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4
10층의 보스는 신성을 담은 방패 앞에 한없이 무력했다.
이전에도 내 패링 앞에 가로막히던 녀석이다. 신성으로 강화된 방패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있나.
골렘은 필사적으로 발악을 했지만 그 모든 건 그저 발악에 불과했으니. 녀석은 몇 분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생겨났을 때와는 달리 허무하게 후두둑 떨어지는 골렘의 잔해를 바라보던 나는 땅에 박아 넣은 방패에 몸을 기댄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 진짜 더럽게 힘드네. 전투를 끝마친 지금의 나는 반쯤 탈진 상태였다.
골렘과 전투하는 거까지야 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내 체력이 얼마나 좋은데.
알른 가문에서 수련을 하던 시절에도 몇 시간 정도는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던 나야.
그 때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지금이라면 이틀 밤 정도는 연속해서 움직일 수 있을 걸.
그런 내가 단순한 체력적 한계로 탈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죽어가는 이유?
딱 하나지. 신성박투술을 너무 오래 사용한 반동.
‘신성으로 방어 유지하는 거 체력소모가 엄청나게 심한데요?!’
<그래서 여태 말을 안 해 준 것이다. 쓰고 나면 녹초가 될 테니까.>
이전에도 말을 한 거지만 나는 아직 이 스킬을 다루는 것에 서투르다.
신체의 강화에 써먹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 이상의 응용은 많이 버거워.
출력이 제어가 안 돼서 언제나 전력으로 내질러야 하거든.
이번에 방패에 신성을 담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골렘의 공격을 막는 동안 언제나 최대치로 신성을 퍼부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까 실시간으로 체력이 바닥을 치는 걸 느낄 수 있었지.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날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냥 칼이랑 알새틴한테 도와 달라 그랬을 걸?
…아. 맞네. 그냥 도와 달라 그럴 걸.
내 방패술 수준을 확인한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굳이 혼자 상대할 필요가 없었는데.
아아아. 몰라. 젠장. 이게 다 빌어먹을 허접 깡통 때문이야.
저 더럽게 못생긴 깡통은 왜 이렇게 질긴 거야?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1분 지날 즈음에 픽하고 쓰러질 것이지.
심지어 공략 보상으로 내놓은 것도 불의 마석 하나가 끝이야?! 진짜 개 허접 민폐 깡통이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겠습니까?”
‘네.’
“그래. 이 허름하고 퀘퀘한 좆밥 던전이 기분 나빠서 못 견디겠어.”
원래는 10층 보스를 클리어 하고 나서도 좀 더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무리야.
억지로 진행하다가는 진짜로 혼절할 것 같으니까.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씻자. 찝찝해서 도저히 못 버티겠다.
*
숙소에서 씻는 동안 내가 입었던 옷에 얼빠 여우가 다이빙하는 사소한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뒷정리를 마친 나는 갑옷을 내던진 채 가벼운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 메네스테일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정산해야 하니까.
저층에서 얻은 물건들은 내 입장에서 대부분 쓰잘데기가 없는 잡템이다.
이런 것들을 인벤토리에 넣어둬 봐야 공간만 차지할 뿐 유용하게 써먹는 건 불가능하단 말이지.
그래서 이런 잡템은 그냥 모험가 길드에 넘겨버리는 게 좋다.
전리품을 팔아서 돈도 벌고, 모험가 길드 쪽의 평가도 높이고, 겸사겸사 길드 접수원의 호감도도 올…리진 못하겠네. 미움이나 안 사면 다행이지.
“굳이 아가씨께서 가실 필요 없이 제가 처리하고 와도 괜찮습니다만.”
칼은 내가 다시 모험가 길드를 방문하는 게 불안한 듯 나를 만류했다.
어제 저녁 모험가 길드에 여러 탐욕스러운 시선을 마주했던 그다.
내가 또 그 아래에 노출되는 게 걱정스러운 거겠지.
개인적으로는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해.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면 모를까. 루시 알른이라는 것이 공언된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내 눈을 마주치겠어?
그러다 나한테 시비가 걸리면 어떡하려고.
지금 내 외견이 귀여운 여자애인 건 사실이지만 루시 알른의 이름에는 그 귀여움을 바닥으로 처박아버릴 힘이 있거든.
그 누구보다 루시의 악명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칼의 걱정을 무시한 채 모험가 길드를 찾았다.
길드 안으로 들어선 나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얼굴을 내밀자마자 길드 전체에 침묵이 들어선 것이다.
‘익숙한 분위기네요.’
<그래. 아카데미에서 지겹도록 봤던 풍경이지.>
애써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하는 사람. 슬쩍슬쩍 눈치를 보는 사람. 겁에 질려 구석으로 파고드는 사람.
내가 늦게 교실에 들어가면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를 향한 욕망이나 탐욕?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내가 당당히 접수대 쪽으로 걸어가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켰다.
접수원이 도와 달라는 듯 다른 모험가들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 누구도 그에 호응해 주지 않았다.
‘저기요.’
“야. 떡대.”
“넵! 알른 영애! 무슨 일이십니까?!”
접수원은 자그마한 트집거리도 주지 않겠다는 듯 각 잡힌 모습으로 나를 응대했다.
잔뜩 굳어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억까를 하고 싶어지네.
트집을 잡으려 하면 얼마든 잡을 수 있는데 말이야.
내가 무섭냐는 말로 시작해서…
아니. 아니. 진정하자.
오늘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는 몰라도 회로가 메스가키 스킬에 잡아 먹혔어.
당분간 계속 봐야 할 사람을 괴롭혀서 어쩌자는 거야.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나는 접수원에게 전리품을 처리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리품입니까? 책상 위에 올려주시겠습니까?”
‘여기에요?’
“이 허름한 데에다?”
“예.”
으음. 여기에 다 올라가려나 모르겠네.
일단 하라니까 하겠지만.
아공간 주머니를 여는 체 하며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던 전리품을 하나 둘 꺼냈다.
이야. 하나하나 꺼내려니까 이것도 일이네. 허접한 모험가들 때문에 잡몹을 너무 많이 잡았어.
원래 계획했던 대로 움직였다면 그만큼 전투를 거듭할 일은 없었을 텐데.
덕분에 한 번 레벨업을 하긴 했지만 저언혀 고맙지 않아. 그보다는 힘들고 귀찮은 게 더 컸으니까.
‘저기…’
“야. 떡대.”
“여기까지입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생긴 것처럼 둔해빠져선. 바닥에 놓는다. 불만 없지?”
“어. 네. 넵.”
한참이나 인벤토리를 뒤적거린 끝에 난 접수대 앞에 전리품을 모두 다 늘어놓을 수 있었다.
게임이었을 적에는 마우스만 몇 번 딸깍하면 끝이었는데 현실이 되니까 이것도 힘드네.
내일 던전에 들어갈 땐 잡템은 그냥 버려두고 와야겠다.
“…정말로 이게 다 오늘 사냥하신 겁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왜. 문제 있어?”
“아뇨! 아무런 문제도 없죠! 금방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떡대 접수원을 비롯해 길드의 여러 직원들이 나와서 전리품을 정산하는 도중 한 파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 얘 기억나. 맨 처음 몬스터 트레인을 했던 허접 파티.
안 그래도 한 소리를 해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잘 됐다.
허접한 모험가들. 던전을 공략하던 동안에 쌓인 내 울분을 감당할 시간이야.
무슨 소리를 하던 트집을 잡아 줄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자니.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님!”
““죄송합니다!””
저들이 내 앞에 와서는 머리를 박았다.
아니. 저기. 응?
“저희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제발 목숨만은!…”
“제 집에는 병약한 동생이!…”
처음에는 잘근잘근 자존감을 박살낼 생각을 하고 있던 나였지만 상대편에서 빠르게 머리를 박아버리니 머리가 새햐얘졌다.
사실 이걸로 끝났으면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렸을 거야. 근데 처음 파티가 머리를 박는 동안에 내가 구해줬었던 다른 애들이 합류하니 진짜 머리가 멍해지더라.
제일 어이가 없었던 건 칼이야.
나를 도와줘야 할 상황에 뒤에서 고개나 주억거리고 있다니!
중간에 알새틴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한참 동안 사람들이 머리 박는 걸 구경하고 있어야 했겠지.
하아. 전투 외에는 도움이 안 되는 멍청한 허접견 같으니.
두고 보자. 나중에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다.
상황이 정리된 후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험가들이 왜 그리 필사적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 악명이 너무도 높았단 점이었다.
생각해보라.
저들이야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거지만 어쨌든 백작 가문의 영애이자 망나니인 나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가만있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생각했겠지. 그래서 먼저 대가리를 박고 사죄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해보려 한 거고.
‘피곤해요.’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을거라 확언한 후에 그들을 돌려보낸 의자에 기대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너무 피곤해.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할배랑 밤새서 수련을 해도 이렇게 죽을 것 같진 않았는데.
<오늘 수련은 쉬도록 할까?>
‘아뇨. 할 건 해야죠.’
평소 같았으면 쉬자는 말을 환영했을 테지만 오늘은 아냐.
신성을 방패에 담는 법을 제대로 연습해놔야 하니까.
메네스테일 던전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데 어떻게 쉬겠어.
휴식은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하면 돼.
후일 파트란 영지에 놀러갈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중 사죄 세례의 시작이 된 남자가 다가왔다.
“거듭 사죄드립니다. 알른 영애님. 저 때문에.”
잔뜩 겁을 먹은 채로도 내 앞에 서는 걸 보면 나름 책임감은 있는 사람인가 보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좆밥 들러리. 너 같은 허접한 평민 나부랭이를 내가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해? 푸하핫. 망상이 심하네.”
메스가키 스킬의 비난에 남자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거렸다.
이러다 이 사람 위장에 구멍 뚫리겠네. 빨리 보내주자.
그래도 할 말은 할 거지만.
‘모험가 생활을 하시기엔 너무 약하신 거 아닌가요?’
“야. 근데 여자애한테도 처발리는 너 같은 개허접 약골이 왜 던전에 들어가는 거야? 죽고 싶은 거면 혼자 방구석에서 처량하게 죽지 그래?”
던전 공략은 목숨이 걸린 문제다.
어설픈 실력으로 저 안에 들어갔다가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지.
저층에서도 목숨을 구걸해야 할 수준이라면 모험가라는 직종을 포기하는 편이 나아.
끝이 안 좋으면 찝찝할 것 같아서 괜한 오지랖을 부려봤더니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죽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저어. 그게 그러니까. 원래는 저층에 오늘만큼 마물이 많지 않습니다. 근데 오늘따라 던전이 이상해서.”
남자의 말은 이랬다.
그는 위로 올라갈 실력은 없지만 저층에서 근근히 먹고 살 정도의 실력은 있는 모험가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던전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마물이 등장하는 빈도도 잦고, 더욱이 마물의 흉폭함도 배가되었던 것이다.
“메네스테일 던전을 돌아다닌 지가 꽤 되었습니다만 처음 보는 현상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내가 던전에 들어온 날 처음으로 생긴 현상이라니.
‘저어. 할아버지. 혹시 이거.’
<흐음. 아르마디께서 그대를 항상 바라보듯 악신도 그대를 주시하는 모양이구나.>
그쵸? 이거 아무리 봐도 저 때문인 거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모두 구해서 다행이다.
그거 무시했다가 이게 나 때문이란 걸 알았으면 분명 오랫동안 자책했을 테니까.
던전을 빠르게 공략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