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게 생긴 구름 고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자, 금발 소녀는 자기 입에서 불길을 뿜어서 그 구름 고기를 태워버렸다.
처음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보다는 확연히 강력해진 불꽃에 휩쓸린 구름 고기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금발 소녀는 지쳐 보였고, 이런 상황에서 검은 요원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요원과 금발 소녀는 튼튼한 석벽에 등을 맞대고 버틸 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끊임없이 몰려드는 구름 고기들과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지쳐 보이는 금발 소녀와 검은 요원의 위쪽에는 붉은 사신이 구름 고기들과 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양팔을 좌우로 뻗고 빙글빙글 돌면, 불꽃도 같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을 불살랐다.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으려고 해도, 구름 고기가 일으킨 바람에 밀려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붉은 사신을 물어뜯지 못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폭력!
“붉은 사신이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꿈속에선 저를 함정에 빠뜨렸었는데, 이렇게나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요.”
검은 요원은 금발 소녀의 안색을 살피며, 가볍게 동의를 표현했다.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금발 소녀의 피부는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검은 요원은 소녀의 붉게 물든 피부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아가씨, 몸 상태는 괜찮습니까?”
검은 요원의 말에 살짝 투명하게 변한 손을 바라본 금발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오히려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금발 소녀는 더욱 활발한 움직임으로 달려드는 구름 고기들을 더욱 수월하게 태워버렸다.
그렇게 전투가 이어지는 도중, 금발 소녀의 시선이 마을의 입구 쪽에 못 박힌 것처럼 고정되었다.
“아가씨?”
“아저씨.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금발 소녀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안개 속에서 노란색 불빛이 아른아른하자, 금발 소녀가 느끼는 기분은 더욱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를 찢어버리고 회색의 피부를 가진 오브젝트가 공터에 도착했다.
무해해 보이는 외형이었지만 엄청난 존재감을 지닌 회색 사신이었다.
뚜방뚜방.
당당한 걸음걸이로 귀엽게 걸어 나온 회색 사신이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구름 고기들이 위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구름 고기들은 공포에 빠진 것처럼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리고 싸우고 있었지만, 구름 고기들의 신경은 전부 회색 사신을 향해 있었다.
“아가씨?”
공기를 짓누르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었지만, 검은 요원만은 여전한 태도로 금발 소녀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금발 소녀가 느끼는 것은 존재감이나 압박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감정이었다.
“아저씨, 왠지 기분이 이상해요.”
그리움.
친근함.
이런 종류의 기분이 몰아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리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 엄마?”
금발 소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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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엄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소녀의 입에서 미니 사신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엄마?
그 말을 듣고 보니 금발 소녀는 반쯤 미니 사신처럼 변해있었다.
아니지, 작은 소녀지만 나보다는 크니까 큰 사신이라고 해야 하나?
저번에 봤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예상할 수 있는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단순히 반 미니 사신으로 변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주황색 달이랑 뭔가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내가 심장을 넣어준 거랑 연관이 있는 거겠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주황색 달은 이미 반쯤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푸른 달은 꽤 오래 버텼던 것 같은데, 허약하네.
나는 손을 양옆으로 뻗어서, 미니 사신들을 불러냈다.
‘자, 저기 새로운 막내가 있어. 가서 도와줘!’
황금 사신들과 검은 사신들은 붉은 사신을 보더니 신나는 얼굴로 달려 나갔다.
푸른 사신들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마을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남색 사신은… 그저 잠을 자고 있나 보다.
오질 않네.
높은 하늘 위에 위치한 구름 고기들이었지만 검은 사신이 발리스타처럼 변해서 황금 사신들을 쏘아 보내자, 속수무책이었다.
구름 고기의 처리는 미니 사신들에게 맡겨두고 뚜방뚜방 걸어서 금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가서 바라보니 금발 소녀는 확실히 나보다 키가 컸다.
한 130cm쯤 되는 건가?
그나저나 신기하네, 인간이 미니 사신이 되어버렸어.
희미했던 연결도 마주 보고 있으니 점점 강해졌다.
금발 소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나를 껴안았다.
“아가씨?”
소녀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검은 요원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따뜻해.”
소녀의 작은 목소리와 함께 소녀의 몸속으로 내 장작이 천천히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미니 사신이면서 장작이 거의 없었던 소녀의 몸속에 장작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녀가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따뜻하고 행복해.”
그야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장작은 대부분 예린이에게서 온 거니까 그렇겠지.
뭔가 멍한 표정으로 나에게서 떨어진 금발 소녀에게로 미니 사신들이 마구마구 달려들었다.
미니 사신들은 자신보다 커다란 동생이 생겨서 마냥 신나는 표정이었다.
미니 사신 고치처럼 변해버린 금발 소녀를 뒤로하고 주황색 달을 올려보았다.
<지하의 진주를 파괴하라.>
음?
생각보다 조건이 너무 단순했다.
검은 점액에 오염되어서 그런 건가?
이제 진주의 위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땅이 갈라지며 커다란 계단이 내 바로 앞에서 솟아올랐다.
주황색 불꽃으로 장식된 계단의 입구는 마치 주황색 달이 나를 인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강남구에 위치한 트리니티 제1 연구소.
그곳에 위치한 소장실에서 제1 연구소장은 진중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완벽한 계획이었다.
오브젝트에게 무력한 인류를 구해줄 최초의 물질, 진화액을 대량으로 구하기 위한 완벽한 계획!
하지만 TV에 비치는 장면을 보면, 그 계획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망가질 가능성이 엿보였다.
“어째서 구름 고기들이 세희 연구소를 습격한 거지?”
이번 계획의 핵심은 간단했다.
회색 사신의 완전한 배제.
즉, ‘회색 사신’의 개입을 막아야 했다.
제3 연구소장의 양산 계획은 회색 사신의 방해로 실패했다.
아마 회색 사신도 오브젝트이니만큼 인류의 유일한 대항책인 ‘진화액’을 꺼리는 거겠지.
그 뒤에 제3 연구소장은 회색 사신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고 했고, 실패해서 죽었다.
그래서 제1 연구소장은 회색 사신이 알아차리기 힘든 주황색 달을 목표로 계획을 실행했지만, 사태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대산에서 서식하던 구름 고기들이 세희 연구소를 습격해 버린 것이다.
실패해서는 안 되는 계획이었다.
제3 연구소장의 노트에 따르면 색을 가진 달은 총 7종.
‘진화액’ 양산을 위한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TV 화면과 드론이 보내오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연구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다행이군.”
회색 사신이 구름 고래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오대산으로 떠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TV에 찍힌 세희 연구소도, 직접 보낸 드론에 찍힌 세희 연구소도 지극히 평온했다.
오브젝트가 탈출한 연구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회색 사신을 수색하는 보안팀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자, 소장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소장실의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조금 전까지 세희 연구소를 비추던 TV 카메라는 하늘을 비췄다.
[세희 연구소에서 동쪽으로 아름다운 구름 고기의 강이 이어지는군요.]
[마치 은하수처럼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별처럼 반짝이는 빛을 머금은 구름 고기의 강을 보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감탄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왠지 구름 고기의 강이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이정표처럼 보였지만, 회색 사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별로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제1 연구소장이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황혼이 내려앉은 하늘이 창문을 통해서 보였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근처로 걸음을 옮겨서 아름다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혼색 하늘을 배경으로 구름 고기들이 날아다니는 맑은 하늘.
제1 연구소장은 구름 고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조금 불안하게 느껴졌다.
세희 연구소 문제도 해결되었고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속 한구석이 불편했다.
“나도 늙었나. 이상하게 불안하군.”
이유 없는 불안감에 연구소장은 커튼을 쳐서 하늘을 가려버렸다.
하지만 커튼으로 가려진 소장실 상공 위로 수많은 구름 고기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제1 연구소장이 여기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처럼.
***
찰박찰박.
매끄러운 돌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계단 위로 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국적인 모양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자, 양옆에 배치된 화로에서 저절로 불이 붙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갈 때마다 불꽃이 하나씩 붙었다.
계단을 내려서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신전.
지하에 만들어졌으면서도 밝은 빛이 천장에서 뿜어져 나왔고, 천장 위에는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그림이 붙어있었다.
제임스가 보여준 0번 유물 모자이크랑 비슷한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깨진 부분이 많아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터 중앙에는 완전히 박살 난 검은 사신의 석상이 있었다.
다리가 없고, 길쭉한 팔을 가진 이형의 존재.
하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서 표면이 다 벗겨지고, 머리와 양팔이 부서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검은 사신인지 알아보기 힘든 석상이었다.
다른 곳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는데, 왜 그림하고 석상만 이 모양이지?
석상을 지난 끝에 불이 꺼진 거대한 화로와 ‘진주’처럼 보이는 구체가 있었다.
그 구체를 보자 이상하게 검은 사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의 혀를 자르고, 온몸을 태워라.>
화로 근처에는 오래된 피가 묻은 단검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