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4
“으에엑.”
순간이동의 진을 사용한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에 바닥을 뒹굴었다.
이전에는 얼빠여우가 해 준 무언가 덕분에 금방 회복할 수 있었던 나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얼빠여우가 곁에 없었다.
녀석이 발 한 자국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라며 동행을 거부한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억지를 부려 보았겠지만 난 얼빠여우에게 목숨을 구원당한 입장. 은혜를 아는 짐승이었던 나는 그녀에게 강하게 나설 수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순간이동의 여파를 악으로 극복해야만 했다.
으으. 평소보다 몸 상태가 안 좋은 탓일까.
이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아가씨.”
속으로 끙끙거리고 있으려니 귓가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바로 그 목소리를 낸 주인이 누군지를 눈치 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루시의 몸에 빙의하고서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 항상 내 곁에 머무르며 나를 보살펴 주었던 이의 목소리를 어찌 잊겠는가.
“괜찮으십니까?”
비틀거리며 일어선 내 눈에 걱정이 가득 담긴 그녀의 눈이 보인다.
‘에린.’
“허접 에린.”
“네. 당신의 전속 시녀인 에린입니다.”
자신을 하루 종일 괴롭히던 사람이 돌아왔으니 싫은 티를 낼 법도 한데 에린은 시녀로써의 역할에 충실했다.
역시 루시에겐 아까운 인재야.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듯한데 업어드릴까요?”
“에린. 그거라면 제가.”
칼이 한 마디를 꺼내기 무섭게 에린이 그 쪽을 노려본다.
어. 얘가 이렇게 기가 센 사람이었나?
예전에는 분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회초년생 같은 애였는데?
“제 역할입니다.”
“넵.”
그 눈앞에서는 칼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 강제로 나를 품 안에 안은 에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로 저택으로 향하실 겁니까?”
‘아뇨…’
“아니?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어. 허접 에린.”
내가 속이 울렁거릴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알른 가문의 영지에 되돌아 온 이유는 하나였다.
이번 파티의 마지막 한 명.
카리아를 조종하고 있는 저주를 해주해 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이게 게임이었을 적엔 보통 이 역할을 페이비가 해줬다.
교회에 의해 성녀라 받들어질만한 능력과 재능을 지닌 그녀는 이런 정화와 구원에 있어서 치트키 같은 역할을 해주었으니까.
오죽하면 페이비가 끼면 게임이 너무 쉬워지기에 대부분의 고인물이 의도적으로 페이비를 배제하고 게임을 했겠는가.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지금의 페이비는 아직 불의 악신이 내린 저주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여러 수단을 뒤섞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날로 먹기로 결심한 상황에서 발악을 할 필요는 없잖아?
쉬고 있는 페이비를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나는 페이비의 대체를 맡아 줄 사람을 찾아 알른 영지에 왔다.
내가 아는 성직자 중에서 가장 믿음스러운 인간이 여기에 있거든.
‘안녕하세요. 주교님.’
“안녕. 꼴통 주교. 오랜만이네? 안 그래도 꼰대 같은 얼굴이었는데 주름이 더 늘어서 완전 심술궂어 보여.”
“그것 참. 최근 너무 일을 열심히 한 탓인가 봅니다.”
요한.
이게 게임이었을 적에는 지금쯤 주신 교회의 성지에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어야 할 인물.
이 세상에 알른 가문이라는 변수에 생김에 따라 이 곳에 오게 된 이.
신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그 뜻과 선함을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극성 신도이자 교회 최고의 강경파.
훗날 여러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력과 평판으로 추기경 자리에 도달하는 이 사람은 지금 내가 기용할 수 있는 성직자 중 최고의 인선이라 할 만 했다.
“소울 아카데미가 방학을 했기에 돌아오실 것은 알았습니다. 여기에 방문하신 까닭은 신성 마법을 수련하기 위함입니까?”
‘아뇨. 지금은 아니에요.’
“꼴통 주교. 날 그렇게 괴롭히고 싶어? 징그러운 노친네 같으니. 지금은 아냐.”
“그럼?”
‘이거 좀 봐주세요.’
“이걸 봐.”
나는 알새틴에게 받아 온 음성차단의 마법 반지를 사용한 후 서류를 요한 앞에 내던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던 그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 알아내신 겁니까.”
‘글쎄요? 어디설까요?’
“그을쎄? 주신처럼 허접한 개허접 주신 교회는 틈이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진지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은…’
“일단 더 읽어봐. 아무리 늙었어도 그걸 읽을 기력도 없진 않잖아?”
“…”
내가 요한에게 건네준 것은 이전에 알새틴이 조사해왔던 주신 교회의 뒷모습에 대한 것이다.
시간이 모자라 명확한 증거까지 잡아내진 못했지만 주신 교회가 수상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추측하기엔 충분한 서류.
요한은 굳은 얼굴로 그를 읽어 내린 끝에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알른 영애.”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서류에 담긴 내용이 주신 교회가 무언가 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명확히 명시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다만 그는 자애도 귀찮음도 아닌 오롯이 엄격함만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냈다.
“이를 제게 보여주신 저의가 무엇입니까.”
요한은 저기에 적힌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새틴이 조사해 온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당연한 일이다. 차기 추기경 자리에 오를 만큼의 능력과 인맥이 있는 그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에 대해 모를 리가 있나.
‘뭐라고…’
“뭐라고 생각해?”
“협박…은 아니겠죠. 이전이라면 모를까 달라진 영애께선 이리 허술한 증거로 일을 벌이진 않을 테니. 단순히 제게 알리기 위함이라 하기엔 제 무덤덤한 반응을 예상하신 듯 하고. 제 반응을 보는 것 자체가 목적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 뒤는 잘 모르겠군요.”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역시 요한 주교야. 성격이 꼰대같긴 하지만 유능하다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 주교가 보란 듯 한숨을 내뱉었다.
“무얼 바라셨던 간에 먼저 조언을 드리자면 이 건에 대해 이 이상 파고들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왜죠?’
“왜?”
“아무리 베네딕 경이 당신의 뒤를 지킨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당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그 동안에 쌓인 여러 정이 있기에 조언해 주는 것이라 말하며 서류에다 불을 붙였다.
신성으로 이루어진 불꽃은 요한의 손 위에서 서류를 불태우고는 재를 남기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당신께서 보았듯 주신 교회는 올바르기만 한 곳이 아닙니다. 과거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음험하고 더러운 곳이죠. 그 곳은 바름을 표방하지만 올바름이 퍼지기를 원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잊어라. 자신도 이 일을 잊을 테니 당신도 이 일을 잊어버려라.
요한은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재를 손으로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유능하신 알른 영애시니 이 쯤 했으면 제 말을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혹여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지금 제게 물어보십시오. 소리를 차단해둔 마법을 강화해 두었으니 바깥에 이야기가 퍼질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지간한 것은 답해 드리죠.”
요한은 그리 이야기하며 어느새 무덤덤해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난 요한에게 답하기 전에 할배를 불렀다.
‘어떻게 생각해요?’
<믿어도 괜찮을 것이다. 여태까지 봐온 바 이 자가 지닌 신앙은 분명 진실 되니.>
게임 속의 요한 주교는 나쁜 말로 묘사하자면 꼰대에 꼴통이긴 했지만 좋은 말로 하자면 자신에게 한없이 엄격하기에 남에게도 엄격한 인물이었다.
신의 뜻이 올바르게 퍼지기를 바라는 교회 내 최대의 강경파.
그것이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함이라면 교회가 한 번 무너지더라도 괜찮다 생각하는 사람.
지금은 승산이 없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으나 때가 오면 목숨을 걸고 교회를 대적하길 망설이지 않는 자.
페이비를 도와 교회에 적대하는 것을 택했을 때 이 사람은 언제나 아군이 되어줬었지.
아마 지금도 그럴 거야.
페이비가 자신의 선을 행하기 위해 교회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 판단한다면, 요한은 아무 망설임없이 그 뒤를 지키며 자신의 목숨을 바칠 거야.
이 사람이 게임과 똑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그렇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다.
할배가 확언해 준 대로 요한이 지닌 신앙이 진실하다면.
요한은 교회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페이비에게 있어서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인물이라는 것.
언젠가 페이비가 진실을 깨달았다는 걸 교회에서 눈치 챘을 때 교회 내부에도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먼 훗날의 페이비라면 자기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 보이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불완전하니까.
그 곁을 지탱해 줄 사람을 구해 둬야지.
언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난 내가 아는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내가 순간이동의 울렁거림을 견뎌가면서 여기에 온 이유가 바로 이거야.
안 그래도 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었는데 마침 부탁할 거리가 생겼거든.
겸사겸사라는 거지.
자. 그럼 틱틱대면서도 자기와 연이 있는데다 훗날이 창창해 보이는 꼬맹이를 걱정하는 중인 이 할아버지를 설득해 볼까?
‘할아버지! 헬프!’
<하아. 언젠가 여유가 생긴다면 그대에게 화술도 알려주어야겠구나.>
물론 내가 아닌 할배가!
난 이런 거 잘못한단 말이야!
할배에몽! 도와줘!
<우선 해야 할 것은…>
*
루시 알른이 떠나고 난 후 요한은 찻잔 안의 식어버린 차를 바라보다 등받이의 등을 기댔다.
처음 루시가 교회의 비리와 관련된 서류를 보여주었을 때 요한은 루시가 옛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비꼬려 한다 생각했다.
협박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루시는 그딴 허술한 자료로 어깨를 필 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허나 정작 모든 것을 까놓고 보니 루시의 목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친해진 현 성녀 페이비가 거짓된 성녀라는 것을 알고는 그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 절벽에서 끌어올려 줄 사람을 찾아 이 곳에 온 것이었다.
‘꼴통 주교는 교회를 뒤엎고 싶은 거잖아?’
어떤 식의 조사와 추측을 거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시는 요한의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속이 썩을대로 썩어버린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누군가 듣는다면 기함할 법한 이야기를 루시는 너무도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허접 페도 주신의 사랑을 받는 유능하디 유능한 내가 널 도와주도록 할게. 그 대신 부탁이 두 가지 있어.’
본래라면 요한은 고개를 저은 후 이 자리에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자 답했을 것이다.
그녀의 성장세를 생각해본다면 훗날 루시가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허나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분명한 아이를 위험에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가 하면 족할 일이었다.
허나 요한은 그녀와의 거래를 진지하게 듣고 수락했다.
루시가 목에 차고 있는 십자가가 빛나는 것을 보았기에.
신 따위는 없다면서 교회에서 깽판을 치던 꼬맹이가 어쩌다 저리 커버린 건지 모르겠군.
사람이란 바뀌는 것이군요. 위대하신 아르마디시여.
“펠빈 사제. 바깥에 있나?”
“네! 있습니다. 주교님!”
“내일 급한 일정이 생겼다.”
악신의 저주에 당한 이를 구원하는 일인가.
최선을 다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