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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미안! 내가 실수로 파리 떼를 방생해 버렸어! 곧 너희 집에 들이닥칠 텐데 처리 좀 해줘!’

같은 느낌으로, 꼴도 보기 싫은 진상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를 받고 대 곤충전 결전 장비인 파리채를 챙겨 쫄래쫄래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산 밑에서 치고받던 사도들이 웬일로 조용한가 싶었는데, 클라이언트가 말한 벌레 떼가 벌써 와 있더라.

제국 수도에서 여기까지 벌써 올 수 있을 리 없으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쓴 걸 텐데….

“돈도 많네.”

모르긴 몰라도 절대 적은 돈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산에 처박혀 있던 동안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제국 놈들의 헤픈 경제관념에 혀를 차는 사이, 기사단의 머리로 보이는 놈과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너무 멀어서 대화 내용을 듣진 못했지만 제국 놈들이 늘 똑같지, 별거 있겠어?

검은 태양의 영광, 제국의 위대함 어쩌고저쩌고….

지겨워 죽겠어. 이제 좀 레퍼토리를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

뭐,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과 별개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위압을 느낄 만도 했다.

매우 아니꼽긴 해도 제국의 국력은 진짜니까.

“어라.”

사도들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웬걸.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저니와 사도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오오….”

생각지도 못한 전개.

전력 차가 압도적이란 건 본인들도 알 텐데 용감하게 무기를 빼 들다니.

아마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야.

‘하긴, 나한테 썰리면서도 계속 달려든 놈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되는 것 같기도.

팝콘을 뜯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없던 팝콘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있나.

아쉬운 대로 산 중턱의 절벽에 걸터앉아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노는 걸 구경했다.

파리 떼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는 병아리들.

‘…말이 좀 이상한데.’

먹이 사슬로 보면 병아리가 위 아니던가?

아무튼, 예상대로 병아리들의 전황은 썩 좋지 않았다.

적의 머리는 아직 나서지도 않았는데 기사들의 검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사도들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그래도 모든 사도가 무력하게 밀리는 건 아니었다.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분투하는 사도들.

그중 가장 눈에 띈 건 맨 앞에서 대검을 휘두르는 여자였다.

비록 상대가 경험이 별로 없어 보이는 말단 기사로 보이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며 공세를 이어 나가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언뜻 보면 무식하게 휘두르기만 하는 것 같아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노련함이 엿보였다.

반면, 내 셔틀…이 아니라 저니는-

“응, 저건 글렀네.”

한 걸음 뒤에서 남들이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대검 삐약이가 가진 용기의 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기사단장에게 대드는 걸 봤을 땐 좀 기특했는데, 그럼 그렇지.

물론 저니의 실력이라면 나서봐야 별 도움 안 되겠지만, 저렇게 겁먹고 굳어 있으면 위험이 닥쳐와도 대응할 수 없잖아.

지금처럼 말이야.

검기를 쏘아 보낸 단장이 다시 마나를 모으는 걸 본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절벽 끝에 섰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드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소중한 셔틀…이 아니라 제자는 지켜야지.

자꾸 말이 헛나오네.

오른발로 절벽을 박찼다.

주변 풍경이 마치 뭉개진 수채화처럼 일그러지고 뭉개진다.

순간적인 급가속.

어느새 내 몸은 방금까지만 해도 저 멀리 있던 전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눈앞에 초승달 형태의 검기가 푸르스름한 마나를 뽐내며 짓쳐들어왔다.

기사단장 자리를 그냥 딴 건 아닌지 제법 위력적인 검기였지만, 반대로 말하면 딱 그 정도.

이런 건 검기를 두를 필요도 없어.

검을 들고, 검기의 이음새를 끊는다.

수많은 병아리의 목숨을 앗아간 공격을 파훼하는 덴 단 두 번의 간결한 검격이면 충분했다.

‘케이프, 찢어졌네.’

안 그래도 너덜너덜했던 케이프가 내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하고 결국 찢어졌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아쉬운 마음에 괜히 케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뒤에 선 저니가 반가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카나…!”

‘…분명 비밀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는 거야.

그래도 제국 놈들을 상대로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걸 봤더니 그 목소리가 그렇게 밉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리고 이미 이런 상황이 된 이상 상관도 없고.

갑자기 나타난 나로 인해 사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사도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던 기사들도, 그런 기사들에게 밀려 계속 뒷걸음질만 치던 사도들도.

거기에 더해 제국에게 붙은 것으로 보이는 사도들도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더라.

뭐… 낯선 일은 아니다.

전쟁터에서 나를 처음 맞이했던 녀석들도 다 저런 얼굴을 했으니까.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이는 반응은 보통-

“크, 크하하! 그 붉은 사신의 정체가 이런 꼬맹이였다니! 정말 우습기 짝이 없군! 고작 이런 꼬맹이에게 겁먹었단 말인가!”

“…뭐라는 거야.”

조롱과 멸시.

노망난 뱀 녀석은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게는 말했는데, 이놈은 지만 아는 말로 혼자 신나게 떠드네.

말을 알아들을 순 없지만 비웃는 꼴 하며 기분 나쁜 시선으로 몸을 훑는 걸 보면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단장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 사이에서 점점 웃음이 퍼졌다.

무기를 맞대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단장의 뒤로 모여들었지만, 사도들은 감히 그를 막지 못했다.

섣불리 달려들면 죽는 것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느낀 듯했다.

“음….”

투구 사이로 엿보이는 비뚜름한 웃음들.

이것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서 별로 감흥은 들지 않는다.

“다 낡아빠진 검이 꼭 네 꼴과 같구나!”

“그러니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래도.”

긁으려고 하는 말 같은데, 알아듣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야.

뱀 새끼, 노망나서 부하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건가.

“기사라면 검으로 말해야지.”

나는 통하지도 않는 말로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 검을 들었다.

“제법 재미있는 짓을 하던데.”

단장이 했던 것처럼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저 높이 있는 태양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거든.”

위력은 꽤 강했지만 본질은 마나를 무식하게 때려 박아 방출한 것뿐이다.

기교 따위 없는 단순 무식한 검술.

100의 마나를 써서 50의 효율을 내고 뿌듯해하고 있으니 우스울 따름이다.

“한 수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보고 배워.”

고작 눈 한 번 깜박하는 정도의 짧은 시간.

드높은 창공을 향해 있던 검은 이미 땅을 향하고 있었다.

쩌저저적!

히죽.

“이제 알겠어?”

네가 얼마나 허접한지 말야.

* * *

만화 속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극적인 등장.

저니는 기적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카나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앞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드러난 뒷모습만 봐도 카나가 소녀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

-what?!?!?!?!

가공할 무력에 어울리지 않는 여리여리한 뒷모습에 놀란 것은 시청자들뿐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전장에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나타나서, 수많은 플레이어를 잡아먹은 검기를 아무렇지 않게 없애버린 카나에게 전장에 있던 모든 시선이 쏠렸다.

카나의 외모를 본 파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짜, 진짜라고…?”

이거 진짜예요?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채팅창이 술렁거렸다.

나른해 보이는 분홍색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박인다.

바람에 실려 살랑이는 머리카락은 보는 사람에게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게 했다.

저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휘감고 쓸어내리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동글동글한 얼굴과 유하게 휜 눈매는 소녀의 인상을 순하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귀여운 얼굴.

저런 벌레 하나 못 잡을 것 같은 얼굴로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무력이 보일 수 있는 거지?

자신을 수도 없이 죽인 묘지기의 정체가 귀엽고 작은 소녀였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파인의 머리가 덜컥 멈췄다.

그러나 카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저니는 그저 걱정이 앞섰다.

‘카나가 강한 건 알지만….’

저 많은 기사를 상대로 승리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건 어렵지만, 다수가 소수를 이기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수가 많을수록 승리했을 때의 피해도 더 적다.

싸움에 있어서 수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레이드 보스는 죽어도 살아나지만, 레이드가 아닌 지금이라면…?’

산 한구석에 박혀 있는 카나가 왜 갑자기 이곳에 등장하였는지는 모른다.

이미 한번 가출한 전적이 있으니 넘어가는 것뿐.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레이드에 입장했을 때처럼 인스턴스 채널이 분리되지 않았고, 체력바가 없는 걸 보아 보스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그 말인즉 다른 NPC와 다를 바 없다는 소리였다.

‘도망… 도망쳐…!’

죽어도 살아나는 자신과 다르게 카나는 죽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저니가 카나에게 도망치라고 말했지만, 죽음의 공포에 겁먹었던 몸은 목소리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저니의 경고를 듣지 못한 카나가 검을 치켜들었다.

단장이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한 수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보고 배워.”

카나의 팔이 흐릿해졌다.

“…?”

다음 순간, 분명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던 소녀의 검은 땅을 향해 있었다.

눈이 피로한 탓에 휘두르는 걸 놓쳤던 건가?

저니가 눈을 비비려던 찰나였다.

쩌저저저적!

공기가.

기사들이.

땅이.

검이 그린 궤적에 있던 모든 것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콰장창!

카나를 보며 비웃던 기사들이 비웃던 얼굴 그대로 반으로 갈라진 채, 무저갱의 쩍 벌린 아가리 속으로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위에 전장이 다시 한번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 이, 이게 무슨….”

운 좋게 공격 범위 밖에 있었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살려준 건지.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부하들을 잃은 단장의 눈동자에 거센 파도가 일었다.

방금까지 기세 좋게 비웃던 얼굴들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렸다.

“…저런 걸 잡으려고 했다고?”

하하, 망겜 수준.

파인이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는 정말 놀아준 거였구나.

얼핏 봐도 깊이가 10m는 넘어 보인다.

길이는 말할 것도 없었고.

고작 검 한 번 휘둘러서 땅을 갈라버리는 괴물을 잡으라고?

“응, 안 해.”

아니. 못해.

오늘부로 카나 레이드는 서비스 종료다….

파인이 그렇게 다짐하는 동안 저니 또한 충격에 빠져있었다.

강한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지금까지 플레이어들을 손쉽게 베어 넘기던 기사들이 일순간에 절반이 넘게 사라졌다.

겨우 살아남은 기사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하늘을 치솟던 전의가 한순간에 꺾여, 당장에라도 등을 돌려 도망가고 싶어 하는 표정들.

‘하기야 그런 걸 봤는데 어떻게 꺾이지 않겠어.’

아까까지는 그토록 두렵게 느껴지던 기사들이 불쌍해지는 건 왜일까.

저니는 작디작은 카나의 등이 마치 태산처럼 크게 느껴졌다.

“마, 마물! 아니! 괴물 년!”

“그 반응도 이제 식상한데.”

공포에 질린 단장이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카나는 느긋하게 검을 든 손을 털었다.

파스스.

“아.”

“어?”

“…!”

소녀의 손에 들린 검이 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카나는 짤막한 탄성을 흘렸고, 저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벙한 소리를 냈으며, 절망에 빠졌던 단장은 화색하며 눈을 빛냈다.

“기, 기회다! 전원 돌격, 돌격이다!”

“이때다 싶어서 달려들기는. 내가 이럴 줄 알고 여분을 하나 사뒀….”

흥, 하고코웃음을 친 카나가 허리춤을 매만졌다.

뒤적뒤적.

뒤적… 뒤적.

…뒤적.

카나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멈췄다.

“…는데, 안 가져왔네.”

기사들이 카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필사적으로 내딛는 발걸음과 악에 받친 얼굴로 돌격하는 그들을 보던 저니가 다급하게 카나의 옷자락을 잡았다.

“카나!”

기척을 느낀 카나가 뒤를 돌아보고, 처음으로 카나의 얼굴을 본 그녀는 헛숨을 들이켰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검을 내밀었다.

“내, 내 검을 줄게! 이걸 써!”

그러나 카나는 그 검을 받지 않았다.

“검, 줄게!”

아르키쉬로 해서 못 알아들은 걸까.

그라닉으로 바꿔 한 번 더 말했지만 카나는 여전히 검을 받지 않았다.

기사들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도 소녀는 그저 고요한 눈으로 저니를 바라보았다.

저니는 언뜻 무심해 보이는 카나의 눈에서 온갖 빛깔의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보았다.

붉고, 푸르고, 검고, 밝은 감정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질척이는 소용돌이의 정체를 저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에 감히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의 이름은 아마 그리움일 것이다.

분홍색 눈동자에 몽롱하게 빠져 있던 저니가 별안간 정신을 차렸다.

언제까지고 보고 싶은 눈이었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러다 죽는다고!’

나는 상관없지만, 너는 정말 죽잖아!

저니가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마침내 카나의 입이 열렸다.

“카나리아 그라시스.”

“…어?”

“그게 내 이름이야.”

여느 때처럼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 소녀가, 저니가 내민 검을 받아들었고.

서걱.

고요한 절삭음과 함께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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