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8
이 정도로 극적인 반응이 나올 줄 몰랐던 알새틴이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려니 옆에서 슬그머니 닉이 나타나 그의 손에 수건을 쥐어 주었다.
알새틴은 그 배려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얼굴에 묻은 맥주를 닦아냈다.
“미안하군. 내 귀가 잘못 되었는지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말이야.”
그 모습을 보던 칼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뒷목을 주물렀다.
“잘못 들은 게 아냐.”
“진짜 내가 여자아이에게 매도당하는 걸 즐기는 성벽이 있냐고 물어봤다고?”
“그래.”
“왜지?”
눈살을 찌푸리는 칼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왜 자신이 그런 질문을 들어야하는 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왜냐고? 진심으로 묻는 거냐?”
“진심이 아닐 리가 없잖나. 나는 알른 가문의 기사다. 그런 의심을 받는다는 자체가 불쾌할 수밖에 없지.”
“…진짜 진심이라고?”
“반대로 묻지. 왜 나를 보고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네가 알른 영애께 하는 행동을 봐라!”
부당을 주장하는 칼의 모습에 알새틴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영애께 개 취급을 받으면 오히려 좋아하고! 비하하는 단어가 순화되면 오히려 슬퍼하고!”
“아아. 그런 부분을 말하는 건가.”
“드디어 이해했냐.”
“그게 무어가 잘못됐지?”
“뭐?”
되물음을 들은 알새틴은 손바닥으로 콧잔등을 강하게 눌렀다.
이 자식은 진심으로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디가 맛이 간 놈이라고 항상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엘리트면서 왜 상식이 없는 거지? 기사로써 일을 하다 머리를 다치기라도 했냐?!”
“아니. 네가 왜 이상하게 여겼는지는 이해했다. 충분히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칼을 보던 알새틴은 자꾸만 커지는 답답함에 술을 단번에 들이키고 나서 소리쳤다.
“그런데 뭐가 잘못됐냐는 말이 나와?!”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봐라. 설명을 해줄 테니.”
“하아. 그래. 말해봐.”
“우선 네가 알아야 하는 게 있다. 바로 내 꿈이지. 나는 음유시인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 싶었다.”
칼은 그리 말을 하고는 자기가 기억하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해골기사가 되어 가면서까지 자기 주인의 무덤을 지키던 자.
주인이 바라는 걸 이루기 위해 언제나 전장의 선두에 섰던 자.
적의 포로가 되었음에도 충의를 지키다 목을 베인 자.
이외에도 칼은 노래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사들의 행적을 입에 담았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나? 바로 이상적인 주인을 모셨다는 사실이다.”
칼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주인의 무능이 기사의 유능을 돋보이게 해줌에도 그랬다.
왜냐하면 칼은 동경을 이루고 싶은 거지 동정을 사고 싶은 게 아니니까.
“생각해봐라. 아가씨께선 어투가 조금 거친 것을 빼면 이상의 주인에 가깝지 않나?”
처음 칼이 루시를 모시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루시를 향한 인정이라 하긴 어려웠다.
그는 부덕하고 부족한 자신을 용서해 준 사람에게 보답하고자 한 것이지 루시를 인정하고 충의를 바친 것이 아니었으니까.
허나 루시의 곁에 머물게 되며 점차 생각이 바뀌어 갔다.
그녀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필요하다 생각한다면 망설임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 어떤 극한 상황의 앞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이였다.
왕국 제일의 재능이 모이는 소울 아카데미의 모두를 압도할 수 있을만한 재능을 지닌 자였다.
“어느 순간 깨달았지. 아가씨께서는 내가 꿈꾸던 이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란 말인가.
속죄를 위하여 모시고자 했던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수 있는 이상이었다니!
루시에게 능력이 없었더라도 칼은 루시를 따랐을 것이다. 그가 느낀 감사는 그만큼 거대했으니까.
허나 루시는 칼이 바라던 것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꿈을 이루어 줄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까!
이 인연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까!
칼이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정작 알새틴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그래. 알른 영애께서 네가 바라던 사람이란 사실은 이해했어. 그런데 왜 그 분의 짓궂은 어투와 행동에 기뻐하는 거냐.”
“아가씨께서 해주는 것이니까!”
루시가 그를 개 취급 한다는 것은 그를 번견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다.
루시가 다른 이들에게 사용하지 않던 비하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를 특별 취급 해준다는 것.
이 또한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다.
“알겠나? 전후가 바뀌었다. 나는 여자아이에게 매도당하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다. 그것이 아가씨가 해주는 것이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변태적인 성욕이 아니라 충의란 말이다!”
한 치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어깨를 피며 소리치는 칼을 본 알새틴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술을 들이켰다.
결국 알른 영애께 매도당하면서 기뻐했다는 거잖아.
그게 여자아이에게 매도당하면서 기뻐했다는 거랑 뭐가 다른 거지?
정상인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하아. 정말로 안타깝군.
생긴 것도 멀쩡하고 능력도 뛰어난 데 그 안에 든 게 이렇게 유감스러워서야.
결혼을 하긴 글렀어.
자기랑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면 평생 혼자서 살아야 할 테지.
알새틴은 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 생각을 입 바깥으로 내진 않았다.
이 광인이라면 아가씨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혼자 사는 게 무어가 대수냐! 같은 소리를 지껄일 게 분명했으니까.
“자! 나는 제대로 대답을 했다. 이제는 내가 묻도록 하지.”
“내가 왜 알른 영애를 따라 이 곳에 왔느냐는 거지?”
알새틴은 칼에게 되물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낀 반지에 저장된 마법을 사용했다.
“…흠. 소리를 차단하는 종류인가.”
“용케도 알았네. 흔히 알려진 마법과는 다른 거라 알아보기 어려울 텐데.”
“보고서 구별하는 게 아니다. 소리가 들리는 걸로 파악하는 거지.”
닉의 숨소리가 사라진 걸 알아챘다는 칼의 답변에 알새틴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능력하난 확실하네. 저 쪽도 뒷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자신의 기척을 지운 채 대기하고 있을 텐데 그걸 감지하고 있었다니.
“뭐. 그건 됐다. 질문에나 대답해라.”
“간단해. 내가 찾는 사람이 여기에 있거든.”
“아가씨께서 입에 담았던 카리아라는 분인가.”
“맞아. 내 스승님이지.”
정작 함께 있을 적에는 스승이라는 이름보다는 아줌마라는 소리를 더 많이 했던 사람.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칼이 팔짱을 꼈다.
“소중한 사람인가보군.”
“쓰레기장에서 죽어가던 나를 주워서 키워준 사람이거든.”
알새틴은 키득거리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태어나자마자 뒷골목에 버려진 것. 살기 위해 걸음마를 떼자마자 구걸을 하며 돌아다녀야 했던 것. 정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죽어라 얻어맞았던 것. 그러다 우연히 주워진 것.
“지금 내가 지닌 것들은 대부분 그 분에게 배운 거야.”
지난 세월 동안 염원하던 재회를 앞에 둔 덕분일까. 아니면 술에 취했기 때문일까.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알새틴의 입은 여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그의 입에서 새나오는 카리아라는 사람의 행적을 듣던 칼은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대단하신 분이군.”
“그치. 예전에는 베네딕 알른 경과 함께 던전을 공략한 적도 있는 분이니까.”
“…뭐?”
굳어버린 칼의 얼굴을 본 알새틴은 키득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농담 아냐. 어차피 얼굴 보면 알 테니까 미리 말하는 거거든.”
“과거 왕궁의 그림자라 불렸던 카리아님이 네 스승이라고? 하. 거짓말도 믿을만한 걸 해야지.”
“진짜라니까?”
알새틴이 웃음기를 띄우며 말을 이었지만 칼은 조금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 때 베네딕과 함께 전설이라 여겨졌던 인물이 어찌 뒷골목에 거주하는 정보원의 스승이라는 걸 믿을 수 있을까.
알새틴도 자신의 말이 먹힐 거라 기대하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른 추억을 이야기했다.
*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하루를 통째로 쉬고 난 다음 날. 나는 인벤토리에 담긴 아이템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제부터 갈 곳은 내가 다녔던 그 어떤 곳보다도 위험한 장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곳은 불을 관장하는 악신이 봉인된 장소이니까.
소울 아카데미의 세계관에는 수많은 신이 존재한다.
이 신이라는 작자들은 전지하고 전능한 절대신보다는 그리스 로마신화 같은데서 볼법한 입체적인 신에 가까운지라 그 행동 양식도 상당히 인간적이지.
보통 수많은 사람들이 뭉치면 집단이 형성 되잖아? 이 세계관의 신들도 마찬가지야.
허접 페도 변태인 아르마디를 중심으로 뭉친 집단과 쪼잔한 아그라를 중심으로 뭉친 집단으로 나뉘어.
이 중에서 전자가 세상의 유지와 안정을 바라는 입장에서 후자는 세상이 한 번 멸망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서로의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했고 결국 말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쟁을 하게 됐다.
그 끝에 승리한 아르마디 측은 악신들을 세상 여러 곳에 봉인 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지.
허나 신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가 있었다.
아무리 봉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신은 신.
그들이 지닌 권능은 자연스레 주변에 영향을 끼쳤고 본래는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바로 대형 던전이다.
아그라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악신의 기운으로 인해 생겨난 비정상적인 환경.
악신이 쐐기로 그 곳에 있는 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곳.
봉인이 무너지는 순간 재앙이 시작이 될 장소.
메네스테일을 재앙에서 구원하라는 퀘스트가 왜 생겨난 건지 알겠지?
지금 그 곳에 봉인을 부수고자 하는 녀석이 있거든.
허접 주신은 내가 그걸 막아주길 바라는 거고.
이번에 내가 마주하게 될 상대는 여태까지 대적했던 그 어떤 녀석보다도 강하다.
나크라드? 걔는 이번에 만날 적에 비하면 개허접이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야.
연금술사? 자신의 던전에서 절대적인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지만 칼의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녀석이지.
그렇지만 이번 상대는 아냐. 그 녀석이라면 칼을 압도할 수 있을 걸.
그런 괴물을 공략하는 게 가능하냐고?
당연하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아니겠어?
저 가정이 성립했던 건 어디까지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니까.
내가 왜 굳이 상대방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워 주겠냐고.
적에게는 최악을, 아군에게는 최선을 선사하는 게 전투의 기본인데.
“후우.”
물건의 확인을 끝마친 나는 기지개를 켰다.
좋아. 상대방에게 고인물이 얼마나 엿 같은 존재인지 알려줄 준비는 끝났어.
귀찮은 일거리를 빠르게 끝내고 조이의 영지에 놀러 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