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7
샌드백의 세 번째 다리를 한 번 걷어차 기절시켜주고 돌려보낸 다음 날. 나는 여느 때처럼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다.
계층은 벌써 39층.
원래는 오늘 34 ~ 35층 정도까지만 공략을 하고 쉴 계획이었지만 나는 목표를 달성한 후로도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게오르크 가문 측에서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샌드백이 하반신에 뇌가 달린 페도 변태 망나니이긴 하지만 어쨌든 게오르크 가문의 장남이다.
그런 녀석을 잘근잘근 밟아줬으니 게오르크 가문 측에서 무언가 반응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 쪽의 인원들 성향이 어찌 되는지 아는 나는 진행과정이 어찌될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우선 현 게오르크 가문의 당주는 능력은 있지만 심약하고 소심한 인간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기한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고민을 한 끝에 최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사람.
아마 이번에도 쉬이 선택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문제가 복잡한 것도 복잡한 거지만 뭣보다 상대가 알른 가문이니까. 게오르크 당주가 게임 그대로의 인간이라면 적어도 일주일은 고민하지 않을까.
그럼 여유로운 거 아니냐고?
아니.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어.
게오르크 가문의 안주인.
이 사람은 게오르크 당주의 정 반대에 서 있는 사람이다.
성급하고 무능하고 제 아들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옳다 외치는 사람. 샌드백이 형편없는 인간이 된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자.
분명 그 여자는 아들의 꼴을 보고 분노의 목소리를 내리라.
안주인에게 약한 게오르크 당주다. 그 여자가 매일 같이 재촉을 한다면 결정의 시간이 상당히 단축되겠지.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영역은 여기까지다.
고민 끝에 게오르크 당주가 어떤 결단을 내릴지는 알 수 없다.
뭐어. 솔직히 어지간한 건 다 상관이 없거든?
근데 경우에 따라서 내가 메네스테일 던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될 수도 있단 말이지.
그건 곤란해. 허접 주신이 내려 준 퀘스트를 클리어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나는 게오르크 당주가 움직이기 전에 마무리를 짓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46층.
메네스테일 던전의 숨겨진 구획이 존재하는 곳이자, 알새틴의 스승이 머무르던 곳.
오늘 거기까지 도달한 후에 내일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메네스테일에서 떠나는 거야.
강행군이 되겠지만 괜찮아.
죽어라고 구르는 건 무척 익숙한 일이니까.
*
우리가 메네스테일 던전에서 빠져나온 것은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달이 대신했을 무렵이었다.
피곤에 찌든 경비병에게 던전에서 나왔음을 고한 우리는 메네스테일 길드에 들리지 않고 바로 숙소 쪽으로 향했다.
전리품을 처리해서 얻을 이득이 미미하니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쉴 생각이었다.
내일 아침 바로 강행군을 이어가야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늦으셨군요.”
그렇게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를 반겨 준 사람은 닉이 아니었다. 평소 카운터를 지키던 남자도 아니었다.
그 인물은 언젠가 만나리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게오르크 가문의 현 당주.
메브 게오르크.
자신이 지닌 유능함으로 메네스테일 던전 거리를 크게 부흥시킨 남자이자 실력 있는 마법사로 가득한 마도 제국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은 천재 마법사.
특유의 우유부단한 성미만 아니었더라도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쳤을 이.
그는 카운터 앞 허술한 의자에 홀로 앉아 있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항상 결정 장애에 시달려서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남자가 어째서?
안주인의 닦달이 그 정도로 심각했던 건가.
젠장. 호위를 거느리지도 않고 혼자 움직였다는 건 그만큼 이 일을 심각하다 판단 내렸다는 걸 텐데!
“갑작스레 찾아와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다급한 이야기다 보니 예를 차리지 못한 점 이해해 주십시오.”
곤란하게 되었단 생각을 하며 입술을 곱씹었다.
메네스테일 던전과 관련된 부분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다른 부분은 어찌 되든 상관없어.
내 뒷배가 베네딕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 내가 지닌 인맥이 그리 가벼운 것도 아니거든.
파트란 가문의 공작 영애. 솔라딘 왕국의 3왕자. 주신 교회의 현 성녀.
어지간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이들.
그러니 난 메네스테일 던전에 관한 화제만 꺼내지 않게 만들면 돼.
할배랑 상의를 해서 이야기를.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저희 멍청한 아들놈이 큰 폐를 끼쳤습니다.”
빠르게 돌아가던 머리는 게오르크 당주가 머리를 숙인 순간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어. 어? 아니 당신 자기 아들에게 폭력을 가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러 온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머리를 숙이는 건데.
물론 난 정당방위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 쪽은 아닐 거 아냐.
“다행히 알른 영애께서 이번 일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작은 사고로 만들어주셨습니다만 영애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베네딕 알른 백께서 이 곳에 강림하셨겠지요.”
멍청하니 굳어있던 머리는 베네딕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 다시금 움직였다.
베네딕.
하하. 당신 도대체 대륙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거야.
천재 마법사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이 게오르크 당주가 왜 당신의 이름 앞에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거냐고.
어쨌든 간에 고마워. 당신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게오르크의 이름을 걸고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우리 멍청한 아들놈도 제대로 교육 시키는 건 당연한 일이고요. 그러니 부디. 베네딕 알른 경에게는 이 일을 잘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베네딕한테 잘 말을 해둘 게요.’
“겁쟁이 백작님이 우리 바보 아버님을 그렇게 무서워하신다니 어쩔 수 없네요. 백작님께서 바지에 실수하지 않도록 바보 아버님에게 잘 말해 둘게요.”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게오르크 당주는 겁쟁이에 쫄보인 백작이 되었지만 그는 어색하게 웃을 뿐 조금도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를 을로 치부하고 있는 그이니 강하게 나설 수 없는 것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른 영애.”
‘별 일 아닌 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백작님 얼굴이 창백한 게 너무. 푸훗. 불쌍해 보여서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평소의 나라면 부들거리는 게오르크 백작의 입술을 보고서 메스가키 스킬을 욕했을 것이다.
어중간한 영식도 아니고 권력과 지위와 실질적인 힘을 지닌 백작의 미움을 사게 된 셈이니까.
허나 지금은 괜찮다.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다신 이 도시에 찾아 올 일이 없으니까.
당연히 게오르크 백작과 만날 일도 아예 없지! 그러니 이 사람에게 미움을 산다 한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아!
하아. 일이 잘 풀렸네.
이렇게 됐으면 굳이 내일 다시 던전에 들어갈 필요가 없겠다.
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몸에 무리가 갔으니까 하루 이틀 편하게 쉬고 몸 상태를 완벽하게 만든 후에 던전에 들어가자.
응. 그러는 게 좋겠어.
*
게오르크 백작이 사과의 말을 전함에 따라 갑작스레 휴식을 취하게 된 저녁.
여러모로 지친 것인지 루시가 빠르게 잠을 청하러 간 후 알새틴은 거실에 나와 혼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힘든 하루였다.
알새틴이 단련을 허투루 해 온 사람은 아니었다.
어릴 적 그를 거두어 가르쳐 준 이는 언제나 준비된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스승에게 구원을 받았던 알새틴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가르침을 어긴 일이 없었으니까.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보원이자 뒷 세계의 사람으로써 살아가기 위한 훈련이었다.
육체에 모든 것을 거는 기사들의 단련이 아니라.
칼이 경이로운 체력을 지닌 것은 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소울 아카데미에 재적할 시절부터 유망주라 평가 받았으며 졸업 후 바로 알른이라는 최강의 기사 가문에 들어가 성장을 한 사람이니까.
그만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렇지만 말이다. 알른 영애는 도대체 무엇인가.
1년 전까지만 해도 망나니였던 그녀가 어찌 이 정도로 경이로운 체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알른 가문의 피를 이었다지만 이건… 이건 너무 비정상적이지 않나.
스승을 보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두 사람을 따라가야 했던 알새틴은 지금 반쯤 녹아버린 상태였다.
그나마 그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내일 다시 던전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일까.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런 자그마한 여유를 지닐 새도 없었을 테니까.
“잠이 안 오나?”
던전에 다녀오고 나서도 단련실에 들어가 한참 동안 몸을 움직인 끝에 씻고 나온 칼의 모습을 알새틴이 질린다는 듯 쳐다봤다.
알른 가문의 기사는 다들 저런 것일까. 아니면 저 놈이 특출난 것일까.
알른 영애를 생각해본다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겠군.
“쉬는 중입니다. 운 좋게 여유가 났으니까요.”
“흐음. 술이라. 오랜 만에 한 모금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합석해도 되겠나?”
“마음대로 하시죠.”
칼이 의자를 꺼내 앉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닉이 술잔과 안주를 가지고서 나타났다.
비슷한 업계에서 종사하는 알새틴이기에 닉이 지닌 수준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디에 가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을 실력을 지닌 인재였다.
분명 뉴먼 가문이 메네스테일 거리에 큰 관심을 지녀 실력있는 자를 보낸 것이리라.
저런 사람이 왜 여기에서 알른 영애께 음침이라는 소리나 듣고 있는 것인지.
사람 일이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알새틴. 술은 잘 마시나?”
“어디 가서 먼저 쓰러질 정도는 아니죠.”
“그럼 어디 한 번 대결을 해보겠나?”
“제가요? 기사님이랑요?”
이 사람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왜 괴물이 인간과 술대결을 하려는 것인가.
알새틴이 질색을 하자 칼이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가 옆에 있을 적에는 볼 수 없는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알겠다. 술 대결은 없던 걸로 하고 다른 것을 묻지. 네 녀석은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기사님이라 부를 셈이냐?”
“허나 당신은 귀족이고 전.”
“그래봐야 아가씨의 아래에서는 똑같은 종자일 뿐이다. 편하게 대해도 상관 없다. 상황을 보아하니 네 녀석과는 오래 함께할 것 같거든.”
그건… 그렇지. 이번 일이 끝나고 나서도 알른 영애와는 오래 같이 해야 할 테니.
칼의 눈치를 살피던 알새틴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좋아. 칼. 나중에 불평하기 없기다?”
“하. 그런 짓을 했다가 다른 동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지난 몇 달간 루시의 아래에서 함께했던 두 사람이다.
말을 놓은 두 사람의 술의 힘을 빌려 의기투합을 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잡담이 이어지며 술잔이 하나 둘 테이블 위에 쌓여갈 무렵 칼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이봐. 알새틴.”
“뭐야. 갑자기 징그럽게.”
“내가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가 있거든? 근데 나만 질문을 하면 공평하지가 않잖나.”
“…뭐.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물어보라고?”
“그래! 뭐든 대답을 해주지.”
그 말을 들은 알새틴이 눈썹을 살짝 치떴다.
이 녀석이 물어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뻔하다.
내가 왜 굳이 여기까지 따라왔는가 하는 문제겠지.
원래 같았으면 비밀로 했겠지만 어차피 이 녀석은 끝까지 함께할 녀석이다.
미리 이야기를 한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대답은 해주기로 하자고.
그러면 무엇을 물어볼까가 문제인데.
…재밌는 게 생각이 났어.
“마침 잘 됐군.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해봐.”
“이게 약간 민감한 문제라서 말이야.”
“어허. 방금 전에 무엇이든 대답하겠다고 한 말을 잊었나? 기사는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지 않는다.”
칼은 그리 단언을 하고는 보란 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알새틴은 짓궂은 웃음을 지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고.
“칼. 너는 혹시 여자아이에게 매도당하면서 즐거워하는 성벽이 있나?”
“푸흡!”
솔직함의 대가로 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맥주를 얼굴로 받아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