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어난 나는 침대 옆의 종을 울리려다 헛손질을 했다.
맞다. 나 어제 저택에서 잔 게 아니었지.
하도 오랜만에 침대에서 잔거라 착각했네.
기지개를 한 번 쭉 핀 후 몸을 일으킨 나는 목재로 된 말끔한 방 안의 정경을 보고 짧게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방이지.
저택에 있는 루시의 방처럼 프릴로 가득한 거기가 어떻게 사람 사는 방이야.
언젠가는 저택의 사람들에게 미친년 취급 받을 각오를 하고 프릴을 뜯어버리고 말테다.
침대에서 일어나 살며시 문을 열었다.
내가 기억하는 시녀라면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텐데.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시녀는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다른 사람도 있었다.
칼.
그는 갑옷을 입고 검을 찬 채 문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칼. 여기서 뭐하고 계신 건가요?’
“허접. 너 뭐해?”
“아가씨의 호위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언제부터죠?’
“언제부터?”
“아가씨께서 방에 들어간 후 계속입니다. 오늘 아침 에린 양이 이 곳에 올 때까지 침입자는 없었습니다.”
잠도 안 자고 호위를 서고 있었다고?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네가 충실한 기사가 되겠다는 맹세를 한 건 알겠는데 이건 좀 과하지 않냐?
자발적으로 나서서 밤을 새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나를 위해서 일을 해주는 건 알겠는데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야. 이 정도면 충성이 아니라 스토킹 아냐?
이 도시의 어디에 위험요소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눈빛으로 쏘아 붙였지만 칼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역시 그 때 맹세 같은 걸 언급하면 안 됐어.
덕분에 귀찮은 녀석이 따라 붙어 버렸잖아. 아니지.
그 때 맹세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이 녀석이 가만히 있었을까?
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맹세를 한 걸 보면 그냥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거 아냐?
최근 들어서 다소 과한 충성을 보이는 칼을 보고 있자니 그런 의심이 절로 들었다.
하아. 알게 뭐야.
이 놈이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고생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라지.
하루 종일 저러고 있으면 지만 힘들지 내가 힘든가.
‘시녀님. 들어오세요.’
“허접 시녀. 들어와.”
“알겠습니다. 아가씨. 갑옷도 입혀 드릴까요?”
‘네. 부탁할게요.’
“당연한 걸 왜 묻는 거야?”
드디어 던전에 들어가는 날이 왔구나.
*
우리는 준비를 끝마치자 마자 기사단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기사단은 뭘 하고 있으려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수련을 시키고 있지 않을까.
분명 그럴 거야.
포셀 그 인간은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1초라도 쉬게 만들면 병이 나는 사람이니까.
불쌍한 기사단원들.
그러게 왜 굳이 알른 가문에 들어온 거니.
딸바보 가주에 훈련중독 기사단장 인성하자 영애까지.
진짜 끔찍한 직장 아냐? 나 같으면 바로 사직서 던졌다.
마을에 대기시켜 둔 마차를 타고 한 시간 즈음 움직이니 저 멀리에 야영지가 건설된 게 보였다.
에반스까지 오며 야영을 할 때 만들었던 간이 야영지와는 달리 던전 인근에 설치된 건 제대로 된 녀석이었다.
TV에서 몽골의 유목민들이 사는 집이랑 비슷한 느낌.
확실히 각을 잡고 만드니까 괜찮네.
저 정도면 내가 저기에 묵어도 괜찮았던 거 아닌가?
오랜만에 제대로 씻고 멀쩡한 식사를 하고 침대에서 잠든 건 좋았지만.
하루 종일 마음고생을 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냥 야영지에 묵는 게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어젯 밤은 편안하셨습니까?”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허접 평민의 집치곤 나쁘진 않았어.”
“그랬다니 다행입니다.”
포셀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무척이나 후련한 듯한 그 웃음이 불안해서 슬며시 다른 기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둘이서 짝을 지어 대련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눈가에 진한 다크서클이 새겨져 있었다.
역시나 굴리고 있었구나.
이것도 중독이야. 중독.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적당히 해야 좋은 거지 이 인간아.
그나저나 사람 수가 평소보다 적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내가 가만 사람 수를 헤아리고 있으니 내 의도를 눈치 챈 포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기사가 몇 명 없죠? 먼저 던전에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벌써요?’
“벌써 들어 간 거야?”
“예. 저희가 쉬어서 무얼 하겠습니까. 어제 밤부터 번갈아가며 들어갔다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놀러온 것이 아니라 훈련을 하러 온 것이기에 한 시도 쉬어선 안 된다 말을 하는 포셀에게서는 일종의 광기가 느껴졌다.
“알른 가문의 기사 정도 되면 며칠 정도는 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훈련 때 미리 극한 상황을 체험시켜놔야 후일 진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도 무리 없이 대처할 수 있죠.”
그러니까 훈련을 미리 실전처럼 해야 한다는 소리구나?
으음. 그래.
일리가
있겠냐?
야! 이러다가 알른 가문의 기사단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어떡할 거야!
이딴 식으로 사람을 굴리다 보면 실전이 벌어졌을 때 적보다 상관을 먼저 공격한다고!
물론 베네딕이나 너나 공격당한다고 해서 쓰러질 위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너네한테 쌓인 원한이 나한테 돌아오면 어쩔 건데!
‘기사단장님…’
“바보 포셀. 이러다간 던전 공략보다 허접 기사들이 쓰러지는 게 먼저일 걸?”
“아가씨. 언젠가 저희가 들어가야 할 던전을 공략할 땐 이보다 힘든 상황도 수도 없이 나옵니다. 이 정도면 약과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겠다.
백작 가문의 기사들이 언젠가 공략하게 될 던전은 최소 A급 이상의 재앙이다.
한 시라도 방심을 하는 순간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지옥이지.
나는 소울 아카데미를 얼마 하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A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억까 속에서 키보드를 박살낼 뻔 했던 그 때를.
후일 경험이 쌓이며 A급 던전 쯤이야 맨몸으로도 돌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건 내가 얼마든 계속 도전할 수 있는 플레이어라 그런 것이었다.
이제부터 나타날 던전의 구조와 공략법을 모두 외우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다.
허나 이 세상을 사는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몸만을 믿고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휴식은… 아마 사치스러운 일이겠지.
내가 무어라 말을 한들 포셀이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눈에 새겨진 것은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무거운 의지였으니까.
과연 포셀은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라장을 넘어 왔을까.
그리고 어쩌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
평상시의 사람 좋은 그가 훈련을 할 때 만큼은 악귀가 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포셀의 뒤편에서 대련을 하던 기사들은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명분이 포셀한테 있는데 내가 그의 의지를 어떻게 꺾겠는가.
‘알겠어요.’
“그래. 네 맘대로 해. 멍청이 포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뒤편의 기사들이 눈에 띄게 좌절하는 게 보였다.
많이 힘들겠네.
그렇지만 어떡하겠냐.
너네가 선택한 기사단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이것도 다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
원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잖아?
나는 도저히 즐길 수 없지만 기사인 너네들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믿어.
파이팅!
“뭐어. 그래도 아가씨께서 하신 말씀이 틀린 건 아닙니다. 쉴 때는 쉬어야겠죠.”
포셀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사단!”
단전에서부터 뽑아낸 우렁찬 목소리가 초원을 뒤흔들었다.
단순히 크게 소리를 냈을 뿐인데 땅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아가씨의 자비시다! 지금부터 두 시간 동안 휴식을 허한다! 아가씨에게 감사를 표하도록!”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가씨!””
평균보다 훨씬 거대한 성인 남성 수십 명이 소리를 내지르며 고개 숙이는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좀 부담스러웠다.
대충 알겠으니 편하게 있으라 이야기를 했지만 기사들은 쉬이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 존재 자체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눈치가 있으면 적당히 사라져줘야겠네.
기왕에 훈련중독인 아저씨도 내가 데려가도록 할까.
‘단장님…’
“포셀. 던전의 입구는 어디야?”
“그를 구경하고 싶으십니까? 따라 오시죠. 바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포셀도 내 의도를 눈치 챈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포셀을 따라가다 보니 야영장 한 가운데에 있는 던전의 입구가 나타났다.
그 모습은 게임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멀뚱이 솟아 있는 돌로 된 문.
게임에서 보았을 땐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저를 실제로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돌로 된 문에서 공포가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만 그를 살피던 도중 갑작스레 던전의 문이 열렸다.
“힉!”
뭔데?! 뭐가 나오는 건데?!
몬스터? 몬스터인가?!
던전의 문에서 나올만한 게 그거밖에 없기는 한데!
“어. 아가씨. 언제 오셨습니까?”
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대머리 기사를 비롯한 네 명의 기사였다.
하아. 뭐야. 공략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던 거야?
진짜 타이밍 안 좋네.
놀랐잖아. 이 멍청이들아.
대머리 기사는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네다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 많이 놀라셨나봅니다?”
저 시키가. 내가 좀 편하게 해주니까 아주 살맛이 났네? 그치?
감히 하늘 높은 백작 영애님한테 시비를 걸어?
‘공략을…’
“공략 끝내고 나온 거지?”
“예. 그렇습니다. 아가씨.”
‘그럼 가서 쉬어요.’
“그럼 야영지 가서 쉬어.”
“예?”
쉬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기사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아가씨께서 기사들을 좀 쉬게 해달라 부탁하셔서 내가 허락했다.”
거기에 포셀이 확언을 더해주자 기사들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대체 알른 가문의 기사들한테 휴식이란 어떤 의미인걸까.
잠시 쉬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국뽕에 차오르는 듯한 표정을 짓는 거야.
아아. 처음 보나? 이것은 휴식이라는 것이다.
에에? 휴식?! 그런 게 있을 리 없는www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아가씨!”
‘당신은 빼고요.’
“대머리 기사. 넌 빼고.”
“예?! 왜 저만.”
‘영애를 놀린 죄입니다.’
“허접한 기사면서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한 죄야♡”
도발에 당한 대머리 기사의 얼굴이 굳었지만 그에게 반항할 수단은 없었다.
꼬우면 어쩔 건데. 나는 백작 영애고 지는 백작 가문의 기사인데.
갑질하는 거 재밌네. 루시가 평소에 왜 그러고 다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지도.
“루시 아가씨.”
부들부들떠는 대머리 기사를 보면서 웃고 있던 중에 포셀이 내게 말을 걸었다.
‘왜요?’
“왜.”
“마침 던전 안이 빈 김에 던전 안에 들어가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