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6
저들이 나와 같은 아카데미의 1학년이라고?
루시와 프레이의 대련을 지켜보던 아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 저 두 사람의 대련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눈으로 따라잡는 것조차 벅찰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전투에는 모두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힘이 존재했으니까.
허나 저를 본다 하여 모두가 똑같은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저 저들의 재능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아서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아서는 저 둘과 같은 경지에 서 있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저 둘이 이른 경지를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아래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품위라는 단어를 잊고 입을 헤 벌린 채 대련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좀 더 세세한 것들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프레이의 검에 푸른색의 궤적이 깃들어 있었다.
저는 분명 오러거나 한없이 오러와 비슷한 무언가였다. 이 나이에 오러라니.
당장 무를 수련하는 이들 중 서른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도 오러에 대한 감을 잡지 못해 좌절하는 이들이 부지기수거늘.
프레이 저 자는 단순히 자신의 재능만으로 그 끝을 부여잡았다는 것인가.
경이롭군. 어느새에 저기까지 성장을 한 것이지?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무렵에도 프레이 켄트는 천재였다. 허나 저 정도로 경이로운 천재는 아니었다.
그 때의 그녀는 언제라도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의 무력을 지닌 자였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대체 어떤 수를 썼기에 저토록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거지?
놀라운 것은 프레이뿐만이 아니었다.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러를 담은 검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내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받아낸다는 표현은 옳지 못했다.
루시는 오러를 휘두르는 프레이를 되래 밀어 붙이고 있었다. 프레이가 필사를 담아 휘두르는 검은 루시의 방패 앞에서는 무력했던 것이다.
어찌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오러를 다루는 자와 다루지 않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는 거대하다.
한 사람의 기사가 백에 달하는 병사를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오러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루시가 뛰어난 무재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오러의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 정상이다.
허나 루시는 달랐다. 그녀는 오러를 모르면서도 오러를 다루는 자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평소 신성마법을 다루는 그녀이니 신성과 관련된 무언가로 격차를 줄이고 있을 터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얼핏 치열해 보이던 두 사람의 대결은 일순에 끝을 맺었다.
방패로 프레이의 검을 막아내며 파고든 루시가 프레이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바닥에 내던지기 직전에 멈춰 놓아준 것이었지만 루시가 봐주지 않고 움직였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명확했다.
전력을 다한 두 사람의 대련에서 승리한 것은 루시였다.
하하. 내가 이기고자 마음먹은 것이 저 괴물인가.
일 년 남짓한 시간 만에 저만한 경지에 도달한 천재를 넘어서야 한단 말이더냐.
아서는 여태까지 무언가를 못 하겠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여태까지 어떤 일이라도 바란다면 해내왔으니까. 그것이 몸을 쓰는 분야건 머리를 쓰는 분야건 간에.
허나 이번에 아서는 처음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
루시 알른이라는 벽이 너무도 높아 차마 따라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어렵군. 너무도 어려워.
자신이 벌인 게 별 것 아니라는 듯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괴물을 넘어서는 것이,
그리고 나서 본인이 본인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다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얻어내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두 사람의 대련이 끝나고 몇 분이 지났을 때 안톤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호명했다.
자칼 버로우와 메릴 베인즈.
어느 쪽이더라도 훗날 왕국을 이끌어갈 인재로 평가 받았던 이들이었다.
두 사람이 벌이는 대련은 분명 수준이 높았지만 아서도, 그를 구경하는 다른 이들도, 심지어는 대련을 하고 있는 당사자 두 사람도 성에 차지 않는단 기색을 보였다.
앞서 펼쳐진 루시와 프레이에 대련에 비하면 두 사람의 대련은 시시했으니까.
*
“알른 영애. 기말고사 성적이 나왔다네요.”
벌써?!
주말의 아침. 평소처럼 단련을 시작하기 전 몸을 풀고 있던 나는 조이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 성적이 나오는 데까지 시간이 더 걸리지 않던가?!
아카데미의 교수분들 왜 이렇게 힘을 내신 건가요. 좀 여유롭고 느긋하게 살란 말입니다.
왜 굳이 대부분의 학생에게 절망이 될 성적표를 일찍 주려 노력하시는 겁니까! 대체 왜!
“잠시 보러 갔다 오죠?”
조이의 권유에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성적표를 보고 싶지 않았다.
조졌을 게 분명하니까.
내가 대충 시험을 쳤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동안 노력했고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렀다.
진짜야! 내가 학생 시절에 이만큼 노력을 했다면 관악산 옆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을 걸?!
그치만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성적이 잘 나오는 건 아니잖아.
내가 추측하기로 이번 내 성적은 중간이거나 중간보다 약간 높은 수준일 거야.
중간고사에서 1등을 거두었던 사람이 받을 성적치고는 초라한 수준이지.
난 그 떨어진 점수를 굳이 구경하고 싶지 않아.
그걸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뭣보다 점수를 보러 가면 조이랑 아서가 나를 놀리려 들 게 분명한 걸!
난 굳이 자처해서 다른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단 말야!
<그래도 네가 노력해서 시험을 치렀으니 확인을 해보긴 해야지.>
‘…나중에 가도 되잖아요?’
<어허. 불리한 일이라 외면해서 쓰나.>
협박에 가까운 할배의 잔소리에 난 어쩔 수 없이 조이의 권유를 수락했다.
으으. 한참 아래에 있는 내 이름 보고 싶지 않은데.
“켄트 영애는 안 가실 건가요?”
나와 함께 몸을 풀고 있던 프레이는 그 권유에 고갤 갸웃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은 뻔했다.
아카데미 성적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애니까. 분명…
“응. 갈게.”
어라? 난 당연히 프레이가 거절하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예상 외로 흔쾌히 내 옆에 따라 붙었다.
뭐지? 얘가 갑자기 왜 이런담.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 셋은 함께 아카데미의 광장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와아. 바글바글한 것 봐. 이른 아침인데 다들 부지런하네.
본래라면 어떻게 저 인파를 어떻게 뚫고 지나갈 지를 고민해야 할 터이나 난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존재 자체가 프리패스인 걸.
‘여러분들.’
“야. 허접들.”
내가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내 쪽에 꽂힌다.
앞에 서 있는 것은 루시 알른. 건드리는 순간 왕이고 뭐고 모욕하고 보는 미친 년.
그 옆에는 조이 파트란. 대 파트란 공작가문의 영애이자 여러 귀족 영애들의 구심점이 되는 사람. 겉모습만 보면 악역영애 그 자체지.
프레이는… 음. 뭐 대충 넘기고.
우리의 면면이 이렇다 보니 인파 사이에 자연스레 길이 트였다.
처음에는 기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상처 받았었는데 이것도 익숙해지더라.
요즘에는 좀 편하다는 생각도 들어. 어디를 가더라도 얼굴을 들이밀면 바로 해결이 되니까 말야.
그렇게 성적표 앞에 도착한 나는 중간에서부터 내 이름을 찾았다.
내 추측이 맞다면 한 이쯤에 있을 텐데.
그 쪽을 곰곰이 살펴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왜 내 이름이 없지? 내가 잘못 본 건가?
그것이 의아해서 다시 확인을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내 이름은 없었다.
뭐야?! 설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필기시험을 망친 건가?! 다른 실기 시험으로 보충할 수 없을 정도로?!
와아. 조졌네. 진짜.
아무리 그래도 하위권은 곤란해.
이러다 유급이라도 하면 대참사라고. 대참사.
아래로 또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리던 나는 내 이름보다 먼저 프레이의 이름을 발견했다.
내 성적이 프레이보다 낮다고?! 난 프레이보다 더 한 빡대가리였던 건가?!
“아아. 이번에는 3왕자님을 이기는 데 실패했네요. 이상하다. 가채점에서는 분명 점수가 더 높았었는데.”
조이가 아서를 이기는 데 실패했다고?
그럼 이번에는 아서가 1등이겠네.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결국 다른 개입이 없으니까 원래대로 돌아오는 구나.
“그나마 알른 영애가 1등을 지켜주셔서 다행이네요.”
…응? 뭐? 내가 1등?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이번에 찍은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조이 너 나 놀리는 거지? 1등이라 그래서 고개를 들면 그걸 믿으셨나요? 조이킥! 하려는 거지?! 응?!
평소에 쌓인 울분을 그런 식으로라도 풀고 싶은 거야?!
하. 진짜. 그 발상이 귀여워서 일부러 당해준다 내가.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든 나는.
‘루시 알른.’
‘아서 솔라딘.’
‘조이 파트란.’
‘자칼 버로우.’
…
맨 위에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보고는 곤혹에 빠졌다.
어라? 왜 내 이름이 저기에 있는 거지?
개꿀잼몰카인가? 아카데미 교수들이 짜고 날 놀리려는 건가?!
아냐. 그럴 리는 없지.
그럼 뭘까. 꿈인가? 그래. 분명 꿈일…
아니지. 요즘에 잘 때마다 할배한테 구른다고 꿈을 꿀 일이 없는데 꿈은 무슨 꿈.
‘할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뭐긴 뭐냐. 네가 1등을 한 거지.>
‘어떻게요?!’
아니 진짜 어떻게 내가 1등인 거야?!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실기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건 인정!
던전학을 비롯해서 내 게임 지식이 통용되는 곳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도 알겠어!
근데 이외의 과목에서 개처럼 털렸을 텐데 어떻게 내가 1등이 되냐고!
나 잘 모르는 과목 시험 칠 때 절반 정도는 찍었단 말이야!
<내가 보면서도 참 신기했다. 어떻게 연필을 던질 때마다 정답의 번호가 나올 수 있는 게냐. 주신께서 이런 사소한 일까지 보우하시는 것을 보면 분명 그대는 사랑 받고 있는 것이리라.>
엑. 아니 그러니까 내가 주사위를 굴려서 찍을 때마다 정답의 번호가 튀어나왔다는 소리야?
…오오! 다이스 갓이시여!
이번에는 제가 따로 기도를 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게 이런 축복을 내리시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접주신과 비할 데 없이 유능한 다이스갓께 감사를 바치고 있으려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그럼 처음부터 제 성적 알고 계셨던 거네요?’
<그렇지?>
‘…근데 왜 아무 말씀 안 해 주신 거죠?’
<지금 이러는 꼴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우울해졌다가 사실을 알고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여태까지 숨기고 있으셨단 거구나?
할배. 당신 변태야? 내가 조마조마해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단 거잖아.
진지하게 상호확증파괴 마렵네.
짬통 투어보다 괜찮은 거 뭐 없나. 할배한테 굴욕을 줄만한 무언가가.
“루시 알른.”
할배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튀어나오게 만들 걸 떠올리던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 앞에는 아서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가르쳐준 것 덕분에 실기성적이 급속도로 성장한 조이보다 높은 성적을 거둘 정도다. 아서는 엄청난 노력을 거듭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내게 패배했으니 우울할 수밖에 없겠지.
으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나.
아니. 애초에 내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나?
그냥 입 닥치고 있는 게 최선 아닌가?
“할 말이 있다.”
‘뭔가요?’
“뭐죠? 이번에도 저한테 쳐발리신 허접 불쌍 왕자님?”
“크흡.”
역시 입 닥치고 있는 게 최선이겠다. 내가 위로는 무슨 위로야.
아서는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에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내게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