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0
<…루시. 뭐라고?>
“못 들었어? 바보 파파?♡ 쪼잔한 파파는 이런 것도 못 해주는 허접 파파냐는 거야♡”
<크흡!>
큰 타격을 입은 듯한 소리를 낸 베네딕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바보 파파♡?”
<…듣고 있단다. 루시.>
혹시 수정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싶어 베네딕을 불러 보았더니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듯 흐물흐물해진 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니 베네딕 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루시를 엄하게 대하고 있었잖아. 근데 파파 소리 한 번 들었다고 이렇게 태세전환을 한다고?
이게 맞아?! 아무리 딸바보라고 해도 정도가 있지!
<저어. 그. 루시. 왜 갑자기 나를 파파라고 부르는 거니?>
“왜?♡ 그냥 바보 파파라고 부르고 싶어서 그러는데?♡ 하지마?♡”
<아니아니아니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 루시가 파파를 파파라고 불러주면 너무 좋지. 엄청나게 기쁘단다.>
베네딕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급했다. 그에게 있어 파파라는 호칭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였던 모양이다.
신기하네. 나 이 파파라는 호칭 허접주신이 파 놓은 함정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파파라는 단어를 입에 담게 만들기 위한 함정 말야.
베네딕의 딸사랑을 생각해보면 기뻐하긴 하겠지만 그 뿐. 큰 효과를 발휘하진 않을 거라고 봤지.
근데 이게 웬 걸. 베네딕은 파파라는 호칭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 아빠가 되어 있었다.
아르마디시여! 당신께서는 하늘 위에서 여기까지 보고서 그런 팁을 주셨던 겁니까!
아아. 이 미천한 어린 양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이로군요!
아르멘! 위대한 주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지혜로운 아르마디를 속으로 찬양하고 있으려니 수정구 너머의 베네딕이 쭈뼛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치만 루시. 너 아이 때 이후로는 나를 파파라고 부른 적이 없잖니.>
아하. 베네딕이 왜 파파라는 호칭에 약한가 했더니 루시가 어릴 적에 베네딕을 파파라고 불렀었구나?
옛날 생각이 나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거야. 베네딕은 딸바보 중의 딸바보니까.
“지금 그런 게 중요해 바보 파파?♡”
<그…그렇지만.>
“나 안 보내주면 다시는 파파라고 안 불러 줄 거야.”
<아니. 그.>
“바보 아버님이라고도 안 해. 멍청한 트롤이라고 부를 거야.”
<멍청한 트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메네스테일은 너무 위험하단다. 루시. 제발.>
“흥. 바보 파파 완~전 싫어♡ 아저씨 냄새나서 기분 나빠♡ 목소리도 징그러워♡ 트롤처럼 생긴 파파가 싫어서라도 가문에 안 돌아 갈 거야♡”
<루시이이이… 내 말 좀 들어다오.>
*
베네딕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파파라는 호칭 앞에서는 무력했다.
짐짓 엄한 체를 하다가도 내가 파파라는 호칭을 쓸 때마다 녹아내려버린 베네딕은 내가 메네스테일에 가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런 문제는 더 좋아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
조건으로 걸린 것은 언제나 칼을 옆에 둘 것.
쪼잔 악신의 헛짓거리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항시 칼을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던 내 입장에서 그건 전혀 패널티가 아니었다.
결코 허락해선 안 될 것을 허락해버리고 침울해진 베네딕을 보고 있으면 좀 죄책감이 들긴 하더라.
미안해. 베네딕. 그치만 이거 안 하면 허접 주신이 날 괴롭힐 거란 말이야.
언젠가 대륙에 찾아올 거대한 위협 중 하나를 해결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이해해줘.
걱정하진 않아도 돼. 소울 아카데미의 고인물인 내가 던전에서 잘못될 리가 없잖아?
금방 해결한 후에 너한테 줄 선물을 가지고서 돌아갈게.
그 날 밤으로부터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나 방학이 시작된 날.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저마다 갈 곳으로 향하는 중에 내 발걸음이 닿은 곳은 소울 아카데미 거리의 뒷골목이었다.
“어서오십시오. 알른 영애.”
‘알새틴. 준비는 끝났나요?’
“정보 팔이. 내가 시킨 것도 안 한 개 이하의 허접은 아니지?”
“물론입니다. 여기 확인해 보시죠.”
자신 있게 말한 대로 알새틴은 내가 부탁한 물품을 완벽히 준비해 두었다.
좋아. 이거면 메네스테일 던전을 공략하다가 어떤 변수가 일어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겠네.
‘고생하셨어요.’
“뒷골목의 허접치고는 노력했네.”
“제 스승님과 관련된 문제니까요. 최선을 다해야죠.”
알새틴은 짐짓 엄숙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오늘이 오기 전에 알새틴에게 보수를 미리 지급하겠다고 말해뒀다.
어차피 메네스테일 던전을 공략하러 가야 하니까. 하는 김에 겸사겸사 알새틴의 문제도 해결해 둘 생각이었지.
알새틴은 내 말에 기뻐했지만 동시에 망설이기도 했다. 아직 자신이 내가 준 정보의 값어치를 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선불로 값을 지불 한다 여기라고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알른 영애!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알새틴은 오랜 숙원을 해결할 수 있단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다.
모든 게 해결되고 나서도 그 마음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나는 알새틴과 칼을 끌고서 순간이동의 진 앞에 섰다.
하아. 이걸 또 다시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뉴먼 가문에 들렸을 때 사용한 이후로 다시는 이 마법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이번에 한해선 어쩔 수 없었다.
메네스테일은 도로로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왕복하는데만 하더라도 한 달에 가까운 기간이 걸릴 텐데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좀 괴롭더라도 이 진을 사용하는 게 지금은 최선이야. 참고 견디자.
굳게 마음을 먹고 밝게 빛나는 순간이동의 진에 발을 들인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후회를 했다.
“으에에엑.”
한 달 동안 마차를 탈 때 느낄 멀미를 압축해서 선사하는 듯한 어지러움에 엎어진 나는 도저히 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으으. 예전에 비해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이 꼴인가.
나는 언제쯤이면 칼처럼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있는 걸까.
“도와주랴?”
내 뒤를 따라온 얼빠 여우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 내 옆에 와서는 말을 걸었다.
도와준다니. 이 멀미 해결할 수 있는 거야?
도저히 말을 할 기운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더니 얼빠여우가 자신의 발로 내 미간을 짚었다.
부드러워서 좋긴 한데 이걸로 도움이 되지는.
어라? 어지러운 게 사라졌어.
이거 뭐야?!
개변태 허접 여우라도 숲의 주인은 주인이라는 건가?!
“쯧. 힘을 썼더니 피곤하군. 잠시 머리를 빌리마.”
내 멀미를 해결한 얼빠 여우는 터덜터덜 내 머리 위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지만 난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저 녀석 덕분에 멀쩡해졌으니까. 쉴 자리 정도는 제공해 줘야지.
얼빠 여우 덕에 정신을 차린 난 건물 바깥으로 나와 메네스테일의 거리를 눈에 담았다.
확실히 마도 제국에 속한 도시라서 그런가 왕국하고 다른 부분이 여럿 있네.
예를 들어 메네스테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왕국보다 낮다.
어차피 영토가 넓으니 건물의 높이를 굳이 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는 게 땅인데 왜 그걸 아껴 쓰겠는가.
그리고 건물에서 시선을 떼어 보면 마법이 부여된 여러 물건들이 눈에 띈다.
마도 제국이라는 이름답게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마법적 기술을 지닌 것이 이 나라다.
그러니만큼 아래에 있는 백성들 또한 기술이란 이름의 축복을 다른 곳보다 편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자잘한 차이점이 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이 정도였다.
게임 속에서 보던 풍경을 직접 보게 되니 텐션이 살짝 올랐지만 소울 아카데미의 거리를 보았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소울 아카데미를 플레이한 게이머의 입장에서 여기는 곁다리니까.
얼마나 대단하고 규모가 크던 간에 내 입장에선 별 감흥이 없는 걸.
노을이 지는 거리는 예쁘지만 딱 그 정도.
“벌써 이런 시간이 되었군요. 우선은 숙소부터 잡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칼은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서 상식적인 의견을 내밀었다.
보통이라면 그의 말이 옳았다. 어디를 가더라도 잘 곳을 먼저 구하는 게 우선이지.
허나 나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내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거든.
‘아뇨. 그보다는…’
“허접. 일정은 내가 결정해. 우선은 모험가 길드 쪽으로 갈 거야.”
메네스테일 던전이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무작정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단으로 들어가서 무단으로 나올 수 있다면 세금을 못 걷잖아?
그러니 메네스테일 던전에 들어가고 싶은 자는 반드시 모험가 길드에 들려 증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마도 제국의 귀족이라면 그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난 왕국의 귀족이라서. 증서 발급 과정에 편의를 구할 수는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일 걸.
“허나 아가씨.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괜찮아요.’
“야. 허접. 개 주제에 주인의 말에 반박하는 거야? 건방지네?”
“기사님. 영애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셔서 하는 말입니다. 걱정 마시죠.”
칼과는 달리 알새틴은 추측이 가는 부분이 있는 듯 나를 두둔했다.
나의 기사인 자신보다 더 빠르게 내 의중을 파악했다는 사실이 질투 나는 건지 알새틴을 노려보던 칼은 이내 안색을 싹 바꾸고는 자기도 알고 있었지만 예의상 말을 한 것이라며 뻔뻔하게 나왔다.
푸핫. 뭐냐. 충성심에서 질 수 없다 그거야? 진짜 웃기네.
이런 거 하나 둘 실수해도 네가 내 기사라는 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멍청한 칼.
어쨌든 더 이상 반대할 생각은 없는 거지? 그럼 모험가 길드로 가자.
여기 길드 업무처리가 느린 편이라 내일 바로 던전에 들어가려면 하루 전에 미리 증서를 신청해놔야 하거든.
실제로는 처음 보는 거리였지만 내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리 중에 내가 길을 모르는 곳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스피드런에서 최단 거리를 구축하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덕분에 난 별 어려움 없이 모험가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라 그런가 모험가 길드는 북적거렸다.
조금이라도 보수를 더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하루만 의뢰 기간을 늘려달라고 비는 사람.
술을 마시며 파티원들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장비를 정돈하는 사람.
가지고 온 전리품의 값좀 더 쳐달라며 길드의 직원을 회유하는 사람.
모두들 하룻동안 던전을 공략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허나 그 모든 사람들의 일상은 내가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온 순간에 잠시 멈췄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꽂히고 있었다.
<쯧. 못배워 먹은 것들이라 그런가 눈짓 하는 것도 영 마음에 안 드는 군.>
‘…네? 그게 무슨.’
아카데미 생활을 하며 사람들의 눈빛에 익숙해진 나는 시선의 사이에서도 무덤덤했다.
허나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할배는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보였고,
칼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를 가렸으며,
알새틴은 뒤 편에서 모두를 노려보며 경고를 날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과민반응을 하는 걸 보면 이번에도 좋은 시선은 아닌가 보네.
아마도 안 좋은 쪽의 호기심이겠지.
페도 변태 새끼들. 지들 가슴 팍에 올까말까한 여자애를 보고 흑심이 생기냐?
확실히 내 매력 수치가 높기는 한가봐. 길드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이목을 끄는 걸 보면 말이야.
근데 있잖아. 내 매력 수치가 증빙됨에 따라서 다른 사실이 하나 더 증명되어버렸어.
대체 내 평판은 얼마나 쓰레기 같은 거야?!
평판 수치가 어디까지 파고 내려갔길래 이 높은 매력 수치가 아카데미에선 하나도 작용하지 않는 거냐고! 빌어먹을!
“변태 놈들같으니.”
절망적인 현실을 앞에 두고 한탄하고 있으려니 머리 위에 있던 얼빠 여우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틀린 말은 아냐.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얼빠 여우. 내 발에 밟히면서 기뻐하던 개허접변태인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양심에 안 찔리냐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