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바닥에 깔린 불길한 눈동자에서 묘한 박동이 느껴졌다.
하얀 불꽃에서 느껴졌던 힘과 유사한 힘의 박동.
그와 함께 갈기갈기 찢긴 거인의 몸에서 충격파가 뿜어져 나오며, 서서히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고통. 죽음. 눈동자. 인도.”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인은 찢긴 몸을 점점 회복하며, 단어를 하나씩 끊어가며 힘겹게 토해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몸을 서서히 재생하는 거인을 바라보며,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았다.
물리적으로 맞아서 다친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 너무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네.
‘눈’으로 파괴 조건부터 확인했어야 했는데!
나는 천천히 몸을 재생하는 거인을 바라보며,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눈동자 속에서 눈동자를 회수한다.>
확실히 공간 절단으로 죽이기 힘들어 보이는 조건이 나왔다.
그래도 아귀 조건처럼 <시작의 오브젝트가 만든 돌.>, 이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야.
조건이 대충 예상이 가니까 할만해 보였다.
분명 눈동자라는 건, 거인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는 저 바닥에 깔린 마법진 같은 걸 말하는 거겠지.
처음 볼 때부터 창문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통로에 가까운 녀석으로 보였다.
나는 거의 재생을 마쳐가는 교주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럼, 살점 하나 남지 않아도 그렇게 빨리 재생하는지 볼까?’
양손을 펼치고, 모아 쥐듯이 ‘뀩’ 움켜쥐었다.
공간이 마구잡이로 찌그러지며 커다란 검은 구체가 생겨나, 거인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후후, 해치웠다.’
물론 조건을 채우지 못했으니 재생할 테지만 순식간에 재생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아마 재생하는 데 꽤 걸리겠지.
능력을 쓸 수만 있다면 별것도 아니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검은 구체는 거인을 찢어발기지 못하고, 하얀 불꽃으로 변해 폭발해 버렸다.
“보라, 육신은 필멸의 사슬에 묶인 덧없는 그릇에 불과하다.”
그런 말을 하며 모습을 드러낸 거인의 모습은 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화려하게 몸을 치장하고 있던 옷가지는 너덜너덜해져 근육질의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기괴하게 생긴 눈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그 눈동자는 하얀색 불꽃을 눈물처럼 흘리고 있었다.
“덧없는 세상을 놓아버리면 그대의 영혼은 눈동자 너머로 날아오를 것이다.”
크기가 커다란 점만 제외하면 꽤 인간처럼 보였던 거인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거인의 양쪽 눈에서는 하얀 불꽃이 안광처럼 뿜어져 나왔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자국 모양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야말로 초월적인 면모!
귀엽기만 한 나랑 달리 진짜 오브젝트다워서 조금 부러웠다.
***
레이첼은 도망가지 않고 있었다.
황금 사신이 온몸을 등대처럼 밝히며 돌진할 때도, 그리고 회색 사신이 나타나서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도,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레이첼도 도망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마, 황금 사신도 도망가라고 그런 식으로 희생했겠지.
하지만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도 환하게 웃는 황금 사신을 보고 나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회색 사신과 거대한 교주의 전장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괴물처럼 변한 교주는 입에서 불길을 뿜었고, 회색 사신은 계속 도망가기 바빴다.
황금 사신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회색 사신은 처음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따라잡힐 것 같으면 멀리 떨어진 황금 사신의 위치에서 튀어나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구경하고 있었더니, 레이첼의 뺨 위로 작은 주먹이 마구 날아왔다.
뚜시뚜시.
보기 드물게 화가 난 황금 사신이 레이첼의 뺨에 펀치를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때린 황금 사신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볼을 부풀리며 화를 냈다.
“미안해. 왠지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그랬어.”
레이첼은 황금 사신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천천히 쓰다듬으며 미안함을 표현했다.
한번 쓰다듬을 때마다 빵빵해진 볼의 부피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돼서 히히 웃었다.
그리고 여기는 위험하니까, 빨리 도망가자는 것처럼 레이첼을 인도했다.
레이첼은 황금 사신의 재촉에 서둘러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이첼이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자, 교주와 싸우고 있는 무표정한 회색 사신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속으로 작은 응원을 보낸 레이첼은 그대로 전장을 떠났다.
***
하얗게 타오르는 불빛이 숲을 가로지르며 뿜어져 나왔다.
오브젝트만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파릇파릇 생기가 넘치는 숲은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신성한 진리에 이르는 길은 고통의 파편으로 포장되어 있으리라.”
이미 쏘아 보낸 능력도 무효화하기 시작한 하얀 불꽃은 굉장히 성가셨다.
물론 공간 절단 같은 공격을 100% 막아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상처쯤은 금세 회복해 내니까 시간만 속절없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작은 발로 뚜방뚜방 도망치고, 거리가 좁혀지면 퍼트려 둔 황금 사신에게로 순간 이동하는 방식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황금 사신들은 이 상황을 약간 위험한 술래잡기 정도로 생각하는지, 정말 즐거운 표정이었다.
생기 넘치는 숲속을 하얗게 장식하는 불길을 바라보면 볼수록 묘한 확신이 생겼다.
‘내가 저 불을 집어먹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더 나아가 저 거인의 능력도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영혼의 각성이 시작된다.”
거인의 중얼거림과 함께 거대한 불꽃이 사방을 조여오듯이 순식간에 덮쳐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멀리 떨어진 황금 사신의 위치로 순간 이동했다.
잠깐 불길에 스쳤을 뿐인데, 왼손이 통째로 재가 되어버렸다.
하얀 불꽃이 달라붙어 타버린 어깨 부분에선 정말 맛없는 장작 냄새가 났다.
이런 맛없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면 이미 하얀 불꽃을 집어먹었을 텐데, 먹기 싫어지는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도저히 먹을 기분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검은 사신 녀석들도 원래 하얀색 장작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저 하얀 불꽃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검은 사신을 손바닥 위로 불러내서 저 불꽃을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도리도리.
머리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면서 거부하는 검은 사신.
‘상냥한 엄마가 좋아.’
검은 사신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만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역시 내가 먹어서 해치워 버려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검은 사신이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엄마, 잘 봐야 해!’라고 의지를 전달해 오더니 갑자기 어딘가로 튀어 나가려고 하길래 황급히 붙잡았다.
‘그만! 알았으니까, 멈춰!’
검은 점액 때의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정이라서 서둘러서 붙잡았다.
손아귀에 붙잡힌 검은 사신은 뛰쳐나가려고 버둥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얘네는 꼭 자기들이 희생해서 뭔가를 알려주려고 하네….
그러니까 절대로 저 하얀 불꽃을 먹지 말라는 뜻이겠지.
고개를 들어서 살펴보니.
“짙은 고통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구원의 신을 발견하리라.”
언젠가부터 불을 뿜기 시작하던 거인은 이제는 머리카락까지 하얀 불꽃으로 바뀌어버렸다.
하얀 불꽃을 먹지 못한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든 저 거인을 붙잡아둬야,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텐데.
내 생각을 가만히 듣고 있던 검은 사신은 고개를 다시 한번 갸웃했다.
도대체 왜 그런 걸 고민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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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내 발밑에서 엄청난 양의 검은 사신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은 사신들이 산더미처럼 한곳에 모이더니, 커다란 형상을 취했다.
5m 신장의 귀여운 상어 이빨을 가진 거대 검은 사신의 등장이었다.
***
펑!
엄청난 양의 물 덩어리가 지면을 후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엄마 골렘 펀치!>
<골렘 펀치!>
5m의 거구지만 엄청난 속도로 주먹을 휘두르는 엄마 골렘은 교주 군단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크기와 속도 차이가 너무 나서 접근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엄마 강해!>
<강해!>
그리고 원래부터 강했던 엄마 골렘은 더욱더 강해진 상태였다.
콜로세움으로 단련된 푸른 사신들의 조종 솜씨는 이제, 격투기 선수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다.
<검은 사신보다 약해!>
콜로세움에서 언제나 같이 싸워왔던 검은 사신과 비교하면, 교주 클론들은 너무나 작고 약했다.
<엄마 골렘 연속 펀치!>
클론 군단은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지만, 푸른 사신은 얼마든지 싸울 자신이 있었다.
***
온몸에 하얀 불꽃을 잔뜩 붙이고 있는 거대 검은 사신이 불 뿜는 거인과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싸웠다.
콰앙!
거인의 불타는 주먹이 폭탄처럼 커다란 충격파를 뿜어내었다.
오브젝트의 능력을 불태우고, 전차포탄급의 폭발력을 가진 주먹이었다.
물리 면역이라도 면역을 지우고, 그대로 폭발을 때려 박는 불합리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하얗게 타오르는 폭발이 흩어지자, 검은 사신은 그 묵직한 주먹을 어깨로 받아낸 채 귀여운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검은 사신은 그 주먹에 위기감을 느끼기는커녕, 전투의 스릴을 만끽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진화액’에 녹을 때부터 뭔가 다른 것 같기는 했는데, 설마 검은 사신의 단단함은 물리 면역이 아니었던 걸까?
타닥. 탁.
가볍게 지면을 박차는 유려한 풋워크.
마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유령처럼 춤추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거인은 태산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근육을 가진 강력한 적이었지만, 검은 사신에 비하면 느리고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분명 검은 사신도 나랑 똑같이 생겼을 텐데, 검은 사신은 절도 있고 강력한 전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거인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불을 뿜어내려고 하는 순간.
휘익.
그 순간을 꿰뚫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펑.
그 직후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강력한 스트레이트가 거인의 얼굴을 후려쳤다.
찰나의 틈새를 노린 직격탄이었다.
그 주먹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벌려진 턱에 파괴적인 충격을 박아 넣고 있었다.
거인은 그 충격에 정신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마치 아마추어와 프로 복서의 싸움처럼 상대가 되질 않았다.
거인이 나름대로 격투기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랬다.
상대를 쓰러트린 거대 검은 사신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왠지 5m짜리 커다란 아기 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잘했어! 그대로만 계속해!’
내 칭찬을 들은 검은 사신은 헤실헤실 웃으며 다시 격투기 자세를 잡았다.
미니 사신 콜로세움에서 푸른 사신과의 혈전을 반복한 검은 사신의 격투 솜씨는 달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검은 사신이 자세를 잡기 무섭게, 거인은 좀비처럼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세속의 잠에서 깨어나 영원의 영역으로 나아가리라.”
거인은 파괴 조건을 채우기 전까진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눈동자 속에서 눈동자를 회수한다.>
검은 사신이 시간을 끄는 동안, 나는 파괴 조건을 충족시켜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