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9
메이스를 위로 치켜 든 순간 아르마디가 내 몸에 선사했던 그의 신성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내가 지니고 있던 신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순하며 고강한 신성.
부족하기 그지없는 내 육신에 과분한 기운들.
본래라면 나는 기운의 움직임을 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뿐일까. 저 기운들이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의 비명을 질렀겠지.
허나 지금은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할배가 제어해주고 있었으니까.
할배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할배의 영웅담을 보았고, 할배의 무력을 경험했으며, 할배의 가르침을 따라 그가 걷던 길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능력을 몸으로 겪어보니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게 가능하다니.
아르마디가 선물한 신성의 일부가 내 몸을 강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
본래 내가 하듯 단순히 육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심장에서 시작하여 손끝 발끝 하나의 혈관에 이르기까지,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몸의 모든 곳이 신성에 의해 보호 받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신성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통증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뿐일까.
메이스 끝에 모여든 신성은 단순히 집약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신성으로 마법을 짜내어 스스로를 증폭시키고 또 증폭시키고 있었다.
–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
여아야.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고 있으려니 할배가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면 의지에 찬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 이제부터가 진짜거든.
할배가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메이스 끝에 모여 있던 신성이 터지듯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집약된 신성을 기점으로 하여 생겨나는 거대한 마법진.
여전히 마법에는 문외한인 나지만 이제는 기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신이 내린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 이 기술은 말이다. 아르마디의 기적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 파티의 마법사와 함께 고안해낸 녀석이다.
단순히 신의 권능을 빌리는 것이 아닌, 신의 권능과 인간의 힘을 합쳐서 만들어내는 이적.
신이 벌였던 일을 재현하기 위해 지상의 인간이 발버둥친 결과.
– 그 할배의 의욕을 따라잡느라 고생을 좀 했지.
거대한 마법진의 위에 또 다시 수십의 마법진이 그려지고, 그 위에 또 다시 다른 마법진이 그려진다.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이냐!}
아르마디의 신성을 느낀 것일까.
악신이 고함을 치며 나를 노려본다.
텅 비어 버린 악신의 검은 눈동자 속에 증오와 살기가 담긴다.
신이라는 직위를 지닌 자의 적의다. 두려워함이 마땅하거늘 어째선지 내 입에는 웃음만이 지어졌다.
{내가 그를 가만 두고 볼 것이라 생각했나!}
기적을 막기 위하여 악신이 움직이지만 그가 벌이는 모든 일은 내게 닿지 못했다.
악신의 불꽃은 갑작스레 생겨난 얼음에 의해 가로막힌다.
악신이 내뱉는 저주의 말은 성직자의 입에서 나오는 축복의 말에 가로막힌다.
필멸자를 벌하기 위한 악신의 심판은 인간의 대검 앞에 가로막힌다.
물론 그 대치는 비등하지 않다.
불완전하더라도 악신은 악신일지니.
필사적으로 불꽃을 가로 막고 있는 마법사의 마력은 점차 깎여가는 중이고,
축복을 내뱉던 성직자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하며,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기사의 입술에 지어진 미소는 점차 딱딱해져 간다.
이대로 대치가 이어진다면 악신은 분명 자신의 분노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겠지.
{방해하지마라! 언젠가 재가 될 것들 주제에!}
허나 악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기적이 준비되는 것이 더 빨랐다.
멍하니 위를 바라본다. 신성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진이 겹침에 따라 만들어진 구체.
아르마디가 선물한 신성을 담은 거대한 구는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태양이라 불러 마땅했다.
– 자. 여아야. 이것이야 말로 본인이 추구한 기적이니라.
*
어렵군.
요한은 축복을 통해 기적을 물리면서 이마에서 떨어지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불완전하더라도 악신은 악신이었다.
생물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가 지닌 권능은 언제까지고 인간이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알른 경은 아직 여력이 있어 보인다만 나와 게오르크 백은 다르다.
이를 악물고서 버틴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한계가 찾아올 터.
흐. 완전한 악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과거의 영웅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것인지.
봉인이 완전히 깨어지지 않은 녀석도 상대하기가 이토록 벅찬데 완전한 악신을 어찌 인간이 감당했단 말인가.
존경심이 절로 샘솟는군.
{방해하지 말란 말이다!}
악신의 외침을 들으며 요한이 십자가를 손에 쥔 순간 그의 뒤편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본래 공동에 자리 잡았던 숨이 막힐 듯한 열기와는 다른, 하늘의 태양이 전해다주는 안도와 평온이 담긴 온기가.
그를 느끼고서 고개를 돌린 요한은 자기 뒤편의 광경을 보고서 두 손을 떨어트렸다.
“…이는 도대체.”
태양이 그 곳에 있었다.
거대한 불꽃을 보았을 때처럼 비유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는 분명 푸른 하늘에서 모두를 보우하는 태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바깥에서 세상에 온기를 전달해야 하는 태양이 어찌하여 이 좁은 동굴에 있단 말이냐.
내가 환각을 보는 것일까?
악신에게 당해 기이한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말도 안 된다! 네놈 따위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푸하핫♡”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요한은 태양의 아래에서 난 얄밉고도 선명한 웃음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보았다.
메이스를 치켜들어 성화를 들 듯 태양을 받히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아아. 그런가.
세상을 지켜야 할 태양이 지하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저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이 동굴에 태양을 만들어낸 것이다.
스스로 되새기고도 헛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묘사.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서 넘겼을 이야기.
음유시인의 노랫말에 섞여 들어가더라도 그건 너무 과장된 거 아니냐는 불만을 낳았을 말들.
허나 그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태양을 치켜 든 여자아이는 특유의 얄미운 웃음을 지은 채 저 멀리에서 경악하는 악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내가 비명을 지르길 바랐어?♡ 목숨을 구걸하길 원했어?♡ 그걸로 네 알량한 자존감을 채우려고 한 거야?♡ 우와아♡ 기분 나빠♡”
{네 녀어어어어어어언!}
“꺄아아~♡ 무서워라♡ 정말. 풋♡ 악신님답게. 푸훗♡ 위압감이 넘치네?♡”
{감히 이 바흐디를 농락하려 드느냐! 필멸자주제에에에!}
주변에서 끝없이 일렁거리던 악신의 불꽃이 일시에 흩어지더니 그 모든 열기가 악신의 손에 몰려든다.
저 또한 태양이었다.
여자아이가 치켜든 태양과는 다른, 세상을 따스히 보살피는 태양이 아니라 사람을 태워 죽이는 사악한 태양.
가뭄이 퍼진 대지 위에 서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비웃는 존재.
대지에 선 모든 생명이 처참히 죽기를 바라는 자.
{그 자만을 후회하게 되리라!}
백색의 태양을 손에 쥔 악신이 그를 내지른 순간 여자아이가 치켜들고 있던 태양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요한은 그제서야 여자아이가 만들어낸 태양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요한만이 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는 위대하신 아르마디가 지닌 신성이었다.
머나먼 과거 그에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었던 그 분께서 보았던 빛과 똑같은 것이었다.
태양에서 새어나온 성스러운 빛이 공동을 채운다.
불길한 색으로 가득하던 공동이 점차 대낮처럼 밝은 색으로 물들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려던 열기가 있던 자리에 대지를 보살피는 온기가 자리 잡고.
공동 안에 머무르던 삿된 기운들이 그림자를 찾아서 뒤로 또 다시 뒤로 물러난다.
그것은 악신이라하여 예외가 아니었다.
자그마한 여자아이를 대지에서 지우기 위해 움직인 손은 중간에 멈춰서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어찌. 어찌이이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말해 줄 필요는 없지만 난 착하니까. 자기 뇌도 불태운 멍청이한테 정답을 알려줄게♡”
백색의 태양이 지닌 크기가 점차 줄어들어간다.
처음에는 자애로운 태양과 비슷한 크기를 지녔던 것이.
어느새 그 절반도 안 되는 크기가 되어서.
악신의 주먹 정도로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건 네가 좆밥이라서 그래♡”
애초에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안 돼.}
악신의 앞을 지켜주던 태양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악신이 직접 아르마디의 신성을 감당할 차례였다.
{안 된단 말이다.}
바흐디는 자신의 도끼를 휘두르며 거기에 저항하려 하지만 그는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 만들어낸 태양마저 다른 태양의 빛 아래에 저물었거늘.
그까짓 알량한 도끼가 아르마디의 신성을 버틸 수 있을 리가.
날을 시작으로 하여 금이 가던 도끼가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다시 봉인 될 수는 없어!}
악신의 손을, 팔을, 다리를, 몸을 이루던 불꽃이 중심을 잃어버리니.
그를 가두어 놓던 봉인은 그 자그마한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대지의 힘에 이끌리듯 벽에 난 틈 사이로 악신의 몸을 이루던 것들이 끌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저주하겠다 아르마디여! 네 놈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재가 되기를 바라겠다!}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끝이었다.
결국에 여자아이가 치켜 든 태양이 공동의 모든 곳을 자신의 온기로 가득 채웠으니.
갈 데를 잃어버린 악신이 향할 장소는 그가 가장 증오스럽게 생각할 곳뿐이었다.
바흐디의 모든 것이 봉인 속에 갇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인에 새겨져 있던 금이 복원된다.
그 모든 풍경을 눈에 담은 요한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따스한 태양을 바라보다 무릎을 꿇었다.
상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
귀로 들었다면 헛웃음과 비웃음을 자아낼 일.
귀가 얇은 이들은 감탄할 것이고 비관적인 사고를 지닌 이들은 무턱대고 의심할 일.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요한은 기적이 펼쳐지는 것을 눈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