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4
칼은 처음부터 기말고사까지 남은 기간 안에 프레이가 루시를 다급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켄트 영애께서는 분명 역사에 남을 재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아마 머잖아 저 따위는 가볍게 쓰러트릴 사람이 되겠죠. 허나 그는 알른 영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레이는 천재다.
그녀의 아버지가 알려준 검법은 기초뿐이거늘 이외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재능만으로 보충해 대륙 제일의 유망주가 될 정도로.
허나 그건 그녀의 대적자도 마찬가지였다.
루시 알른도 천재다.
길어봐야 일 년 남짓할 시간 동안 수련을 거듭하는 것으로 프레이를 넘어설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지.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다. 그녀는 프레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수련을 거듭하는 사람이다.
압도적인 재능과 경이로운 정신력.
하나만 지니더라도 천재라 불릴 수 있을 터이거늘 탐욕스러운 루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거머쥐고 있었다.
그러니 한 달 동안 프레이가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두 사이의 격차는 좁아지기 어렵다. 유지나 되면 다행이지.
‘허나 전투의 승리라는 것이 재능과 실력만으로 정해지는 건 아니죠.’
칼은 제언했다.
정공법으로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그만이라고.
‘알른 영애께서는 예전에 비해 성격이 많이 유해지긴 하셨습니다마는 그렇다고 예전의 성격을 모두 잃어버리신 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알른 영애께서는 무척 순진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순진?’
‘네. 저와 켄트 영애의 작전을 다 알고서도 어울려 줄만큼 순진하시죠.’
루시와 저만치 먼 곳에 있을 듯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프레이였지만 칼은 그 이상 설명을 하는 대신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루시는 다른 사람들을 도발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자기가 도발당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하다고.
그러니 루시의 앞에 서서 그녀를 모욕하면 거기에 어울려 줄 것이라고.
별 생각 없이 칼이 시키는 대로 루시를 도발한 프레이는 칼의 이야기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 누가 보더라도 도발을 당한 루시의 표정은 곱지 못했으니까.
*
허접?
겁쟁이?
푸하핫.
내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
프레이의 입에서 나온 무미건조한 어투의 도발을 들은 나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허접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남의 입으로 듣게 될 줄이야!
이런 생각을 프레이가 했을 리는 없고 칼의 작전이려나? 내 감정을 뒤흔들어서 방패를 내리고 달려들게 만들 생각이겠지.
방패 뒤에 숨어서 지구전으로 끌고 가면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변수를 만들려는 거야.
근데 있잖아. 너무 노골적이지 않냐?
이런 작전을 쓰려면 의도를 숨기고 내 감정을 살살 긁어대야지.
저렇게 무감정한 얼굴로 허접허접거리면 모르는 척 해주기도 어렵잖아.
슬쩍 보조 교사 역을 하고 있는 칼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 너도 프레이가 저런 식으로 도발 할 줄은 몰랐구나?
하하. 그러게 리허설을 해봤어야지 멍청아.
<어떡할 테냐?>
‘흐음.’
까놓고 말해서 저 도발을 무시하고 방패를 앞으로 내밀면 난 프레이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요 한 달 동안 프레이가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봐야 내 방패를 뚫을 정도로 강해진 건 아니니까.
머잖아 내 도발에 넘어와서 실수를 저지르게 될 거고 그 순간 승부가 결정나겠지.
그렇지만 말이야. 왠지 자존심이 상해.
난 방패가 없더라도 프레이를 박살낼 수 있는데 방패 뒤에 숨기만 하는 겁쟁이라고 그러다니.
아직은 있는 거라고는 재능뿐인 허접 검사 주제에.
‘좀 놀아 줄까요?’
나와 프레이 사이의 격차를 생각해보면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해서 질 것 같진 않은데.
한 번 주제를 알려줘야…
<여아야. 축복에 잡아먹히고 있는 듯 하다만?>
‘…핫?!’
할배의 이야기를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
나 왜 방금 전까지 상대의 의도에 놀아나 줄 생각을 하고 있었지?!
프레이가 지금 나보다 약하긴 하지만 방심해도 괜찮은 상대는 아닌데?!
저 녀석은 자칫 잘못하면 충분히 격차를 뒤엎을 만한 잠재력을 지닌 사람이니까.
우와아. 메스가키 스킬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는 이런 것도 있었던 거야?!
여태까지 남한테 도발만 하고 다녀서 내가 도발 당했을 때 이렇게 되는 줄은 몰랐어!
하아. 이 스킬은 어째 까면 깔수록 디메리트가 늘어나기만 하냐. 단점말고 장점을 늘리라고! 장점을!
그리고 말야! 얼빠여우의 축복! 일 안 하냐?!
정신 디메리트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스킬이 이걸 못 막아주면 어쩌자는 거야?!
네가 너 하나 얻으려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치욕을 이 악물고 견디면서 바니걸까지 입었는데 왜 일을 안 하냐 이 말이야!
설마 메스가키 스킬의 디메리트를 막아서 이 정도 인거야?!
말도 안 돼!
이게 개허접 얼빠 여우가 준 축복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능은 확실하다고.
게임 속에선 어지간한 정신 계열 디버프를 다 막아줄 정도였던 이 축복이 제 역할을 못할 수준으로 메스가키 스킬의 디메리트가 강한 거야?!
메스가키 스킬 너무 쓰레기잖아!
이거 만든 인간 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밸런스를 생각하라고! 돈 주고 파는 게임에 이딴 괴상한 스킬을 집어넣으면…
아 이거 모드였지. 그래. 모드면 밸런스가 개판인 게 보통이긴 해.
근데 보통은 좋은 쪽만 개판으로 만드는 데 이건 왜 안 좋은 쪽도 같이 개판인 걸까.
<고민은 적당히 끊어라. 네 앞에 적이 있잖느냐.>
‘음. 그쵸.’
이 이상 딴 생각을 하는 건 프레이한테도 실례다.
어차피 고민을 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니 지금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나중에 정신 계열 스킬을 몇 개 더 얻어두면 해결되겠지.
…해결 되겠지? 그치?
“허접 겁쟁이. 무서워서 못 와?”
메스가키 스킬의 새 디메리트를 알고 나니 머릿속에 열이 오르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야. 이건 나중에 확실히 문제가 되겠네.
지금 눈치를 채서 망정이지 후일 실전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
프레이한테 감사해야겠어.
“그러는 너도 맞는 게 무서워서 못 다가오잖아?♡ 쫄보 주제에 누구한테 겁쟁이라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응. 나 쫄보 맞아. 너도 겁쟁이 맞고.”
그러니까 감사의 의미를 담아서 프레이한테 어울려주도록 하자.
내 발로 불리한 전장으로 향하는 거지만 큰 도움을 줬는데 이 정도 보상은 줄 수 있잖아?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서 말하자면 절대 화가 나서 그러는 건 아니다?
나 지금 완전 침착하니까.
그냥 가볍게 프레이의 머리에 혹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을 뿐이야.
십호흡을 하고서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갈 게냐?>
‘네.’
<그래. 마음대로 하거라. 슬슬 싸움법의 개수를 늘릴 때도 되었으니.>
자아. 그럼 가볼까.
숨을 멈추고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일순에 프레이와 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다.
가만 서서 내가 달려드는 걸 보던 프레이는 물러서는 대신에 검을 휘둘렀다.
내가 발을 움직이는 데에 한 수를 썼으니만큼 프레이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은 그 어떤 견제도 없이 자유롭다.
너무도 선명해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궤적의 사이에 방패를 끼워 넣는다.
이건 억지다.
완벽을 기해 휘두른 검을 불안정한 자세에서 우악스레 끼워 넣은 방패로 막아내려는 거니까.
허나 압도적인 근력을 기반으로 한 방패술은 그 억지를 정답으로 만들어 낸다.
방패와 검이 부딪히고.
물러선 쪽은 검이었다.
티잉!
청명한 음색 너머에서 입술을 잘근 씹는 프레이의 얼굴이 보였다.
하핫! 그러게 누가 도발을 하래? 이 멍청아?
검이 튕겨남에 따라 생겨난 작은 틈.
나는 프레이의 머리를 노리고 메이스를 휘둘렀다.
프레이는 만만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돌격에 당황했을 법도 하거늘 그녀는 그 순간에도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
몸을 비틀어 메이스를 피하고,
튕겨난 자신의 검을 되돌린 후,
메이스를 휘두르느라 앞으로 나온 손목을 향해 그를 휘두른 것이다.
날카롭네.
어중간하게 대처하면 그대로 손목이 날라가겠지.
프레이가 보인 완벽한 기교에 대한 내 대답은 투박했다.
검을 휘두르려는 프레이를 어깨로 들이 받아서 날려버렸거든.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하다 내 돌진에 반응하지 못한 프레이는 그대로 튕겨나 바닥을 굴렀다.
“허접 검사♡ 약해빠진 주제에 입만 나불나불♡ 부끄럽지 않아?♡”
“전혀.”
분명 아플 터인데 프레이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시금 자세를 취했다.
“그러는 너는 이걸로 끝? 허접이네?”
“뭐야뭐야♡ 나한테 얻어 맞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허접♡에 약골♡인 것도 모자라서 개변태 마조♡이기까지 하다니. 역겨워라♡”
“…칫.”
푸하핫. 그러게 왜 메스가키한테 말로 싸움을 걸고 그래.
메스가키 스킬이 있는 한 난 말싸움에서 불패라고.
“덤비기나 해. 허접.”
“기다려♡ 살려달라고 빌게 만들어줄게♡”
자. 프레이의 머리에 혹을 만들어주러 가볼까.
*
도발을 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이끌어 낸 것까지는 예상대로.
덕분에 내게 유리한 전장을 만들어내는 건 성공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와 나 사이의 격차가 사라지는 건 아냐.
다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머리를 노리는 메이스를 피한 프레이는 연이어 날아든 방패에 복부를 얻어맞고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포기 안 해?♡ 진짜 피학성향이 있나봐♡”
루시는 강해.
본래 자신의 싸움법을 버리고 내 전장에 들어왔음에도 그래.
압도적인 신체 능력.
공격과 수비를 가리지 않고 방패를 다루는 능력.
같은 나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전투 논리.
어느 하나 모자란 게 없어.
그래서 점점 더 검을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 가.
매일 루시의 방패를 뚫기 위해서 검을 휘두를 때는 마음 속에 붉은 것들이 많았어.
그 방패가 너무 얄밉고 얄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걸 무작정 때리다가 루시의 노림수에 당해버렸고.
근데 지금은 달라.
분명 여전히 내 마음 속에는 붉은 색이 가득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색이 존재해.
근거리에서 루시와 치고 박고 싸우고 있자니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가.
이건… 뭘까?
잘은 모르겠지만.
나쁜 것 같진 않아.
프레이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방패를 한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피하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세상에는 단 둘. 루시와 자신만이 존재했다.
그 때문일까?
루시와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 프레이의 검은 점차 속도를 더했고.
그를 따라듯 그녀의 검이 지나가는 궤적에 흐릿하게나마 푸른색의 빛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