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9
메네스테일 던전에 진입한 인원은 여태까지 함께 했던 셋이었다.
나. 칼. 알새틴.
원래는 여기에 닉이 수소문해준 수계열 마법사 하나를 끼워 넣을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내가 메그를 상대로 벌인 일이 메네스테일 거리에 퍼져버린 것이다.
백작가 장남이 치욕을 겪은 일이니만큼 공공연연하게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그 뿐. 거리에 사는 인간이라면 그 일에 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메네스테일 던전에서 일하는 이들이 자연스레 날 기피하게 됐다.
메그가 재수 없는 쓰레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게오르크 가문의 장남이다.
녀석에게 밉보이게 되면 메네스테일에서의 생활이 고달파진다.
나야 잠시 있다가 떠날 인간이지만 메네스테일의 모험가들은 이 곳에서 기반을 잡고 생활하는 이들.
감히 메그에게 밉보일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덕분에 난 마법사를 구하는 데에 실패했다.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마법사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돌파의 편의를 위해 필요한 거였으니까.
없으면 좀 더 고생하면 그만이지. 46층의 입구에 선 나는 가만 주변을 살폈다.
“악신이 봉인된 장소로 가는 거군요.”
“긴장되나? 알새틴?”
“당연히 긴장되지.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네가 이상한 거다 칼.”
난 두 사람에게 미리 우리가 향할 곳에 대해 설명해 두었다.
갑작스레 악신이 봉인된 장소에 도달하면 놀랄 것이 분명했으니까.
주신에게서 계시를 받아 악신의 봉인된 장소로 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알새틴이 보인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는 분명 당혹스러워했지만 그 곳에 가야 스승을 만날 수 있단 이야기에 어쩔 수 없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칼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얘가 좀 이상하긴 해도 악신이라는 단어 앞에선 두려움을 느낄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아니더라.
‘어차피 아가씨께서는 그 곳으로 향하실 거잖습니까? 그렇다면 이 칼. 당연히 동행해야지요!’
그리 소리치는 칼의 모습은 어깨를 으쓱이는 충직한 대형견과도 같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웠는지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다니까.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주변을 살피던 나는 위치를 확인해 줄 지표를 발견하고 고갤 끄덕였다.
좋아. 여기가 어딘지 대충 알겠어.
움직이자.
<가면 갈수록 악독한 기운이 심해지는구나.>
악신의 봉인이 있는 장소로 쭉 나아가고 있으려니 할배가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는 익숙하지 않아요?’
한 때 최전선에서 악신과 맞붙었던 사람이다. 할배에게는 지긋지긋한 기운이지 않을까.
<그래. 네 말이 옳다.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할 정도지.>
과거를 곱씹는 단어에는 여러 진득한 감정들이 묻어나 있었다. 너무도 짙어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다. 나는 아직도 이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구나. 너무 위험해.>
‘주신님께서 계시를 내린 일이잖아요. 괜찮을 거에요.’
할배는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내가 여태까지 위험해졌던 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났을 때의 일이잖아.
변수 없이 최선의 준비를 했을 때 내가 위험해졌던 적이 있어?
특히 이번 같은 경우에는 만일의 일까지 대비해 두었으니까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다고.
<그렇다면 좋겠지만…>
‘괜찮을 거래도요.’
할배를 안심시키며 앞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벽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알른 영애도 긴장을 하실 때가 있군요. 이런 실수를 하시다니.”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을 본 알새틴은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 생각한 듯 했다.
‘실수 아닌데요.’
“허접한 네 눈으로 보면 실수처럼 보이겠지. 정보팔이. 진짜 한심하다니까.”
트루 엔딩 스피드런을 하느라 내가 여기에 몇 번이나 찾아왔었는데 이걸 잊어버릴 리가.
알새틴을 가볍게 쏘아 준 나는 인벤토리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이 안에 담긴 것은 페이비의 축복이 담긴 성수다.
그녀가 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성녀인 것은 사실이지만 성녀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의 능력을 지닌 것도 사실.
그녀의 축복이 담긴 성수는 악신의 기운을 몰아내는 데 있어서는 최상의 힘을 발휘한다.
병을 열어 그 안에 담긴 물을 벽에 뿌리자 이내 벽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바닥에 흩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알새틴은 갑작스레 드러난 통로를 보고는 눈을 끔뻑거렸다.
도적 계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어지간한 숨겨진 문은 다 파악할 수 있다 자부하는 그다. 자신이 모르는 기믹이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지.
나도 그랬으니까.
도적계 직업을 최고까지 키우더라도 찾아낼 수 없는 통로. 관련 스토리를 모두 수행해야지만 찾아낼 수 있는 곳.
트루 엔딩을 최초로 본 사람이 되기 위해 달리다가 여길 발견했을 때 얼마나 열이 받았었던지.
상식적으로 숨겨진 통로는 마지막 층에 나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라면서 소리 지르다가 옆집에 민원이 들어왔었는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봐도 좋은 추억은 아냐. 진짜 개 같았거든.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하나 더 꺼냈다.
악신의 기운에서 몸을 지켜주는 귀걸이.
이것도 페이비가 만들어 준 물건이다.
원래는 비싼 값을 주고 이것보다 못한 물건을 사야 하는데 페이비한테 물어보니까 단번에 해결이 되더라고.
이건 게임에서도 안 되던 건데 말이야.
현실의 성녀님은 게임보다 더한 사기캐릭이라니까.
‘가죠.’
“가자.”
악신이 봉인된 던전은 개별로 존재하는 히든 던전 판정이다.
이게 내포하는 의미가 여럿이 있지만 중요한 건 하나다.
이 곳에는 모험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이 곳의 모든 변수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거지.
히든 보스가 도사리는 곳답게 이 곳에 나오는 마물들은 거의 60~70층 사이에 나오는 녀석들이랑 비슷할 정도로 강해.
칼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몰려오는 녀석들을 감당할 수 없을 테지.
근데 강하면 뭐해. 난 걔네랑 싸워줄 생각이 없는데.
내가 수많은 연구를 거듭해 만들어낸 루트를 보여주마!
*
기이했다.
“정면에 고물 돌멩이가 팔을 들어 올릴 건데 무시하고 달려!”
알새틴은 필사적으로 루시의 뒤를 따르며 그리 생각을 했다.
“앞 쪽에 땅이 꺼지는 함정! 뛰어서 넘어가!”
알른 영애는 이 곳에 스승님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난 스승님께서 악신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리라 여겼지.
어둠 속에서 선을 추구하던 분이니까. 살아 계시다면 분명 세상을 위해 일하실 테지.
“허접들! 2초간 정지! 그리고 다시…”
죽어버린 스승님의 시체를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 부정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봤다.
악신이 봉인된 곳에 들렀던 사람의 흔적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것은 분명 그럴 의미일 테니까.
무엇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알른 영애의 경고도 있었으니.
사실상 스승님께서는 죽었다 봐야 할 테지.
“달려! 허접들!”
알새틴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분께서 살아계시다면 무척이나 기쁠 것이고, 그 분의 시체를 보게 된다면 분명 슬프겠지만 무덤을 만들어드리며 내 마음 속에서 완결을 낼 수 있을 터.
어쨌든 간에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알새틴은 생각했다.
“셋 세면 뛰어 내려! 그 정도도 못하는 개쫄보 허접들은 아닐 거 아냐!”
허나 기이하게도 이 곳에 진입한 후로 알른 영애는 단 한 번도 스승님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던전을 주파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 뿐.
어째서일까. 알새틴이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의심이었다.
루시가 그를 이용하기 위해 스승의 이름을 들먹였다는 것.
허나 알새틴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것이었다면 스승을 만나게 해주겠단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으셨겠지.
그 다음으로 떠올린 건 의문이었다.
알른 영애께서도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 건가?
알새틴은 또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이 분께선 여태까지 자신의 능력을 숨김없이 보이셨다. 이 분이 던전 안에 존재하는 일을 모를 리가.
그렇다면.
“정보 팔이! 뭐해!”
의문을 반복하다 뒤쳐진 알새틴의 모습에 루시가 소리를 내질렀다.
알새틴은 그제야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꽃을 발견했다.
이런. 피하기는 늦었다.
그렇다면 팔로 받아내어 피해를 최소화 하고…
알새틴이 불꽃을 맞을 각오를 하던 중 루시가 그의 목을 끌어당기고는 앞을 방패로 가렸다.
퍼어엉!
화염이 방패에 착탄하며 거대한 충격을 만들어냈지만 방패는 굳건했다.
“개허접 정보팔이♡ 매도 당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래?♡ 우리 허접견보다 더한 변태였구나?♡ 개목걸이 걸어서 끌고 다녀 줄까?♡”
“죄송합니다. 집중하겠습니다.”
…일단은 던전을 진행하는 데 집중하자.
저 변태 기사보다 못한 놈이 될 수는 없으니까.
경이에 가까운 루시 알른의 지휘 덕에 한 번의 전투도 거치지 않고 보스룸 앞에 도착한 후 알새틴은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루시에게 다가갔다.
“뭐야? 마조 정보팔이?”
“…알른 영애.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바보 같은 스승에 대해서지?”
“예. 감히 영애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제 보게 될 거야. 참을성 없는 허접아.”
루시는 그리 이야기를 하며 보스룸의 문 너머를 쳐다봤다.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알새틴은 눈치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저 너머에 스승님이 계신 겁니까?”
“이 정도는 알아듣는 구나? 개보다는 낫네. 인간이하인 건 똑같지만.”
보스룸 너머에 스승님이 계신다는 것은.
하. 그런가.
그 분께서는 저 곳에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것인가.
스스로의 이상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으신 것인가.
그림자로써 세상을 위해 일하려다.
…끝까지 미련한 아줌마였네. 내게는 언제나 약삭빨라야 한다고 가르친 주제에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사정을 이해한 알새틴은 그 이상 루시에게 물음을 던지지 않았고 루시도 굳이 그에 관해 말을 더하진 않았다.
루시는 그 대신 보스룸에 들어갔을 때 어찌하면 될 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제부터 만나게 될 보스를 공략하는 방법에 대해서.
보스가 사용할 여러 공격과 그를 파훼하는 방법에 대해서.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숙련된 지휘관인 그녀의 전략은 알새틴은 물론이고 칼마저 감탄할 정도로 명확했으니.
이번 공략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손쉽게 끝날 게 분명해 보였다.
“허접들. 일어나. 움직일 시간이야.”
모든 설명이 끝나고 보스룸에 입할 시간이 되었다.
칼은 자신의 검에 오러를 두르며 심호흡을 했고, 알새틴은 화살과 여러 도구를 점검한 후 입술을 곱씹었으며, 루시는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보스룸의 문을 밀어서 열었다.
“주제를 모르는 놈들. 나를 방해하러 왔느냐.”
그 때 알새틴은 루시가 이야기했던 대로 자신의 스승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룸의 가운데에 서 있는 여성은 분명.
그의 스승.
카리아였으니까.
“알른 영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닥쳐봐. 정신 사납잖아.”
너무도 당혹스러워서 말을 꺼냈던 알새틴은 루시의 날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시 알른은 자신의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