 미안한 티를 내고 있는 페이비의 표정과 한심하다는 듯 상대를 쳐다보는 루시의 표정을 확인한 조이는 저 상황을 이해했다.
아. 저런 식으로 서로 사이가 좋다는 걸 드러내려는 거구나.
그래. 그러면 소문이 악화되는 걸 막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지.
욕할 사람들은 여전히 알른 영애를 향해 나쁜 이야기를 하겠지만 누군가는 ‘두 사람 사이 좋던데?’라는 이야기를 할 테니까.
좋은 판단이야.
조이는 이성적으로 그렇게 판단했지만 그녀의 감성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치만 알른 영애와 처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는 건 좀 그런데?
저 자리는 내 거여야 한다고! 내가 예전부터 노리고 있었단 말이야!
페이비! 아무리 내 친구인 너라지만 이걸 뺏아가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조이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넓으면서도 얕다.
파트란 공작 가문의 영애라는 지위를 달고 있으니 만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옆자리를 노리지만 정작 그 중에 조이라는 이름을 신경 쓰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개의 영애들이 노리는 것은 파트란 영애의 친구다. 조이의 친구가 아니라.
조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녀는 주변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갈 정도로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조이는 그들을 진정한 친구라 생각하지 않았다.
파트란 영애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 시든 꽃잎처럼 흩어져 자신을 외로운 꽃줄기로 만들 이들을 어찌 친구라 부를까.
그녀에게 있어 여태까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아서나 페이비처럼 그녀의 지위를 신경 쓰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최근 그 반열에 추가하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생겼다.
루시 알른.
두 번이나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사람.
트라우마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
공작 영애라는 지위를 가진 그녀를 앞에 두고도 자기 할 말을 망설이지 않는 어찌 보면 무례하고 심술궂은 사람.
그렇지만 그 속마음 만큼은 누구보다 사려깊고 고결한 사람.
조이는 그런 루시를 친구라 부르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과 함께 놀며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를 위한 계획도 자신의 오라버니와 함께 짜두었다.
우선 매일 같이 혼자서 식사를 하는 루시에게 함께 식사를 하겠느냐고 묻는다.
분명 루시는 투덜거리면서 ‘혼자서는 밥도 못 먹는 거야?’ 라던가 ‘개허접 얼빵 영애답네.’ 같은 말을 하겠지만 그녀를 쫓아내지는 않으리라.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면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식사 친구가 되고.
말을 트다가 함께 바깥에 나갈 약속을 하고.
서로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얼마 남지 않은 방학 때 우리 영지에 놀러오라는 이야기를 해서 파자마 파티를 하고!
성별이 다른데다 정치적인 문제도 있어서 친구다운 행동을 하기 어려운 아서나,
평소 일정이 너무도 바빠 놀러 다닐 수가 없는 페이비와는 달리 루시에게는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망나니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녀다. 바란다면 얼마든 여유를 부릴 수 있겠지.
조금 바꾸어서 말을 하자면 루시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조이가 여러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을 채우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래서 조이는 루시와 함께 있을 때면 함께 식사를 하자는 말을 꺼내고자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계획을 시작시키기 위해서.
다만 여태까지는 눈치를 보고만 있었다.
상담을 해주었던 조이의 오라버니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거절당하면 어떡하냐고!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야 해? 밥맛 떨어지게?’ 같은 이야기라도 들으면 마음이 산산조각 날 것 같단 말야!
외모와 행동에 비해 마음이 소심한 조이는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자신이 없어서 루시가 먼저 같이 밥먹자는 이야기를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조이의 계획 중 첫 번째 단계는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페이비가 루시와 처음으로 함께 밥을 먹은 사람이라는 업적을 조이에게서 빼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페이비에게 그럴 의도가 없음을 조이도 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선한 의도만이 있음을 어찌 모를까.
그렇지만 조이의 입장에서 저게 부러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이가 마음속으로 상상만 하던 일을 페이비가 실현하려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떡하지?!
저러다간 페이비가 알른 영애를 빼앗아 갈 거야!
같이 밥을 먹다가, 놀러나간 후에, 친해져서 방학 때도 같이 놀다가, 1학년 2학기 때 돌아와서는 서로를 이름으로…
안 돼!
내가 먼저 알른 영애를 알았어!
내가 먼저 저 분과 친해졌다고!
내가 먼저 친구가 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단 말이야!
아무리 페이비여도 그걸 뺏길 수는 없어!
최악의 상상을 머릿 속에 품은 조이는 품 안에서 부채를 꺼내 들고는 주변 영애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페이비에게 이야기를 하러 가보겠다고.
그 속이야 어찌 되었건 겉모습만큼은 공작 영애 그 자체인 조이에게 제동을 걸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으니.
다른 영애들의 허락 하에 조이는 발을 움직였다.
충동적으로 발을 내딛은 조이였지만 정작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일단 저 쪽으로 가겠다 이야기를 했으니 가긴 해야 하는데. 저기에 가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냐! 이런 말을 꺼내면 괜히 분위기가 축 처질 거야.
고생이 많으시군요?
이것도 마찬가지!
모르는 체 해야 한다고! 조이 이 멍청아!
그러니까.
제일 좋은 말이 뭐가 있지?!…
고민을 하다가 어느새 그 옆에 도착한 조이는 페이비와 눈을 마주쳤다.
“저기.”
“조이?”
“뭐야. 얼빵 영애?”
일단 운을 띄워 놨으니까 뭔가, 뭔가 말을 꺼내야 하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그게에에…
“저도 함께 식사를 즐겨도 괜찮을까요? 두 분?”
결국 조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그 단어였다.
“물론이에요. 조이.”
“뭐야. 얼빵 영애. 이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거야? 하여간. 뭐해. 앉아. 바보처럼 서 있지 말고.”
그를 들은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조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다아아아아아!
조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옆에 앉으면서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