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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절벽 끝에 서서 익숙한 산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떠들썩하네.”

옛날이 생각나게 만드는 분위기야.

옛날이라고 해봤자 고작 1, 2년 전이지만.

“그렇지 않아?”

“오랜만에 봐도 너는 여전히 싸가지가 없구나.”

“불청객한테 예의를 차려줄 이유가 있어?”

스릉.

은색 검신이 검집에서 빠져나온다.

곳곳에 실금이 간 낡아빠진 검이지만 여전히 스산한 예기를 품고 있었다.

“아니면 혹시 이런 예의를 바란 거야?”

“그런 예의를 바란 건 아니지만 그걸로 자네의 분이 풀린다면.”

“쯧.”

나는 혀를 차며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야. 죽여놓고 뒤늦게 죄책감이 생겨서 추모라도 하러 왔어? 아니면 정말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러 왔나?”

“너무 그러지 마. 나도 그 녀석이 입힌 부상 때문에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됐으니.”

“흥. 뒷방 늙은이는 무슨.”

부상을 입은 건 사실이지만, 저 노망난 뱀이 얌전히 뒷방에 처박혀 있을 리 없다.

요양이란 명목으로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 속에 모습을 숨긴 채 암약하고 있겠지.

“제보를 받아서 왔어. 사도 하나가 찾아와서 카나라는 여자애가 이 산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

“흐응.”

제보를 들었다, 라….

“그래서? 싸우려고?”

“괜히 떠보지 마. 자네나 나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잖아.”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쳐 있던 몸을 뒤로 돌렸다.

오두막 앞, 자그마한 공터에 놓인 의자에 이제 이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단정한 인상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애초에 나는 자네가 죽는 게 아니라 제국에 오길 바라거든. 유능한 인재는 언제나 부족하니까. 어때, 지금이라도 올 생각 있어? 황제까진 아니더라도 웬만한 공작 부럽지 않을 정도로 후하게 대해주지.”

“안 가.”

“어차피 그라시스에 애국심이 있지도 않았으면서.”

남자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조악하게 만든 의자를 두드렸다.

“이렇게 살 바엔 제국에 와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낫지 않아?”

“네 심장에 검을 선물하게 해주면 생각해 볼게.”

“흠, 이 산에 사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을 것 같네.”

공기 맑고, 경치 좋고.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 꼴을 보기 싫었던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뾰족하게 말했다.

“짜증나게 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 네 역겨운 얼굴에 당장이라도 검을 쑤셔 박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할 수 있으면 당장에라도 했을 텐데,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래서 마법사들은 성가시기 짝이 없어.

“난폭하기는. 이래서 검사란 족속들은.”

“놀랍네. 나도 마침 비슷한 생각 중이었는데.”

남자가 혀를 차며 지팡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순식간에 피어오른 마나가 요동치며 복잡한 형상을 자아냈다.

존재의 맹약.

마법사들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하는 맹약의 마법진이었다.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내 부탁을 들어주면 자네가 애지중지 아끼는 여기를 보호해 줄게.”

“보호? 네가?”

“존재의 맹약을 보여줘도 의심하는 거야?”

“네 말을 순순히 믿느니 차원수를 믿지.”

“좋아. 여기에 결계를 쳐서 자네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해줄게. 기간은 내가 죽을 때까지. 어때, 이 정도면 되겠어?”

“….”

워낙 음흉한 놈이라 존재의 맹약을 걸고도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그래도 저 정도로 자세한 조건이면 일단은 믿어도 될지도.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는데.”

“너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 테니 들어 봐.”

내가 못마땅하게 팔짱을 낀 채 쳐다보거나 말거나 남자의 태도는 시종일관 느긋했다.

“아까, 사도 하나가 자네에 대해 제보했다고 말했잖아. 그 녀석이 동네방네 떠든 것 때문에 일이 좀 귀찮게 됐거든.”

남자는 그렇게 운을 띄웠다.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의 악명이 워낙 자자하잖아. 그라시스가 망하고 바로 잠적한 탓에 자네의 행방을 찾지 못했지만….”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찾지 않은 거겠지. 죽고 싶지 않아서.”

“…크흠! 자네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많아.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고.”

“그렇겠지. 나도 아직 네가 한 짓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거참, 말 좀 그만 끊고 좀 들어라. 아무튼, 제보를 들은 기사단 중 하나가 원정을 나섰단 말이지.”

“…나를? 이상하네. 전장에서 나를 봤던 놈들이라면 그런 생각 안 할 텐데.”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겠지. 죄다 반병신이 됐거나 죽었으니까.”

남자가 피식 웃으며 내가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자네 생각대로 전쟁을 겪은 놈들이 아니야. 최근에 만든 기사단인데, 혈기 왕성한 녀석들을 모아뒀더니 명예욕이 생긴 것 같더라고. 마물을 토벌하겠다는 핑계로 원정을 떠나더니 알고 보니 자네를 잡으려고 한다지 뭐야.”

“너희 입장에서는 마물일 테니 틀린 말은 아니네. 맨날 괴물이라고 떠들고 다녔잖아.”

“아르키쉬는 모르면서 그건 또 알아들어?”

“하도 많이 들었어야지.”

뭐만 하면 괴물 괴물 거리는데 어떻게 몰라.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으니 알아들을 수밖에 없지.

게다가 원래 다른 언어를 배울 땐 좋은 말보다 욕을 가장 먼저 배우는 법이다.

“경고라도 해주려는 거야? 조심하라고? 아니면 목숨은 붙여서 돌려보내 달라고?”

“아니. 그 반대야.”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구부정했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검은 주인의 뜻에 따라 쓰이는 거야.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멋대로 날뛰는 검은 제국에 필요 없어.”

“흐응.”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정도면 너도 할 수 있지 않아?”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뒷방 늙은이 신세라서 말이지. 함부로 힘을 썼다가 걸리면 곤란해.”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를 언제까지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그렇다 해도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유리한 맹약 같은데.”

“호적수에게 보내는 내 나름의 경의라고 생각해 줘. 나도 호적수의 죽음이 더럽혀지는 건 싫거든. 그리고 너무 만만하게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멋대로 날뛰는 검이라고 해도 제법 날카로우니까.”

“검이 날카로워 봤자 검이지.”

“그럼 동의한 거지?”

“으으음….”

나는 말을 길게 끌었다.

이상한 점이 없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한 점투성이지.

다만, 그걸 생각해도 녀석의 맹약은 나에게 필요해 보였다.

전이었다면 듣지도 않고 거절했겠지만, 이제는 알아보고 싶은 게 생겨서 말이지.

가리드의 묘를 방치하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꼴도 보기 싫은 놈이라고 해도 명색이 마스터 메이지니 묘가 망가질 걱정은 덜어도 될 테니까.

너무 타이밍이 좋아서 의심스러울 정도야.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알았어.”

“좋아. 그럼 맹약을 새길 손을 줘. …그쪽 손 말고.”

“귀찮게 하네.”

반지를 낀 오른손을 거두고 왼손을 내밀었다.

“맹약을 맺겠다.”

남자가 간단한 시동어를 외치자 둥실둥실 떠 있던 마법진이 다시 마나의 형태로 녹아내렸다.

유유하게 흐르던 마나가 나를 휘감더니 밝은 빛을 내며 손에 흡수됐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마법치고는 매우 얌전한 효과였다.

마나가 완전히 사라지자 남자는 흐르지도 않은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휴우, 끝났다. 알고 있겠지만 결계는 미리 쳐놨으니 안심해도 돼.”

“끝났으면 이제 빨리 꺼져.”

“성질도 급하기는.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잘 처리해 줄 거라 믿을게, 카나.”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럼 자네를 뭐라고 부를까. 붉은 사신? 죽음의 새? 아니면 카나….”

쐐액!

빠르게 쇄도한 검이 남자의 형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산산조각 난 남자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마나가 되어 비산했다.

…분신이 아니라 본체였다면 좋았을 텐데.

물론 그랬으면 노망난 뱀이 내 앞에 서지도 않았겠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사람 긁는 법을 아는 놈답다.

“네가 무슨 속셈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보를 통해 알았다고?

제국의 정보력과 저 교활한 뱀의 능력이라면 내 위치는 이미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에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본인만 일방적으로 피해 보는 맹약을 맺고.

기사단을 일부러 내게 보내기까지.

뱀은 몰랐다고 했지만, 절대 몰랐을 리가 없다.

어쩌면 기사단이 출정한 것부터가 놈의 입김이 닿은 걸지도 모르지.

전부 수상쩍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속아줄게.”

안 그래도 시끄러워서 내려갈 참이었으니까.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평화롭게 사는 건 정말로 내 팔자가 아닌가 봐.

크림슨 이지스 앞에 선 나는 손잡이를 매만졌다.

마치 자신을 써달라는 것처럼, 익숙한 감촉이 손에 와닿았다.

귀하디귀한 드래곤 오브를 박아 넣고, 그 자존심 높은 드워프에게 애걸복걸해서 만들어진 검.

그라시스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지은 이름, 크림슨 이지스(진홍빛 방패).

검에 방패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참 모순적이면서도 동시에 가리드스러운 행동이라 많이도 웃었지.

원주인인 가리드가 죽은 후 이 검은 내 소유가 됐지만….

“나는 이 검을 쓸 자격이 없으니까.”

노망난 뱀이 말했지. 애국심도 없었으면서 왜 이런 곳에 사냐고.

그 말대로, 그라시스가 멸망한 것에는 딱히 미련이 없다.

그저 가리드의 유지를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릴 뿐.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키지 못했는데,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검을 무슨 낯짝으로 쓰겠어.

눈을 감고 검의 온기를 느끼던 나는 미련이 진득하게 남아 떨어지기 싫어하는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대신 나에겐 다른 명검이 있으니까 괜찮아.

낡은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나는 이 검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이렇게 오래 쓸 줄은 몰랐지.

적당히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오래 버틸 줄 누가 알았겠어.

마침 좋은 이름이 떠올라서 검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응, 네 이름은 이제부터 파리채야.”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검이라니.

이 검을 만든 대장장이가 봤다면 엄청 기뻐하겠지?

응, 분명 그럴 거야.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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