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빛을 뿜어내는 은하수가 걸린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폭신폭신한 잔디가 촘촘하게 깔린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 깔린 잔디는 고급 카펫처럼 푹신푹신했고, 그 위로 펼쳐진 밤하늘에는 달이 없이 별빛만이 가득했지만 전혀 어두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잔디와 밤하늘뿐인 신기한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 속에서 황금 사신이 벌판 여기저기에서 잔디 위에 널브러진 채, 나타나기 시작했다.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황금 사신은 눈을 뜨자마자, ‘만세!’ 자세를 취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은 죽은 미니 사신이 잠시 머무는 미니 사신 발할라였다.
오늘까지는 자살 공격을 자주 감행하는 황금 사신 전용 벌판이었다.
벌판 한가운데에는 두 종류의 커다란 문이 열려있었고, 그중 하나의 너머에는 밝고 따뜻한 미니 사신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황금 사신들은 여기에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닌지,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히히 웃고 있었다.
‘아, 또 죽어버렸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황금 사신이 가득한 벌판에 이질적인 미니 사신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검은 사신들은 발할라에 처음 와본 거지만, 익숙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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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사신 발할라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 눈치의 검은 사신들을 보고 황금 사신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잔디 위에 널브러졌다.
검은 사신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 주고 싶어서 검은 사신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던 황금 사신들이었다.
검은 사신을 시작으로 온갖 종류의 미니 사신들이 발할라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너무 춥고 아파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오들오들 떠는 푸른 사신.
어리둥절한 표정의 붉은 사신.
눈을 꼭 감고 회전초처럼 바닥을 굴러다니는 주황 사신.
그런 미니 사신들을 향해서 황금 사신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들었다.
자신들이 처음 죽었을 때의 혼란을 생각하면서, 다른 미니 사신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도록 달려들었다.
‘괜찮아!’
해맑게 웃고 있는 황금 사신들은 미니 사신들에게 위로가 되는 따뜻한 의지와 함께 상황설명을 전달해 주었다.
혼란에서 벗어난 미니 사신들은 벌판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벌판뿐이라는 미니 사신에게 정말 재미없는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미니 사신들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 위의 은하수가 빛의 고리처럼 둥근 원을 그리는 순간, 미니 사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엄마!’
벌판 위에 대자로 누워있는 회색 사신을 발견하고 미니 사신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
추워.
추위와 함께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의 중심에서부터 살이 얼어붙는 것 같은 추위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한기가 사그라들자, 비로소 주변을 인식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죽은 것처럼 끝없이 펼쳐진 어둠뿐이었다.
살점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으면 이런 식으로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지 않고, 재생할 수 있었을 텐데.
아예 세상이 어둠으로 물든 건, 처음이었다.
내가 죽은 건가?
나는 내 파괴 조건을 볼 수가 없어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진작에 아이들의 파괴 조건을 봐둘걸 그랬어.
황금 사신은 당연히 멀쩡하겠지만, 다른 녀석들도 멀쩡할 것 같으면서도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황금 사신이 파괴 조건을 보는 걸 너무 싫어해서 다른 미니 사신들의 조건을 안 봤던 게 실수네, 실수야.
괜히 불안해지잖아.
어둠으로 가득한 시야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수면 위에서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멀지만 둥글게 보이는 수면 너머로 수많은 미니 사신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황금 사신, 검은 사신, 푸른 사신, 붉은 사신, 주황 사신.
내가 데리고 나왔던 미니 사신들이 전부 있었다.
다행이야.
다른 미니 사신들도 파괴 조건이 정원의 파괴나 나의 죽음으로 되어있나 보네.
이대로 몸을 띄워서 수면 밖으로 나가면 깨어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대로 물속에 잠긴 채 가만히 있었다.
한 가지 고민 때문이었다.
아귀 사신을 어떻게 하지?
유령화-겹치기도 안 통하고, 공간 조작도 안 통하니 막막한 기분이었다.
분명 ‘눈동자’의 능력일 텐데, 도저히 닿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나도 교주처럼 능력 무효화를 쓸 수 있었다면, 하얀 불을 붙이고 마구 때려줄 텐데!
아귀 사신의 머리통을 마구 때리는 상상을 하며, 물속에서 양손으로 뚜시뚜시를 날렸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미니 사신들 너머로 밤하늘과 그 밤하늘에 걸린 빛의 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주 보던 빛의 고리인데도, 왠지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저거 내가 머리 위에 뒤집어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빛의 고리와 함께라면 아귀 사신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나는 수면 위로 헤엄쳐서 올라갔다.
올라가는 순간 주변에서 잔뜩 의지가 밀려 들어왔다.
‘엄마, 일어나!’
‘엄마, 어디 아파?’
미니 사신들이 내 볼을 콕콕 찌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다!’
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미니 사신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달라붙었다.
‘너희들도 괜찮아?’
내가 미니 사신들을 걱정하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엄마 상냥해!’라고, 마구 전달해 오며 달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황금 사신들이 매번 자살 공격을 하는데, 걱정해 준 적이 없었구나.
해맑게 웃으면서 몸을 던지길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금 사신들도 춥고 아팠을 텐데!
나는 고마움을 담아서 미니 사신들을 잔뜩 끌어안고, 하나하나 감사를 전달했다.
미니 사신들은 추위와 공포는 이미 잊어버린 것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기뻐했다.
나는 다시 죽기 싫은데, 얘네들은 별로 무섭지도 않은지 해맑게 웃기만 했다.
‘그럼 가자.’
미니 사신들을 모두 쓰다듬어 준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두 개의 커다란 문을 바라보며 하늘 위에 걸린 ‘눈동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빛의 고리처럼 생긴 눈동자는 마법처럼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렇게 작아진 상태의 눈동자를 보니, 마치 천사의 링처럼 생겼네.
그리고 그 천사의 링을 머리 위로 올리면서,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죽었던 곳으로, 그리고 아귀 사신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
커다란 문을 넘어 전장에 도착하자, 예상외의 격통이 온몸을 불태웠다.
머릿속에서 붉은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마치 꿈속에서 본 검은 사신처럼 피부가 검게 물들었고, 장작은 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헤일로가 문제였다.
마치 110v 짜리 전자 제품을 220v에 연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격보다 고전압이 걸린 전자 제품처럼 회로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뀨.”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지친 모습으로 자세를 잡는 아귀 사신이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서, 그대로 공간을 움켜쥐었다.
끼이이이익!
마치 공간이 갈리는 것처럼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공간 자체가 울렁거리면서 진동을 시작했다.
푸딩처럼 쉽게 움켜쥘 수 있었던 공간이 뭔가에 걸려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피하게 해주는 눈동자와 모든 능력을 무효화하는 눈동자의 충돌이었다.
와그작.
그 충돌이 끝나는 순간, 마치 거대한 괴물이 베어 문 것처럼 아귀 사신의 팔 한쪽을 날려버렸다.
어때!
나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억지로 펴서, 비웃음을 띄웠다.
이제 너의 빗나가는 능력은 무효화됐어!
하지만 아귀 사신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귀 사신은 내 틈을 노리고 달려들며, 커다란 대검을 휘둘렀다.
호흡도 하지 않는 내 사고의 빈틈을 파고든 아귀 사신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다가온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그 공격의 궤적을 계속 눈에 담으며, 양팔을 벌린 상태로 그대로 맞아주었다.
아귀 사신이 휘두른 대검의 칼날은 정확하게 내 목에 틀어박혔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목이 뎅겅 잘리는 일도 없었고, 하얀 화염에 휩싸여 내 몸이 사라져 버리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야, 대검의 하얀 불꽃은 ‘눈동자’의 능력이 아니니까.
물리 면역을 마구잡이로 절단하게 해주던 빛무리는 내 몸에 닿는 순간 그 빛을 잃어버렸다.
‘이게 바로 무효화라는 거야.’
나는 히히 웃으며 그대로 벌렸던 팔을 접어서, 아귀 사신을 꽉 끌어안아 버렸다.
그리고 내 몸을 중심으로 공간을 그대로 움켜쥐어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들었다.
‘뀩’은 피해버릴 테니, 이런 식으로 공간을 붙잡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귀 사신은 나를 떨쳐내기 위해서 송곳처럼 바꾼 팔꿈치로 나를 마구 내려찍었지만, 물리 면역을 뚫을 수는 없었다.
‘너는 더 이상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어.’
주먹과 발 그리고 팔꿈치가 내 검은 피부 위로 수없이 많이 떨어져 내렸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공간 절단 같은 특별한 수단이 아니고서는 물리 면역을 뚫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 당황하는 아귀 사신을 중심으로 공간을 우그러트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권능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강력한 ‘눈동자’의 능력이 서로 충돌하면서 엄청난 소음을 발생시켰다.
충돌하는 힘의 여파가 충격파로 변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고, 주변의 공간은 바람에 출렁이는 파도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귀 사신은 공간이 일그러지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팔과 다리를 이용해서 때리는 것을 넘어서, 이젠 입을 벌려서 물어뜯기도 했다.
처절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쇠와 쇠를 긁어내리는 듯한 소음이 멈추는 순간, 커다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와그작.
그리고 그 폭발음이 사그라지자, 고요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공간 자체가 깨진 유리처럼 이리저리 금이 가 있었고, 그 중앙에는 가만히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는 아귀 사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귀 사신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나 분노했고, 그렇게나 치열하게 공격해 왔던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치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뭔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으로.
굉장히 지쳐 보였지만 평온한 미소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아귀 사신은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보며 작게 울었다.
“뀨.”
그 순간 공간이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귀 사신의 전신은 유리처럼 깨어지며, 공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깨어져 나간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격렬하게 충돌했던 힘의 여파가 사그라든 곳에 아귀 사신의 잔해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는 헤일로가 허공에 홀로 떠 있었다.
<헤일로를 분리한다.>
이 파괴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 나는 천천히 헤일로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내 손이 따스한 온기를 주변에 뿌리는 헤일로의 빛을 가르고 그 ‘눈동자’를 건드리자, 갑작스러운 반응이 일어났다.
접촉하는 순간 빛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헤일로에게 묶여있던 힘이 풀려나와 하늘을 향해 강렬한 섬광을 쏘아 보냈다.
헤일로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파괴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나를 무지 고생하게 만들던 아귀 사신을 물리친 순간, 나는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헤일로를 집어던져 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헤일로는 섬광으로 변해 하늘로 솟구쳤고, 검게 물들었던 내 피부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드디어 끝났다!
나는 후련한 기분을 만끽하며 미니 사신들을 불러들였다.
‘엄마 강해!’
‘강해!’
미니 사신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바닥에 눕자, 미니 사신들이 내 배 위로 잔뜩 올라와서 같이 뒹굴뒹굴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아귀 사신이 마지막에 보여준 미소는 뭐였을까?
안타까운 동경이 담긴 것만 같은 미소였기에,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