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8
기적재현?! 그거 게임 최후반부에 가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왜 지금 튀어나오는 거야?!
지금 내가 그걸 배운다고 해서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거 한 번 쓰려고 준비해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쓰잘데기 없는 걸 던져주고 멋있는 척 하지 말란 말이야! 이 허접 주신 새꺄!
[할 수 있어.]
허접 주신이 남긴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메시지가 적혀 있던 창에 금이 가더니 이내 흩어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들린 메이스에서 빛이 스며 나온다.
따스하나 강렬한. 태양과도 같은 빛.
나는 이 빛을 눈에 담은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나크라드에게 공격당한 페이비를 구하러 갔을 때 할배가 보여주었던 그 빛.
– 허어. 신께서 무언가를 벌이셨구나.
평소처럼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 귀를 타고 전해지는 목소리에 고갤 돌리자 아드리마냥 허공에 떠 있는 할배의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
– 그래. 나다.
‘이게 뭔.’
메이스에 인격만이 남아있는 할배가 왜 바깥으로 튀어나온 거에요?!
이것도 뭐 메이스에 숨겨진 기능 뭐 그런 건가?!
– 그런 걸 신경 쓸 때는 아닌 것 같구나.
할배는 그리 이야기하더니 아래쪽을 내려다 봤다.
동굴 전체를 자신의 불꽃으로 가득 채운 채 개미지옥마냥 날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 악신의 모습을.
녀석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을 느낀다.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 이글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증오가 서린 녀석의 눈을 본다.
기이한 일이었다.
공포가 차오르지 않는다.
저만한 수준의 괴물이 나를 향해 살기를 쏘아내고 있거늘 나는 태연하다.
어째서?
– 여아야. 기억하느냐? 스스로가 지닌 신성을 느끼는 방법을.
‘당연하죠.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신성박투술 가르칠 때 할배가 며칠 밤을 세워가며 내 머리에 때려 박았잖아. 그걸 잊겠어?
– 관조해 보거라.
할배의 말에 따라 몸 안을 살핀 순간.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압도적인 온기를.
하.
하하하핳.
젠장. 아르마디. 내가 방금 전에 설명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냐?!
사도가 말을 하면 좀 들어!
이런 선물을 해줬으면 생색을 내란 말이야!
‘할아버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 말해보거라.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 그것 참 곤란한 부탁이구나. 그것은 본인의 절기일 지언데.
할배는 곤란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지만 표정은 다르다.
그는 흐뭇한 웃음을 참을 생각이 없었다.
– 허나 그대가 부탁한다면 알려줘야지.
할배와의 대화가 끝난 순간 세상의 시곗바늘이 다시금 돌아간다.
낙하가 시작됐다.
*
“게오르크! 불꽃을 물려라!”
과거 모든 전장의 최전선을 날뛰던 철없던 시절.
베네딕은 게오르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적으로 만난 게오르크는 여러모로 귀찮은 상대였다.
만일 게오르크가 단순히 강대한 마법을 쓰는 자였다면 베네딕은 게오르크를 기억하지 못했으리라.
힘은 힘으로 박살내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허나 게오르크는 달랐다.
그는 분명 막대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였지만 막강한 화력보다는 다른 곳에 특화된 인간이었다.
모든 속성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다재다능함.
그 어떤 상황에서도 수많은 마법을 엮어 최선의 답을 내놓는 그는 혼자이면서 집단이었으니.
왕국의 사람들은 증오와 경외를 담아 게오르크는 이렇게 불렀다.
만수의 마법사라고.
내 보기에 예전보다 더해졌으면 더해졌지 덜해지진 않은 듯 하니. 이 정도는 해결할 수 있겠지.
“안 그래도 하고 있소!”
다급한 상황 속에서 예의를 내던진 백작이 소리를 침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 수십의 마법진이 떠오른다.
“요한 주교! 정화의 마법을!”
“이미 펼쳤소!”
“빠르군!”
바닥을 불태우는 악신의 불꽃에 정화의 기도가 스며드니.
불꽃에 새겨진 삿된 기운들이 신성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그를 확인한 백작은 우선 그 위에 폭포를 내렸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압사시킬 듯한 질량의 습격에 불꽃이 꺼진다.
그를 확인한 백작은 바닥을 메운 물을 주변에 벽처럼 세우더니 그대로 얼려버렸다.
이미 얼어버렸음에도 그 안에서 여전히 눈꽃이 생겨나는 얼음벽은 악신의 불꽃 앞에서도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으니.
영원히 버틸지는 못할 지라도 당분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벽이 되어주었다.
안전해진 대지에 굉음을 내며 착지한 베네딕은 루시를 품에 안은 채 적을 올려다봤다.
“크구만.”
금이 간 벽에서 스며 나와 맹렬하게 불타고 있는 하얀 색의 불꽃.
저 녀석은 스스로를 바흐다라고 소리쳤다.
“요한 주교. 바흐다면 악신의 이름 아니던가?”
“맞습니다. 불의 권능을 지닌 녀석이죠.”
“거물이 납셨어.”
허허. 우리 딸아이가 위대한 주신에게 사랑받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야.
스스로를 악신이라 칭하는 자가 우리 딸을 향해 증오를 내뱉는 것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야.
덕분에 루시가 위험에 처하지 않았나.
베네딕은 바닥이 무너지는 순간에 보았던 루시의 표정을 기억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약한 티를 내는 걸 극도로 꺼리던 딸의 당황.
그것만으로도 베네딕은 루시가 이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흐음. 그렇다는 것은 루시에게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겠지.
차라리 잘 됐어.
이 파파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악신을 상대하는 건 처음인데. 요한 주교 그 쪽은?”
“경험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저는 영웅의 시대를 책으로 배운 사람입니다.”
“그것 참 곤란하군. 게오르크. 그 쪽은 어떤가. 이 곳을 오랫동안 관리해 온 가문이니 무언가 비전 같은 게 있지 않나?”
“있었으면 지금쯤 말했겠죠. 전 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무언갈 숨길 만큼 멍청한 인간이 아닙니다.”
아무도 악신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모르나.
하긴. 한 때 온갖 곳에서 온갖 녀석들을 박살내고 다녔던 나도 모르는데 저들이 알 리가 없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공략을 진행해야겠군.”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악신이고 뭐고 간에 저 녀석도 몇 번이나 패배해 온 패배자이지 않나.
무적의 존재가 아니라면 박살내다 보면 언젠가는 쓰러질 터.
과거에는 취미마냥 했던 일이다.
못 할 것은 없지.
“멍청한 파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잊어버리는 거야?♡”
“루시?”
웃으며 싸울 준비를 하려던 베네딕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갤 돌렸다.
“…방법이 있니?”
“버텨줘. 믿을 건 힘밖에 없는 트롤 같은 파파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설마 자신 없어?♡”
그 말을 들은 베네딕은 자신감으로 가득한 루시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 속에 넘실거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베네딕은 저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허나 그것을 선사한 것이 위대하신 주신이라는 것만큼은 이해했다.
당신께서 이리 개입하실 정도로 루시가 소중하다는 겁니까?
이것 참.
은혜롭고 또 거슬리는 이야기군요.
이래서야 우리 루시가 앞으로도 얼마나 고생을 할는지.
좋습니다. 아르마디시여.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소서.
그 끝에 우리 딸아이에게 평안이 있기를.
그렇지 않다면 이 베네딕. 모든 걸 걸고 당신을 파멸로 이끌겠습니다.
조심스레 루시를 바닥에 내린 처음으로 등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아니라면 들 수 없는 너무나도 거대한 대검을.
그리고서 자신의 몸 전체에 마력을 둘렀다.
알른 가문에 전수되는 특유의 마력 운용법.
가문을 이을 자만이 전수 받을 수 있는 비기.
그 효과는 단순하다.
신체 능력의 증가.
후흐. 전력을 내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굴복하라! 나약한 필멸자여!}
불꽃이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 손에 쥐어진 것은 도끼였다.
불꽃으로 이루어져 그 끝은 언제나 불타고 있는 도끼.
그것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벽에 내리쳐지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누가 보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은 분명한 상황.
그 위험 속에서도 베네딕은 태연했다.
“두 사람 다 들었소? 시간만 끌면 우리 딸아이가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군.”
“일이 손쉬워졌군요.”
“두 분 다 저 말을… 하아. 그래요. 그런 걸로 합시다.”
콰아앙!
불의 악신이 재차 도끼를 내리치자 얼음벽이 박살이 나며 일행을 지키던 것이 사라졌다.
베네딕은 재차 도끼를 내리치려는 불의 악신을 보고서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 검 위에 회색의 오러가 서린다.
단순한 기운이 아니라. 너무도 짙어서 그 공간이 회색으로 칠해진 듯한 오러가.
{죽어라!}
도끼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베네딕이 몸을 움직인다.
땅에 박아 넣을 것처럼 강렬한 힘을 담아 대지를 짓누르고, 허리를 뒤틀더니, 도끼를 향해 검격을 내질렀다.
대검이 아무리 거대하다고 하나 도끼날에 비하면 한없이 조각이나 다름없는 것이 사실이다.
허나 도끼는 검을 짓누르지 못한다.
인간의 검이 신의 분노를 가로 막고 있었다.
대검 너머로 넘실거리는 불꽃이 버거울 법도 하거늘 베네딕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려 있다.
이윽고 베네딕의 목에 핏줄이 서린다.
그와 함께 안 그래도 거대했던 베네딕의 육신이 한층 더 거대해진다.
혈류를 따라 근육이 팽창하며 갑옷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에 따라 악신의 도끼날이 점차 뒤로 밀려나더니.
이윽고 도끼가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승천하는 불길의 아래에 선 베네딕은 보란 듯 검 끝으로 위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겨우 이 정도로 신을 칭하는가!”
보라! 아르마디여!
최악의 결말이 찾아왔을 때 그대의 적이 될 자를!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영원한 아군이 될 이를!
*
불의 악신이 뿜어내는 저주의 기운은 훗날 추기경의 지위에 오를 이의 신성 앞에서 무력했다.
본래라면 사람의 정신을 재로 만들었을 저주는 그저 허공에 넘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악신이 사용하는 불꽃도 그러했다.
세상 만물이 불타 사라질 수 있음을 알리던 불꽃은 영지를 지키는 마법사의 재주에 가로 막혀 공기를 달굴 뿐이었다.
악신의 분노도 그러했다. 필멸자를 찍어 누르기 위해 내리쳐지는 모든 분노는 딸을 지키고자 하는 아비의 의지 아래에 무력했다.
모든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악신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짜증이 나리라.
미간이 찌푸려지리라.
자신이 본래의 힘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녀석들이.
세상을 불태우던 불꽃의 아래에 재가 되었을 녀석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니까.
허나 저 녀석은 모를 것이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 이해했느냐?
‘물론이에요.’
내 안의 신성이 움직이는 걸 관조하던 할배는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자. 여아야. 준비가 되었느냐?
‘그러는 할아버지는요? 잘 할 수 있겠어요?’
–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게냐. 본인은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하나. 루엘이다.
그리고는 내 옆에 서더니 이내 자신의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를 본 나도 아르마디의 신성을 담은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 기적을 일으킬 시간이다.
‘기적을 일으킬 시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