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6
이 녀석의 의도가 뭔지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유로운 체 하며 짓는 눈웃음과 신경 써서 내는 목소리 같은 걸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이 멍청이는 진짜 뇌가 하반신에 달렸나.
지금 내 외견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꼭 안고 싶은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루시 알른이라는 이름에 달린 악명은 아름다움을 짓눌러 버릴 힘을 지니고 있다.
메네스테일의 모험가들조차도 이 사실을 알고 있거늘 메그 이 병신은 겉모습에 눈이 멀어서 내게 다가온 것이다.
아니. 아니지.
메그가 설정이건 행적이건 병신 같은 게 맞기는 하지만 어쨌든 얘도 나름의 교육을 받은 백작 영식이잖아.
사리 분별도 못하고 루시에게 다가올 정도로 폐급일 리가 없어.
분명 루시의 이름을 모르고 다가온 걸 거야. 그냥 지나가다가 눈에 띄는 사람이 있네 하고서 다가온 거지.
그래. 분명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저기요…’
“저기. 여자아이한테 욕정하는 페도 변태씨. 나 알아? 난 너 같은 변태는 잘 모르는데?”
“듣던 대로 입이 험하군. 알른 영애. 가시가 있는 꽃이라 이건가?”
아니었네? 얘는 그냥 하반신에 사로 잡혀서 머리 굴리는 걸 포기한 상상 이상의 병신일 뿐이었잖아?
세상에 얼빠여우보다 더한 미치광이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하아. 세상은 왜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 넓은 거야.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가 잃어버린 나는 보란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메그의 웃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합석을 하겠네.”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메그가 자리에 앉으려 하자 내 뒤편에 있던 칼이 그를 제지했다.
“게오르크 영식. 아가씨께서는.”
“시끄럽다. 기사 나부랭이. 마법을 쓰지도 못하는 멍청이가 어디서 감히 내게 말을 거는가.”
칼을 바라보는 메그의 눈빛에는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자를 향한 혐오.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기사를 향한 혐오. 그리고 자신의 연애사업을 방해하려는 자를 향한 혐오.
“닥쳐라. 그대의 입을 꿰매버리기 전에.”
어이없는 자신감이다. 이 녀석은 무얼 믿고 저렇게 나대는 것일까.
아직 받지도 못한 백작이라는 지위?
아니면 스스로 대단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하찮기 그지없는 마법 실력?
혹시 지금의 내가 전력을 낸다면 박살낼 수 있을 것이 분명한 호위 나부랭이들?
어느 것을 믿던 간에 칼이 마음을 먹고 검을 휘두르면 저항 한 번 못하고 목이 날아갈 녀석이 뻗대는 꼴이 같잖아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분명 칼도 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보다 못한 녀석이 제 앞에서 나대는 꼴이 열 받겠지.
허나 그는 기사이자 호위이기에 정중함을 지켰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물러서주십시오.”
“하. 이래서 무인이라는 놈들이 안 되는 것이다.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서 그런가 지능이 부족하니까. 융통성을 지니거라. 멍청한 기사야.”
하. 진짜 열 받게 구네?
나를 모욕하고 혐오하는 건 괜찮다.
루시의 몸에 빙의한 후로 지겹도록 겪은 것이 그런 시선이며 그런 말이니까.
이제는 닳고 닳아서 상처 입을 곳도 없다.
그렇지만 내 주변 사람을 향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도 나를 위해 앞으로 나선 녀석이 모욕을 듣는 건 더더욱.
“물러나.”
“허나 아가씨.”
“같은 말을 또 해야 하는 걸까 멍멍아?♡”
칼은 내가 한 마디를 더하고 나서야 입술을 꾹 깨물고는 뒤로 물러섰다.
메그는 그를 무어라 생각한 건지 같잖다는 듯 칼을 향해 비웃음을 날린 후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아. 마침 잘 됐네.
안 그래도 메네스테일 던전을 공략하면서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아무 죄책감 없이 괴롭힐 수 있는 샌드백이 나타나다니!
“합석을 허락해주어서 감사하네.”
“뇌까지 마나로 가득 차서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짐승은 어떤 생물인가 궁금하더라고♡”
“크흠.”
방금 꺼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더니 샌드백이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으음. 이 샌드백 타격감이 나쁘지 않네. 멋진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지만 입가가 부들거리는 게 마음에 들어.
“알른 영애.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만 이 곳에서 식사를 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유가 없는데 여기에 앉아 있을 리 없잖아?♡ 바보야?♡ 아아~ 하반신으로 생각을 해야 해서 지능이 떨어지는 구나?♡ 불쌍해라~♡”
상대를 열 받게 만들고 싶다 마음을 먹었더니 내 몸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키득거리는 웃음. 대놓고 깔보는 눈. 입가 근처에 있지만 입을 가릴 생각은 없는 손.
역시 메스가키 스킬이야! 이런 거 하나는 잘 한다니까!
도발에 당한 샌드백은 얼굴이 벌게진 채 입술을 곱씹었지만 언성을 높이진 않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꼭 이 곳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내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서 그런다마는.”
“저기 귀머거리야?♡ 나 방금 일부러 여기 앉아 있다고 말했잖아♡ 이것도 이해를 못 하다니. 혹시 귀도 하반신에 달려있는 걸까?♡ 아래로 이야기를 해줘야 알아듣는 거야?♡ 푸하핫♡ 완전 징그러워~♡ 페도에 변태인 쓰레기는 그렇게 진화하는 거구나?♡”
샌드백의 손이 꽉 쥐어지는 것이 보인다. 힘이 꽉 들어가서 부들부들거리는 것이 기회가 된다면 저를 후려치고 싶은 것이리라.
와아. 진짜 초인적인 인내심이야.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 능력을 생각해보면 이미 눈이 뒤집어졌어야 하는데.
하반신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면 저런 걸 얻을 수 있는 건가? 대단하네. 전혀 닮고 싶진 않지만.
“…그럼 다음 기회에 약속을 잡는 것은 가능한가?”
“이번엔 어디로 대답해 줘야 해?♡ 위? 아니면 아래?♡”
“알른 영애.”
여태까지 최대한 부드러운 체를 하던 목소리에 한기가 서린다.
벌써 샌드백의 내구도가 끝을 보이는 거야? 타격감은 괜찮은데 좀 허약한 게 문제네. 제조사에 문의를 해봐야 하려나.
“농담이야♡ 넌 언제 괜찮은데?”
내가 되묻자 샌드백의 얼굴에 옅은 기쁨이 서렸다. 기쁜 티를 안 내려는 게 더럽게 재수 없네.
“으음. 내일은 어떤가.”
“안 돼♡”
“모레는?”
“그것도 안 돼♡”
“요 일주일 중에 괜찮은 날은?”
“없는데?♡”
“날 놀리는 것인가?”
“푸하하핫♡ 이제야 알았어?♡ 진짜 멍청하네♡ 내가 너 같은 좆밥이랑 약속을 잡을 리 없잖아?♡”
문답이 이어짐에 따라 점차 썩어들어가던 샌드백의 얼굴에 아예 정색이 서렸다.
“루시 알른.”
“뭐야♡ 설마 기대했어?♡ 나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놀아주니까 좋았나봐?♡ 근데 이걸 어쩌지?♡ 난 너 같은 허~접은 생리적으로 무리라서♡ 보고 있으면 토가 나올 것 같거든♡”
들으란 것처럼 헛구역질 소리를 내고 있으려니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난 샌드백이 날 선 시선으로 날 노려본다.
“적당히 해라.”
“쿡♡ 쿠후훗♡ 그걸 위협이라고 하는 거야?♡ 와아~ 너무 무섭다♡ 푸훗♡ 완전 개허접해♡”
계속 도발을 하고 있으려니 샌드백이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분을 견디지 못한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물렁살인 샌드백답게 그 움직임은 중간에 허접이란 소리를 세 번이나 끼워넣을 수 있을 정도로 느려 터졌었지만 난 일부러 그 손에 붙잡혀줬다.
왜냐고? 그래야 명분이 생기잖아.
“적당히 하라고 했을 텐데!”
자. 지금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접근한 게 누구? 샌드백.
싫다는 데 억지로 합석한 거? 샌드백.
고함을 치다가 억지로 손목을 붙잡고 위협한 건? 샌드백.
증인은? 닉이 추천해 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이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정당방위야.
자그마하고 연약한 여자아이가 무섭게 생긴 남자한테 위협당한 거잖아? 반항을 하는 게 당연하지.
만약 내가 지위가 낮았더라면 이 정도로는 명분이 모자랐겠지만 나는 대륙을 호령했던 알른 가문의 백작 영애님이거든.
이 새끼를 참교육 시키기에는 적당한 권력이지. 안 그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식탁을 밟으며 뛰어 올라 샌드백의 얼굴을 후려쳤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그랬다가는 인명사고가 날 테니까.
뭐어. 그래도 저 약골 샌드백의 이빨 두어개는 박살내지 않았으려나.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널부러진 샌드백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고는 내게 얻어맞은 부분을 매만지며 소리쳤다.
“이 섀키갸아아아!”
“쿡♡ 뭐야♡ 너 마법사가 아니라 광대였구나?♡ 천직이네♡ 어쩐지 생긴 것부터 개웃기더라♡”
이빨이 빠져서 발음이 새는 샌드백에게 다가가려 하니 샌드백 뒤에서 대기하던 호위들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알른 영애. 죄송합니다만…”
“죄송할 걸 알면서 왜 말을 해?♡ 매도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주인이고 종자고 페도에 변태 새끼들밖에 없는 거구나?♡ 진짜 역겹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면 꺼져 줄래?♡ 파파한테 너희 변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잘 생각해. 지금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면 내 선에서 끝나는 거야.
너희의 병신 같은 주인이 얻어 맞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근데 이 일이 이 곳에서 끝나지 않고 베네딕에게로 향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너희들은 잔뜩 열이 받은 딸바보 아저씨를 감당할 자신이 있어?
나 같으면 절대 그 인간만큼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물러서라.”
내가 한 마디를 더하기 전에 호위들의 대장을 맡은 이가 목소리를 냈다.
푸핫. 그치? 너도 베네딕이 무섭지? 어차피 물러설 거면서 왜 같잖은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너 때문에 괜히 짜증만 더 났잖아.
“무슨 서리냐! 호위인 녜놈이 날.”
“책임은 내가 진다. 물러나.”
호위들이 물러섬에 따라 샌드백의 모습이 드러났다.
녀석은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위라 생각하던 놈이 질겁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웃긴 모습이란 말인가.
“오지 먀! 오면 굥격할 겨야!”
“해 봐. 내가 너 같은 좆밥의 공격에 다칠 리가 없잖아?♡”
어디 한 번 마법을 쓸테면 써보라는 듯 느긋하게 발을 움직였더니 샌드백이 진짜로 마법을 캐스팅했다.
와아. 진짜 상상 이상의 폐급이네. 타 가문과의 분쟁이고 뭐고 자기 보신이 더 중요하다 그거야?
심지어 저 마법 화염계열이잖아. 조이가 쓰는 걸 자주 봐서 기억하고 있어.
나무로 지어진데다 사람도 많은 곳에서 화염 마법이라니. 자칫 잘못하면 어떤 사고가 생길 줄 알고.
얘는 진짜 안 되겠다.
저 마법을 정통으로 맞더라도 멀쩡할 자신이 있긴 했다.
저 정도 위력에 상처입어서야 탱커라는 단어가 아깝지.
허나 그 여파가 어디까지 번질 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서는 샌드백의 배를 걷어차는 걸로 캐스팅을 중단시켰다.
공마냥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닥에 널부러진 샌드백은 배를 부여잡은 채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그 녀석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걷어차 똑바로 눕혔다.
겁에 질린 샌드백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야♡ 자기 허리춤에 올 것 같은 여자애한테 겁먹은 거야?♡ 페도에 변태에 약골에 멍청이에 겁쟁이라니♡ 너무 좆밥이잖아♡”
“나… 냐는! 게오르크 백쟉 갸문의 장냠이댜! 내게 햬를 키치면!…”
그리고는 발로 그 얼굴을 짓밟아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입을 막았다.
“닥쳐줄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역겹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