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2
예법 교사가 본다면 박수를 칠 만큼 귀족적인 우아함을 뽐내며 식사를 하고 있는 조이와 그 옆에서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손을 움직이는 페이비를 보던 나는 입가에 웃음이 새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다행이야. 메스가키 스킬이 있어서.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분명 기분 나쁜 아저씨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예전부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다.
혼자서 대화 상대도 없이 밥 먹는 거 엄청 외롭단 말이야!
집에서라면 그럴 수 있어!
그치만 같은 수업을 듣는 애들이 주변에서 친구들과 하하호호 하는 한 가운데에서 혼자서 밥을 먹는 건 상대적 박탈감이 엄청나게 크다고!
적어도 난 그랬어!
할배랑 속으로 이것저것을 지껄일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토끼마냥 외로워서 죽어버렸을 거야!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식사를 한다는 꿈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소울 아카데미에서 누가 제일 좋으세요? 라고 물어보면 당연하다는 듯 답으로 튀어 나왔던 조이.
그리고 너무도 성능이 좋아서 여러 챌린지를 할 때 필수캐릭으로 들고 가야 해서 자연스레 애정이 생긴 페이비.
이 두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아. 두 사람이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느낌이야.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인가.
극락이 따로 없구나.
<호. 잘 됐구나.>
‘그러게요. 두 사람이 저랑 같이 밥을 먹어 주다니. 너무 행복해요.’
<…음.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야기한 거였다만 행복하다면 된 거겠지.>
‘정치적인 의미요?’
할배의 말을 듣고서 생각을 해보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두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꿈만 같아서 도저히 깨고 싶지 않은 환상에 매몰된 상태였지만 정신을 차리니 쉽게 답이 나왔거든.
조이는 페이비와 친한 친구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공인된 사실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친구로 지내왔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내가 페이비를 괴롭혔다면 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사람은 조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조이도 나랑 가까운 축이고, 나한테 입은 은혜도 있으니만큼 강하게 나오지는 못하겠지.
그렇지만 내가 진짜로 페이비를 괴롭혔다면 이 옆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조이가 얼빵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니까.
즉, 조이가 자처해서 우리 곁에 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파트란 공작 가문의 영애인 조이가 보증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정리해서 할배에게 이야기해 주었더니 할배가 웃음을 흘렸다.
<호오. 조금은 견식이 늘었구나.>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할배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배우게 된 거니까 말이야.
자연스레 할배의 칭찬을 하자 할배가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조이도 이걸 의도한 거겠죠?’
<그렇지 않겠느냐. 저 녀석이 얼빵하긴 해도 공작 가문의 영애니까.>
‘대단하네요.’
만날 얼빵하고 허술한 모습만 보다가 공작 영애다운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감탄이 샜다.
그치. 귀족다운 지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나와는 달리 조이는 공작 가문에서 태어나 영애로 키워진 사람.
사교계에서도 여러 영애들의 중심에 서는 사람이 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했을 리가 없다.
‘고맙기도 하고요.’
조이가 직접 발을 움직여 준 덕분에 나에 관해 퍼진 안 좋은 소문은 상당수 사그라들리라.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져서 아카데미 내에 별 영향력이 없는 나와는 달리 조이는 여전히 수많은 영애들의 중심이다.
그런 조이가 대놓고 소문을 부정하는 데 상황파악을 못하고 입을 나불거려 봐라.
여러 무서운 영애들한테 린치를 당할 걸. 저번에 내가 보건실 앞에서 당했던 것처럼.
나야 꿀릴 게 없으니까 무력으로 돌파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나갔다가 어떤 험한 꼴을 당할 줄 알고.
내가 게임에서 본 대로라면 귀족가 영애들의 괴롭힘은 무척이나 음습하거든.
‘나중에 뭐라도 선물해줘야겠어요.’
내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고맙다는 말은 못하지만 물건을 줄 수 있거든?
그러니까 말 대신 물건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무뚝뚝한 남자가 된 것 같네. 마! 오다 주웠다! 같은 느낌이잖아.
안 그래도 방학 때에 한 번 경매장 쪽에도 들려야 하니까.
그 때 조이한테 줄 선물을 사자.
그러고 보면 살 게 한 두 개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선물 줘야 할 사람들이 꽤 되지 않던가.
칼한테도 하나 줘야 하고,
아서한테도 하나 주기로 마음먹었고,
걱정시킨 게 하도 많아서 베네딕한테도 뭐 하나 줘야 되고,
알른 가문의 기사단에도 뿌려야 하고.
가만 생각을 하고 있자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거기에 내가 쓸 것까지 생각하면 돈이 좀. 아니 상당히 많이 필요하겠는데.
“알른 영애.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요?”
그 때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조이가 말을 걸어왔다.
무뚝뚝한 눈빛 사이로 보이는 걱정에 머릿속에 있던 여러 가지 생각이 사르르 녹는 게 느껴졌다.
고민은 나중에 해도 돼.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내일이면 또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할 게 뻔한데 쓸데 없는 걱정에 이 즐거운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 얼빵 영애는 밥 먹을 때도 얼빵하게 먹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야.”
“…제 어디가 얼빵하단 거죠? 전 예식에 따라 식사를 하고 있었을 텐데요.”
‘그러게요. 어디가 얼빵한 걸까요.’
“그것도 몰라? 푸하핫. 그렇게 우둔하니까 얼빵 영애라고 부르는 거야. 이 얼빵아.”
“그러니까 어디가 문제라는 건가요?!”
조이는 자신이 얼빵하다는 이야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는 내 음흉한 마음을 자극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던 나머지 조이를 놀리고 싶단 마음이 샘솟았으니까.
“스스로 알아 볼 노력도 안 하는 거야?♡ 응석받이 영애♡ 언제까지 마마 품에서 살려고 그러는 거야?♡ 완전 한심해♡”
“저는 그런 게!…”
“푸핫.”
조이의 얼빵한 모습에 여태까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내던 페이비조차 버티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조이가 눈을 치켜떴지만 이미 페이비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 웃음을 참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페이비가 쿡쿡거리는 소리가 심기에 거슬렸던 걸까? 조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제 완벽한 예법의 어디가 문제란 거냐고요!”
“무능하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뭐가 문젠지 스스로 하도록 얼빠앙 영애♡”
“으으으…”
입술을 꾹 깨문 채 소리를 내다 뒤늦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조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샜다.
이건 분명 메스가키 스킬 때문일 거야.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남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일 리 없으니까.
*
페이비를 괴롭혔다는 소문 덕분에 조이, 페이비 두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된 나는 한층 유해진 기분으로 교무실 쪽으로 향했다.
아. 지금도 조이가 화내는 걸 떠올리면 너무 즐거워.
소문을 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사의 인사를 전해둘게.
물론 그건 그거고 용서는 하지 않을 거야.
악의를 담아 퍼트린 소문을 용서할 리가 없잖아?
내 손에 잡히는 순간 메스가키의 진심 매도 코스가 뭔지 알게 해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어떤 식으로 갈궈주면 좋아하려나를 생각하며 걷고 있으려니 어느새 전투학 교수들이 머무는 교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지난 번 페이비와 이야기를 하면서 들은 내용 때문이었다.
나크라드와 관계된 소문. 정보를 알려주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녀석은 원하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을 빌미로 아카데미의 학생들 여럿과 거래를 한 후 그 안에 어둠을 심어두었을 것이다.
페이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분명 그건 후일에 안 좋은 쪽으로 활용될 것이 분명하니 미리 그 어둠을 제거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건 원래 페이비가 직접 이야기를 하는 편이 제일 좋기는 한데 지금 정신적으로 불안한 애한테 네 속에 악신의 마력이 깃들어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순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움직여야지.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문을 열고서 안으로 발을 디디기 무섭게 옆에서 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칼?’
“야. 허접.”
“예.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제가…’
“내가 여기에 올 걸 어떻게 알고 있었어?”
“별 것 아닙니다. 복도에서 걸어오는 아가씨의 기척이 느껴졌거든요.”
그러니까 일하던 와중에 그걸 감지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거야?
쓰잘데기 없이 대단한 기술이네.
지금의 나로써는 엄두도 내지 못할 기행에 감탄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사용자가 칼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좀…
“기분 나빠.”
그도 그럴 게 얘 자기 기술로 내 행적을 추적한다거나 할 것 같은 걸. 기사로써 주인의 주변에 머물러야 한다는 같잖은 변명을 하면서.
메스가키 스킬로도 왜곡되지 않은 내 진심어린 혐오를 받은 칼은 세상이 무너진 듯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충격을 받은 표정에서 풀이 죽은 댕댕이가 보이는 듯 했지만 난 속지 않았다.
나중에 저거 가지고 뭔 짓거리 했냐고 꼭 물어 봐야지. 분명 쓰잘데기 없는 데에 써먹었을 거야.
그렇게 칼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나는 교무실 한 가운데에 있는 안톤에게로 다가갔다.
지난 번 현장학습이 끝난 후부터 나를 좋게 봐주고 있는 안톤은 웃음과 함께 나를 맞이해줬다.
“무슨 일입니까. 알른 영애?”
‘말씀 드릴 게 있어서요.’
“당연히 말 할 게 있으니까 온 거지. 좆밥 교수.”
나는 아카데미에 퍼져 있던 소문과 나크라드에 대한 내용을 안톤에게 설명해 주었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망상 같은 이야기였지만 안톤은 내 말을 귀담아서 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메신저가 나였으니까!
아카데미 거리를 습격한 악신의 사도를 단독으로 격퇴했으며, 이후 페이비를 향한 사도의 개짓거리를 막아내기도 한 게 나다.
악신의 사도를 상대한 실적이 있으니 말을 하는 것에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과연. 아카데미 학생들의 안에 악신의 사도가 심어 놓은 마력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정확해요. 그러니까…’
“좆밥 교수치곤 이해가 빠르네. 정확해. 멍청한 들러리들은 바보 짓을 저질러 놓고도 모르고 있을 테니 전수 조사를 해야 해.”
나크라드는 어둠의 악신을 섬기는 자이니 그가 심어 놓은 마력도 어둠의 악신이 지닌 특성을 따른다. 음습해서 쉬이 찾아내기 어렵다는 소리다.
그러니만큼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어둠을 품은 자를 찾아내서 그를 정화시켜야 한다.
이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더니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영애님. 교회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죠.”
‘꼭 해주셔야 해요?’
“좆밥 교수. 한 귀로 듣고 흘리면 수염을 다 뽑아 버릴 줄 알아.”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의 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좋아. 그럼 이걸로 아카데미 내부의 일은 대충 해결된 셈인가.
자신이 준비해두었던 게 박살이 나서 인상을 찡그릴 나크라드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 기말고사 때도 헛짓거리는 못 할 테니까 여유를 부릴 수 있겠다.
조이한테 같이 공부하자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