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5
루시가 올 거라는 소식을 들은 베네딕은 집무실에서 빠져 나와 백작 가의 비고를 찾았다.
“당주님께서 이 곳에 오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군요.”
“그런가?”
“예. 안주인께서 긴 여행을 떠나신 후부터는 가문을 나가지 않으셨으니까요.”
집사장이 건넨 열쇠를 받은 베네딕은 문을 열고서 안으로 향했다.
그 입구를 장식한 건 여러 종류의 사치품이었다.
과거 비싸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루시가 가져가면 안 되느냐 떼를 쓰던 물건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바뀌어버린 루시는 주겠다 말해도 저걸 어디에 쓰느냐 되묻는 물건들.
베네딕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지나쳐 안 쪽으로 들어갔다.
과거 베네딕이 왕국을 위해 일하며 받았던 수많은 보석들.
던전을 공략하며 습득했던 여러 무기와 방어구들.
마법이 담긴 스크롤들.
귀한 물약들.
그 모두를 지나친 베네딕이 도달한 비고의 끝에는 갑옷이 있었다.
빛조차 흡수할 것처럼 진득한 검은색으로 칠해진 갑옷은 거대했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이 저를 뒤집어쓴다면 갑옷에 짓눌려 압사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관리를 잘했군. 집사장.”
“하하. 고생을 깨나 했지요. 갑옷 한 부위를 들어서 움직이려면 적어도 네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베네딕은 그를 장난감마냥 집어 들어선 하나 둘 몸에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 갑옷을 입지 않은 지 벌써 십 년에 달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 때는 피부처럼 여겼던 물건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여 어색함이 있을 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방어구를 착용한 베네딕은 더 앞으로 걸어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알른 가문의 전해져 내려오는 무기 중 하나.
머나먼 선대가 사용했으며 긴 세월 먼지만을 뒤집어쓰다 베네딕의 손에 들려 옛 영광을 되찾은 거대한 대검.
자신의 눈앞에 손잡이가 있음에도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고 두꺼운 검을 살피던 베네딕은 긴 숨을 내뱉은 후에 그 손잡이를 붙잡았다.
건틀렛 너머로도 전해지는 묵직함에 베네딕이 가볍게 웃음을 짓는다.
“진기한 일이야. 사라진 줄 알았던 카리아를 루시가 만나게 되다니. 이 또한 신의 인도일까.”
“그럴 겁니다. 위대한 주신께선 아가씨를 사랑하시는 듯 하니.”
“불경한 이야기지만 아비의 입장에선 실로 불쾌한 이야기야. 루시는 그저 평온한 삶을 살길 바랐거늘.”
방황하고 헤매던 딸아이가 변화한데에 주신의 은덕이 있음을 모르진 않는다.
못난 아버지가 해야 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이루어 주셨음에는 물론 감사하고 있다.
허나 아버지라는 족속은 딸아이의 일에 한없이 이기적인지라.
줄 것을 주었다면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떠나가 주기를 베네딕은 원했다.
아님 차라리 자신에게 그 대가를 청구하길 바랐다.
세상 일이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음을 알면서도.
“하하. 당주님. 아가씨와 평온함이란 단어가 어울린다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니지. 우리 딸은 사고를 치지 않으면 못 사는 성격이니까.”
집사장의 농담에 키득거리며 베네딕이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베네딕은 루시가 방학이 되자마자 메네스테일로 향한 것이 단순한 변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신의 은덕을 받은 후부터 강함에 집착하기 시작한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효율성에도 집착한다는 걸 알았기에.
던전을 공략하는 경험을 쌓고자 한다면 메네스테일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 멀고 험한 메네스테일로 가겠다 고집을 부린 데엔 분명 다른 이유가 존재하겠지.
높은 확률로 그 이유는 흔히 신탁이라 불리는 것일 테고.
“그러니 이 아비가 최선을 다해야겠지.”
단순하게 카리아만이 메네스테일 던전에서 발견되었다면 베네딕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베네딕의 가까운 동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다.
지금의 그에겐 그녀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존재한다.
정치적 부담과 실질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그 곳에 갈 이유는 없다.
허나 이번엔 달랐다.
카리아를 발견한 것은 루시였고, 그녀는 카리아를 구하길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바람을 위해 이 파파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비된 자로써 어찌 딸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베네딕은 잠시나마 긴 침묵을 끝마치고 몸을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가뿐하게 검을 뽑아든 베네딕은 그를 등에 걸치고서 등을 돌렸다.
“우리 딸의 평온을 위하여.”
베네딕이 집사장과 함께 미소를 짓던 그 때 비고의 안으로 시종 중 하나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당주님!”
“무슨 일이지?”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루시가?”
“예. 그렇…”
베네딕은 시종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비고 바깥으로 내달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귀중한 딸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파파라 부르는 그 귀여운 애교를 보기 위해서!
잔뜩 들뜬 베네딕의 뒷모습을 보던 집사장은 쓴웃음을 짓다가 밀려나 쓰러진 시종을 일으켜 줬다.
*
가문의 문을 박차고 등장한 베네딕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에 난 속으로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빛조차 새어들어가지 않을 듯한 검고 두터운 갑옷을 입고 거대한 대검을 등에 찬 그의 모습은 어느 영웅담의 주인공처럼 보였으니까.
과거 전장을 돌아다닐 때 베네딕의 모습은 저랬었구나.
저러니까 다들 베네딕의 이름을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지.
저런 괴물 떡대가 전선에 서서 자기만한 대검을 휘두른다고 상상해봐. 진짜로 끔찍하잖아.
허나 그 멋있다는 탄성은 내 존재를 확인하고 녹아내리는 베네딕의 얼굴을 본 순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갑옷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쿵쿵 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내 앞에 도착한 그는 자그마한 동물을 껴안듯 조심스레 나를 품에 안고는 우는 소리를 냈다.
내가 없어서 너무나도 외로웠다던가.
위험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졸여 달려가고 싶었다던가.
친구를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거나.
통신 마법으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하는데 베네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은 건지 나를 끌어안고 풀어 줄 생각을 않는 그는 내가 항상 보던 딸바보 베네딕이었다.
그건 메네스테일 던전 공략에 대한 회의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별 다르지 않았다.
“루시. 왜 파파라고 불러주지 않는 거니. 지난 번에 통신 마법으로 대화할 때는 파파라고 불러줬으면서 대체 왜!”
자기를 파파라고 불러달라며 떼를 쓰는 베네딕의 모습에 게오르크 백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베네딕?…’
“바보 아버님? 나 이제 아버님이 부끄러워지려고 하는데. 징그러운 목소리 좀 그만 내면 안돼?”
“또 그러는 구나. 자. 따라해 보렴. 파파란다. 파파.”
어떻게든 파파라는 호칭을 받아내겠다는 듯 고집을 부리는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걸까. 미간을 누르고 있던 요한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베네딕 경.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 자리가 단순한 사교 자리가 아님을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야기할 거리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여기서 주책을 떠는 거냐는 요한의 간언에도 베네딕은 당당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하아. 마음대로 하십시오.”
남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권력.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
거기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뻔뻔함.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로 합쳐진 베네딕은 브레이크를 뜯어 버린 트럭이었다.
루시가 누구를 보고 망나니가 된 건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기분 탓일까.
그 대책 없는 주책에 두 손을 든 것은 내 쪽이었다.
“바보 파파♡ 닥쳐♡”
내 입에서 결국 파파라는 단어를 꺼낸 게 기쁜 듯 히죽거리는 베네딕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인간이 만날 이러니까 주변에서 베네딕이 대단하다 뭐다 이야기해도 체감이 잘 안 되지.
내 입장에서 베네딕은 자기 딸이 너무 귀여워서 사족을 못 쓰는 바보 아빠일 뿐인 걸.
베네딕이 벌인 기행 덕분일까.
처음 모였을 때만 하더라도 딱딱하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베네딕은 이걸 노리고서 바보처럼 보이는 행동을 한 걸까?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선 탁자 앞에 섰다.
“루시. 네가 바라는 대로 조용히 하긴 하겠다만 그 전에 정리해둘 것이 몇 있어서 말이다. 다른 두 분?”
방금 전 떼를 쓰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건지 무겁고 진중한 어투와 눈빛으로 응접실의 공기를 붙잡은 그는 요한과 게오르크 백작을 불렀다.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저희 셋이 이렇게 뭉친 까닭은 루시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예에. 그렇죠.”
“물론입니다. 베네딕 경.”
“그러니 이번 일의 전권을 쥐는 것은 루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베네딕이 꺼낸 말에 다른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가장 놀란 건 내 쪽이었다.
난 이번 일을 주도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 회의를 주도할 생각은 없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야 내가 전권을 쥐는 게 맞다.
거기선 내가 최고니까.
실적이건 실력이건 나를 뛰어넘는 사람이 없으니 내 말이 힘을 얻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는 다르다.
베네딕도. 요한도. 게오르크 백작도.
모두들 자신의 자리에서 업적을 이룬 이들이다.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여자아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이유가 없다.
이 자리에서 내가 목소리를 높인다한들 단기간에 신뢰를 얻긴 어렵지.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여러 정보를 전해준 후 전체적인 틀은 베네딕에게 맡기고 중요한 순간에만 개입하고자 계획했다.
허나 베네딕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들을 모은 것이 나이니 내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베네딕 알른 백.”
거기에 가장 먼저 의문을 표한 건 게오르크 백작이었다.
“백의 따님께서 유능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허나 그렇다 하여도 아직은 지닌 것보다 부족한 것이 많을 테지요. 훗날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게오르크 백작.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제 딸은 더 유능합니다. 루시는 주신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요.”
베네딕의 말에 요한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잠시 날 바라보다 무언가 납득한 듯 고갤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냈다.
“그렇군요. 알른 영애께 전권을 맡기는 것이 낫겠군요.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저희가 보충하면 되는 문제니 말입니다.”
“요한 주교. 당신이라면 알아줄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게오르크 백작이 반대의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리가.
그가 떨떠름한 듯 고개를 끄덕임에 따라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몰린다.
“자. 루시. 네 계획을 이야기해 보거라.”
베네딕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런 걸 추측하기엔 부족함이 많으니까.
그렇지만 무얼 해야하는지는 알 것 같다.
‘좋아요. 베네딕.’
“덩치만 큰 바보 아버님이 자신이 없다니까 어쩔 수 없네. 해줄게. 지휘.”
내가 어깨를 피며 그리 이야기를 하자 베네딕이 날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걸 원하던 거지? 베네딕?
“루시. 파파라고 해야지.”
그 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