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75

쿠웅.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는 묵직한 충격파가 숲속을 휩쓸며 흙먼지를 날려 보냈다.

빠르게 흩어지는 흙먼지를 헤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뚜방뚜방.

경쾌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검은 사신과 거인이 맞붙고 있는 전장을 향해갔다.

목적지는 거인의 발밑에 놓인 커다란 눈동자!

거인에게 다가서자, 전투의 소음과 진동이 강해짐과 동시에 기분 나쁜 하얀 불꽃이 몸에 달라붙었다.

불쾌한 골짜기라고 해야 하나?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것만큼, 장작과 한없이 닮은 하얀 불꽃은 기분을 나쁘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내려다본 눈동자는 확실히 다른 세계와 연결된 통로로 보였다.

색이 없지만, 불투명한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정체불명의 세계.

나는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고개를 들어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 검은 사신을 올려다보았다.

5m짜리 거대 검은 사신은 내가 가려고 하는 걸 깨달았는지, 손을 번쩍 들고 휙휙 휘두르면서 배웅해 줬다.

키가 5m나 되면서 미니 시절이랑 똑같은 인사방식이라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나는 검은 사신의 배웅을 뒤로하고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

서아는 한산한 강동구 외곽 지대를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최대한 장비를 차려입은 오브젝트 회수팀 직원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커다란 투명 방패와 삼단봉으로 무장하고, 든든한 방검복과 튼튼한 헬멧으로 무장한 회수팀 직원들이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헬멧 위로 검은색 더듬이가 돋아나 있다는 점 정도였다.

서아는 이미 주민들이 떠나고 텅 비어 버린 강동구 위험지대를 달리고 있었지만, 그리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연구소 직원들을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검은색 회수팀 투구에 동화된 상태인 검은 사신들을 믿고 있었다.

슬라임처럼 변해서 투구 위에 찰싹 붙어있는 검은 사신들은 히히 웃으며 가끔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다음 골목에서 왼쪽!”

서아는 내비게이션도 없이 구불구불 복잡한 골목을 잘 아는 것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어깨 위에 앉아있는 새싹 사신 덕분이었다.

키득키득.

서아에게만 들리는 새싹 사신의 웃음소리와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얼마나 골목을 뛰어다녔을까.

서아와 회수팀은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쿵. 쿵.

마치 공사장에 도착한 것처럼 심상치 않은 커다란 소리가 울리는 건물.

서아와 회수팀은 저절로 몰려드는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건물 내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커다란 진동음이 울리는 곳은 건물 지하.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아 내려간 끝에 발견한 것은 온몸의 뼈가 부스러진 사람들이었다.

“부소장님. 현재 장비로 이 부상자들을 옮기는 것은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네요. 몇 명은 여기에 남아서 구급차를 부르도록 하죠.”

겉보기에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지만, 전신 골절이라서 함부로 옮기기 힘들었다.

큰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편안하게 잠든 사람들에게서 왠지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SDVIMVFoanVzY1YwSVhjamMzUkt1Y0RFbWtUeCtjSzhCQmZuVG16OGxGU3NNcHZITFc3R25JU1Y4ZG84ZE1FYg

푸른색을 연상시키는 청량하고 상쾌한 향기.

서아가 남은 직원들을 이끌고 토굴 깊숙한 곳에 도착하자, 커다란 물의 거인이 역동적인 동작으로 드롭킥을 날리고 있었다.

<상냥한 엄마 골렘 드롭킥!>

<드롭킥!>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회색 사신 모양 물 덩어리가 날뛰는 곳 뒤로, 작은 푸른 사신들과 실종된 세희 연구소 보안실 직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을 같은 얼굴과 복장을 한 클론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어수선한 공터에 서아와 회수팀이 도착하자, 그 클론 같은 남자들이 일제히 서아 쪽을 돌아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전원! 전투 준비!”

서아의 옆에 붙어서 달리고 있던, 회수팀장이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서아는 회수팀의 보호를 받으며 뒤로 물러섰다.

쾅!

방패와 주먹이 부딪친 소리라고 생각하기 힘든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대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회수팀장의 고함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회수팀은 생각보다 효과적으로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체력단련실에서 쇠질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단체 제압 훈련도 하고 있었나 보네.

서아는 생각보다 뛰어난 회수팀의 전투를 보며 살짝 감탄했다.

<따뜻한 엄마 골렘 윈드밀!>

<윈드밀!>

물론 푸른 사신 쪽이 더 대단해 보였다.

***

눈동자 속에 들어와 보니, 신기한 환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후좌우 어디에도 끝이 없는 검은색 거울로 된 바닥.

목적지로 보이는 저 먼 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약한 빛만이 이정표인 세계.

미약한 빛에서 뻗어 나오는 빛줄기는 직선으로 쭈욱 이어져서 마치 이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유일한 길처럼 올곧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치는 단 한줄기의 길을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나는 그 빛의 길의 끝자락에 멀뚱히 서 있었다.

거인의 파괴 조건은 <눈동자 속에서 눈동자를 회수한다.> 였지.

분명 저 빛 너머에 눈동자가 있을 것 같았다.

뚜방.

빛을 바라보며 한 걸음을 내딛자.

뭔가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어떤 환상이 눈에 보였다.

폐가 익는 것 같은 고온의 사막을 끝없이 가로지르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내 염원이 신에게 닿기를.>

살이 모두 타버려도 끝없이 걸어 나가려고 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 손끝에 새빨간 불이 붙었다.

저주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불꽃이었다.

나는 그 뼈를 태우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발걸음을 떼기 무서울 정도였지만, 다행히도 고통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내 심장에서 황금색으로 타는 장작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행복으로 가득한 예린이가 준 장작이 어둡고 저주처럼 달라붙은 불꽃의 고통을 지워주고 있었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엎드려 있던 한 남자가 잿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있었던 빛의 끄트머리가 정말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따뜻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크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뚜방.

다시 한 걸음을 내딛자, 모든 생명이 얼어붙은 설원을 나아가는 노인이 보였다.

<내 염원이 죽어버린 신에게 닿기를.>

그와 동시에, 손끝부터 천천히 얼음 가루로 변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불꽃 때문에 물리 면역이 사라져서 그런지, 재생을 위해서 끊임없이 장작이 소비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장작은 충분했다.

뚜방뚜방.

나는 끝없이 계속 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한 걸음을 나아갈 때마다, 신을 기다리고 염원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고, 그를 통해서 신에게 닿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칼날을 쑤셔 넣었다.

그러면 내 몸에도 불이 붙고 날붙이가 튀어나왔다.

인간이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상처였지만, 괜찮았다.

장작은 충분했으니까.

예린이가 준 장작이, 따뜻한 마음이 남아있었으니까.

이제 기나긴 길의 끝이 보였다.

등대처럼 길을 밝히는 빛의 근원 바로 앞에 도착했다.

절망하는 사람들이 길을 장식했었던 것과 조금 다른 무언가가 길가를 장식하고 있었다.

검은색 굳은 덩어리와 완전히 망가져 버린 강철 램프가 쓸쓸하게 놓여있었다.

뚜방.

나는 그 마지막 장애물을 향해 마지막 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죽어버린 대지를 걸어 나가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귀족처럼 차려입은 남자는 고풍스러운 강철 램프를 들고 검게 물든 대지를 걷고 있었다.

땅은 이미 녹아내려 질척한 석유처럼 변해있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남자의 몸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신이 내 염원을 들을 수 있기를.>

<신을 죽인 인류에게 영원한 종말이 도래하기를.>

그와 동시에 내 양발은 검게 물들어 부스러져 버렸다.

꽈당.

양발을 잃어버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아프다.

장작이 재생하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내 양발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건 ‘진화액’인가?

아팠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면, 분명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멀쩡해질 것이다.

‘물리 면역’은 그런 능력이었으니까.

그래도 나아가야겠지.

이런 거인 같은 괴물이 돌아다니는 세상은 장작들에게 그리고 예린이에게 좋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양팔로 천천히 바닥을 기어갔다.

이정표처럼 환하게 빛나는 곳으로 들어가자, 빛의 근원이 그 모습을 보였다.

커다란 빛으로 만들어진 띠였다.

저게 ‘눈동자’인 건가?

그리고 그 눈동자의 앞에 화려한 옷을 입은 근육질의 남성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밖에서 검은 사신과 신나게 싸우고 있는 거인과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설마 여기서 싸우라는 건가?

나는 깜짝 놀라서 녹아내린 두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지만, 눈을 뜨고 있는 남자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부스러기 같은 느낌을 풍기는, 마치 길을 장식하던 수많은 사람과 같은 느낌이었다.

최대한 조심조심 기어서, 남자의 곁을 지나치자 담담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나는 실패했는가.”

남자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는데.

거인의 광기에 젖은 목소리와 달리, 차분하고 안정적인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너라도 성공해라. 최후의 연금술사.”

갑자기 생생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서 확인해 보니, 남자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남자가 멍하니 바라보는 앞에는 푸른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던 나는 다시 천천히 기어가,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빛나는 고리에 닿았다.

그 순간 빛의 고리는 하늘로 솟아올랐고, 그와 동시에 공간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꿈속의 이야기처럼 사그라들었고, 내 몸에 남은 수많은 상흔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눈을 뜨니, 거인과 검은 사신의 격투 흔적이 진하게 남은 숲속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소리가 울리던 숲속은 차분한 고요 속에 잠겨있었다.

파괴 조건을 만족한 거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숲속을 돌아보던 중, 숲의 그림자 속에서 황금색 빛이 잔뜩 솟아올랐다.

내가 나타난 것을 확인한 검은 사신과 황금 사신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

나는 검은 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고치가 되어서 그대로 흙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마구마구 비비적거리는 미니 사신들 사이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커다란 빛의 고리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눈동자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눈동자’였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