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7
[아그라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내가 루시의 몸을 빌린 후로 수도 없이 보았던 문구.
나올 때마다 나의 목숨을 위협했던 문구.
나에게 수많은 트라우마를 남겼던 문구.
다른 때였다면 난 저를 보고서 입술을 꾹 깨물었겠지.
허접 주신의 무능을 비난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을 테고.
어떻게든 발악해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그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에 난 당당할 수 있었다.
카리아의 무감정한 눈을 노려볼 수 있었다.
야. 쪼잔한 악신아. 너 조급했구나?
이 파티가 만전의 상태로 돌아온다면 이길 자신이 없어서 기습을 시도한 거야.
그렇지?
어떻게든 우릴 조지는 걸 기대하며 이 상황을 만든 거지?
근데 이걸 어쩌냐?
겨우 이 정도 변수로는 이 파티를 무너트릴 수 없을 텐데?
푸하핫. 하긴 무능한 허접 주신한테 처발려서 봉인 당한 개허접이니까 그것보다 더 좆밥일 수밖에 없나?
“오랜만이군! 카리아! 잘 지냈나?!”
통로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커다란 베네딕의 고함에도 카리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냉철한 눈으로 나를 노려볼 뿐.
저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아르마디의 사도인 나를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
아하. 어차피 이길 수 없으니까 최소한 증오스러운 허접 주신에게 엿이라도 먹이겠다는 거구나?
큽. 진짜 한심해서 오히려 웃기네.
주신이고 악신이고 간에 신이라는 작자들은 왜 이렇게 하나 같이 무능한 건지.
그래도 꼴에 신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면 좀 더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 줘야하는 거 아냐?
그딴 게 될 리가 없잖아. 멍~청아.
“작전대로 가지요.”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은 요한이었다.
그가 십자가 위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요한을 기점으로 복도를 집어삼킬 듯 막대한 양의 신성이 퍼진다.
아르마디의 신성이 지닌 온기가 메네스테일의 열기를 대체하며 하나의 구획을 만들어낸다.
신이 머문 자리.
최고위 신성마법 중 하나. 삿된 존재에게 디버프를 검과 동시에 우리 파티에겐 버프를 거는 장판기.
카리아는 그를 보고서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챈 듯 다급히 물러나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 동안에 백작이 마법을 펼쳤으니까.
오케스트라의 한 가운데에 선 지휘자처럼 그가 손을 움직이지 주변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모양도 다르고 색도 다르고 마력의 흐름마저 다른 마법진들.
마법에 문외한인 나라면 저 중 하나조차도 제어하지 못할 고위의 마법들.
하하. 유저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게 만들던 모습 그대로잖아.
시작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감옥이었다.
전조도 없이 등장한 벽이 카리아를 가둔다.
허나 그는 카리아의 무력을 견디지 못했다.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카리아가 자신의 단검으로 벽을 박살낸 것이다.
허나 백작이 준비한 마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뜨거운 대지가 일순에 얼어붙으며 카리아의 발을 붙잡는다.
카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얼음을 부수며 위로 뛰어 오르려 하지만 그 때에는 이미 백작의 다른 마법이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마력을 빼앗는 밧줄.
끝없이 자라나며 추격하는 넝쿨.
저주가 담긴 안개.
눈동자로 그를 살피던 카리아는 단검을 슬쩍 내렸다.
그러자 카리아의 신형이 사라진다.
쳐낼 수 없다면 피한다.
그와 동시에 공격을 감행한다.
초속을 지닌 카리아이기에 가능한 선택지.
허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베네딕은 그를 허용할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허공을 향해 베네딕이 주먹을 내지른 순간 합을 맞춘 것처럼 카리아가 주먹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베네딕에게 얻어맞은 카리아의 몸이 총알마냥 날아가더니 신성으로 이루어진 벽에 부딪힌다.
별 단단할 것 없어 보이는 벽이지만 그 정체는 극도로 압축된 신성 그 자체.
악신의 사도에게 있어서는 지옥의 불꽃이나 다름이 없으니.
“끄으읍!”
벽에 닿은 카리아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고통 속에서 다급히 빠져나온 카리아가 단검을 역수로 쥔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나의 뒤.
어느새 정화의 기도를 외우고 있는 요한이 서 있는 장소였다.
저기요. 보스님. 어그로 튀지 말아 주실래요?
“노처녀 아줌마♡ 아래는 무리니까 이제는 위를 살펴보는 거야?♡ 저기 있잖아♡ 다 늙어빠진 할아버지도 눈이 있는데 당신 같은 추녀를 볼 리가 없잖아♡”
당신이 노리는 목표는 저 하나만 충분하답니다.
그래야 동선을 예측하기가 편하잖아요.
카리아의 신형이 사라짐과 동시에 철벽이 위험을 고한다.
허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베네딕의 손이 움직였으니까.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카리아의 얼굴이 빨려들어간 것 마냥 거기에 처박힌다.
“단련을 게을리 했구나! 느려졌어!”
베네딕이 손에 힘을 가하자 인간의 몸에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때였다.
카리아의 가슴을 중심으로 불꽃이 퍼지더니 그녀의 몸이 불로 변한다.
불의 악신이 지닌 권능 중 하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가 된 카리아가 베네딕의 손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퍼져 있던 넝쿨들이 그녀의 다리에 얽힌다.
식물인 넝쿨이 카리아를 만났으니 불타서 재가 되는 것이 정상이거늘 넝쿨은 타오르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자라나 카리아의 움직임을 막는다.
그리고 그 뒤를 잇듯 마력으로 이루어진 밧줄이 카리아의 팔과 목을 붙잡아 고정시키고.
그 앞에 서 있던 베네딕이 주먹을 장전한다.
“이를 꽉 깨물어라. 죽지 않도록 말이야.”
베네딕의 몸 안에 흐르던 마력이 그의 주먹에 결집한다.
그건 베네딕의 전력은 아니었다.
허나 바다라 비유해 마땅할 거대한 마력 중 일부라 하여 그것이 작겠는가.
베네딕이 주먹을 내지름과 동시에 폭발하듯 마력이 자신의 존재감을 떨친다.
귀에 이명을 새길 정도의 폭음과 함께 던전 전체가 진동한다.
‘…할아버지. 카리아 살아 있겠죠?’
<네가 입안한 전략이잖냐. 무얼 불안해하느냐.>
할배의 말대로 이 전략을 입안한 건 나다.
카리아를 만나자마자 신이 머문 자리로 그녀를 가둔다.
이후 백작의 마법으로 포획.
베네딕의 물리력으로 진압.
기절한 그녀를 요한이 정화하는 것.
카리아의 패턴이 어디까지나 게임의 강화판이라면 이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역할을 배분한 후 그 움직임에 따라 어떻게 대처하면 될지 이야기해줬지.
그 결과 우리는 손쉽게 카리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무리 카리아여도 저 주먹에 맞고 멀쩡할 것 같진 않은데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베네딕의 손속이 사나웠다.
일단 숨이 붙어있는 것 같기는 한데…
괜찮겠지? 막 식물인간 엔딩이 나고 그런 거 아니겠지?
소울 아카데미의 세상이니 그런 경우에도 방법이 있긴 하겠지만.
<그를 걱정할 시간에 주교가 펼치는 신성마법이나 눈에 새겨 두거라. 저 자의 능력은 충분히 보고 배울 만하니.>
‘넵.’
“주신께서는 어긋난 자라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니. 그대에게도 신의 은총이 닿으리라.”
요한 주교가 기도를 마침과 동시에 ‘신이 머문 자리’를 펼치기 위해 퍼트렸던 신성이 카리아를 기점으로 뭉친다.
저는 페이비가 펼치던 진혼의 기도와는 다른 것.
죽은 자를 편히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삿된 것을 지워버리는 마법.
“끄아아아아악!”
카리아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온다.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해지는 듯해 닭살이 서는 목소리.
현실의 정화는 게임 속의 정화와는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삿된 것을 지워내는 일이 컷신 하나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일 일리가.
정신 차리자. 나도 가만있을 때가 아니잖아.
요한이 정화를 하는 동안 마무리를 위한 준비를 해둬야지.
그녀의 몸에서 악신의 영향을 완벽히 제거하기 위해선.
[아그라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아그라가 저주받을 신의 사도를 노려봅니다.]
[아그라는 당신이 죽기를 바랍니다.]
…어?
<허?>
할배의 외마디 목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했다.
이는 방금 전 베네딕의 권으로 인해 생겨난 충격과는 달랐다.
땅 아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준동하는 듯한 느낌.
“루시!”
위험을 직감한 것일까.
다급히 달려온 베네딕이 나를 끌어안는다.
요한은 어느샌가 정화의 기도를 중지한 채 보호를 위한 신성 마법을 펼치고 있었고,
백작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응하기 위한 수십의 마법진을 펼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바닥이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
그는 단순히 덥다 뜨겁다 정도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손 끝부터 전신을 재로 만들어 낼 것 같은 압도적인 불꽃.
누가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난 저 불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이만한 불을 넘실거릴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둘 뿐일 테니까.
이 던전이라면 하나뿐일 것이고.
{죽어 마땅한 아르마디의 사랑을 받는 자여! 이 바흐다가 언제까지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던전 전체에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져 내린다.
베네딕의 품 안에 안긴 채 낙하하면서 나는 아래를 보았다.
살짝이나마 금이 간 붉은 벽에서 스며나온 하얀 색의 불꽃을.
온전하기 않음에도 그 위압감으로 공간을 지배하는 존재를.
나를 향하는 진득하고 기분나쁜 웃음을.
텅 비어버린 검은 색의 눈동자를.
바흐다.
불의 악신.
녀석이 봉인을 깨고 일부나마 현신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아그라는 쪼잔하지만 자신을 숨기진 않는다.
녀석은 자신이 무언가를 벌일 때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자기를 원망하라는 것처럼.
허나 이번 던전에서 녀석은 항상 조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러 일을 겪었지.
이전의 난 그걸 아그라가 방식을 바꾼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단순한 이야기다.
나를 노리는 주체가 달라졌으니 그 방식까지 바뀌었을 뿐.
이해했어.
허접 주신이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메네스테일을 언급한 이유를.
본래라면 더 긴 기간이 남았을 이 일을 굳이 지금 꺼낸 이유를.
이 곳의 봉인을 공격하는 자는 카리아.
그녀가 강해졌으니 게임에서 그랬던 것보다 봉인이 더 빠르게 풀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르마디는 진짜로 다급했기에 날 이 곳으로 부른 것이었다.
하. 씨발. 빌어먹을 무능 주신.
설명 좀 제대로 하라고. 이 새끼야.
나 놀릴 때는 혀를 그렇게 잘 놀리던 새끼가 왜 이럴 때는 신처럼 말을 아끼냐고!
반대여야 하는 거 아냐?!
어?!
– 띠링.
뭔데!
이제 와서 뭐 어쩌겠다고 메시지를.
[그런 제약이야.]
…어?
응?!
야! 허접 주신!
그게 무슨!
[퀘스트가 변경됩니다!]
[메네스테일의 구원자]
[아그라의 증오로 인해 메네스테일에 존재하는 봉인 일부가 풀렸습니다! 당신은 그를 다시 막아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메네스테일을 지키기 위하여!]
[보상 : 기적재현(선지급), ???]
[기적재현이 발동됩니다! 당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기적을 탐색합니다!]
[발견! 루엘의 메이스에 담긴 기적 ‘그 신성 아래에 모든 삿된 것이 물러나니’가 발동됩니다!]
[악신을 봉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