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던전이라는 곳이 본래 시도 때도 없이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긴 하지만 에반스의 던전은 그 빈도수가 더 높다.
고블린들이 사는 곳이기에.
다른 몬스터들보다 많은 개체 수를 자랑하는 고블린들이 있는 이 곳은 몇 분 단위로 계속해서 연전을 벌여야 하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루시가 전투를 경험할 기회는 머잖아 찾아왔다.
루시는 이전처럼 정확하게 몬스터의 습격을 예상해냈고 얼마 안 가 그녀의 말대로 고블린 무리와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기사들에게 고블린이란 툭하고 건드리면 억하고 죽는 존재였기에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다만 이번의 전투는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의도적으로 고블린 두 마리를 살려둔 것이다.
“던전에선 홀로 다수를 상대할 일이 잦습니다. 그러니 두 마리를 상대해 보시죠.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들을 루시와 상대시키기 위해서.
루시는 포셀의 말을 듣고서 방패와 메이스를 꾹 쥐었다.
루시가 고블린의 앞에 섰지만 고블린들을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들이 벌인 학살 탓에 겁을 먹은 것이리라.
이대로 가면 실전다운 실전은 하지도 못할 상황이었기에 페르비가 속삭이듯이 칼에게 물었다.
“우리 너무 난장판을 벌인 거 아냐? 저런 애들 상대해도 연습 안 되실텐데.”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어?”
“아가씨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까.”
루시에게 상대의 전투의욕을 고취시키는 일은 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축복이 있으니까.
숙련된 기사인 칼은 물론이고 영웅이라 불리는 포셀마저도 저항하기 버거운 축복이.
“뭐야. 냄새나는 고블린♡ 여자애한테 겁 먹은 거야? 아핫. 꼴사나워♡”
그녀가 도발을 하자마자 고블린들이 눈이 까뒤집혔다.
방금 전까지 그들의 안에 자리 잡았던 공포가 분노라는 감정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자신을 향하는 직선적인 감정에도 루시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여유로운 듯한 얼굴로 방패를 치켜 들 뿐이었다.
고블린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몽둥이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 건 초원에 사는 고블린 부족에서나 쓰는 무기다.
던전에 있는 고블린들은 하나 같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철기를 사용한다.
당장 루시의 앞에 서 있는 둘도 그러했다.
하나는 고블린의 머리통만한 메이스였고 다른 하나는 고블린에게 맞추어 만들어진 듯한 창이었다.
어느 쪽이건 스치기만 해도 루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무기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번뜩이는 철을 보고서 뒤로 물러났을 터이나 루시는 달랐다.
여태 지겹도록 전투의 훈련을 해 본 그녀는 가만 서서 고블린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 안 가 창을 든 고블린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이 택한 수는 뻔하디 뻔한 찌르기.
루시는 그를 보고 발재간만으로 창을 피한 후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곤 방패로 고블린의 얼굴을 가격했다.
아이 같은 체구를 지닌 고블린에게 루시가 든 방패는 끔찍한 흉기였다.
방패에 얻어맞은 고블린이 뒤로 날아간다.
자신의 동료가 쓰러진 것을 보자마자 메이스를 든 고블린이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메이스를 휘두른다.
허나 필살을 담은 그 공격은 너무도 허무하게 루시의 방패에 막혔다.
투웅!
온 힘을 내지른 공격이었던 만큼 그 반동도 심했다.
메이스가 튕겨나는 바람에 고블린의 몸은 빈틈투성이가 되었고 루시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콰직.
루시의 둔기가 고블린의 머리를 깨부쉈다.
한 고블린의 생에 끝을 고한 루시는 바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고블린에게로 내달렸다.
녀석은 다급히 창을 주워 들려 했지만 그 땐 이미 루시의 메이스가 머리 위에 도달해 있었으니.
고블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져야 했다.
그렇게 루시의 첫 실전이 막을 내렸다.
칼은 일련의 전투를 보며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잘 하실 거라 믿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먼저 적 하나를 무력화시킨 후 다른 하나를 처리하는 그 모습은 이미 한 사람의 숙련된 전사라 할 만 했다.
누가 이 전투를 벌인 루시를 보며 겨우 이 주 정도 밖에 전투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할까.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몸을 제대로 움직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여길까.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자신에게 누군가 그리 이야기 했다면 칼은 그 사람에게 농담다운 농담을 하라 일갈했을 것이다.
무기의 숙련이라는 것은. 방패를 다룬다는 것은.
살아있는 무언가와 싸운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늘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저런 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왜 귀족 가에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상비군을 육성하겠는가.
필요할 때마다 징병을 하면 그만인데.
루시의 재능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알른 가문의 혈통을 이은 사람이란 건가.
과연 영애께서 최근에 훈련을 시작한 게 아니라 아주 어렸을 적부터 무기를 잡았다면 얼마나 괴물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
겨우 한 달 만에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년에 걸쳐서 경험을 쌓았다면?
칼은 지금 대륙에 퍼져 있는 여러 유망주들의 이름에 루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고블린 둘을 마무리 한 루시는 손등으로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고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안색 하나 바뀐 것이 없는 저 이면에 오크를 죽인 탓에 몇 일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는 여린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상상이나 하겠는가.
칼은 뒤편에서 그녀의 모습을 살피다 덜덜 떨리는 루시의 손을 보고서 자신의 주인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낸 나는 자칫 마음을 놓았다간 속을 비워낼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나를 향하던 고블린들의 분노.
한 순간 실수하면 내게 커다란 상처를 입힐 무기들.
고블린들의 머리를 내리 찍을 때 느껴졌던 감촉과 비명소리.
내 얼굴에 튄 피에서 느껴지는 역겨운 냄새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기사들이 고블린들을 처리하는 걸 볼 때도 역겹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직접 고블린을 처리하고 나니 도저히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씹.
아직 생물을 해하는 것에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다른 생각을 하자.
계속 이 생각을 거듭해봐야 상황만 안 좋아질 뿐이야.마침 생각할 거리도 있잖아.
고블린 두 마리를 쓰러트린 순간에 내 몸에 무언가가 흘러들러오는 게 느껴졌다.
메스가키 스킬의 버프 효과와는 달랐다.
무어라고 해야 할까.
꼭 나의 혼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관해 추측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레벨업.
몬스터를 잡고 나서 무언가 강해진 느낌이 든다면 레벨업 밖에 없지 않은가.
근데 왜 벌써 레벨업을 한 거지?
레벨 1에서 2로 오르려면 고블린만 해도 스무 마리 정도는 때려잡아야 한다.
고블린 둘에 오크 하나를 잡는 걸론 경험치가 부족하다.
혹시 나 지금 기사들하고 같은 파티 취급을 받고 있는 건가?
그래서 쟤네가 사냥한 경험치를 나눠 받고 있는 거 아냐?
그럴 지도.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였다.
아니 방금 전 감각이 레벨업이라 가정한다면 이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 봐도 무방했다.
하하. 미친. 내가 소울 아카데미에서 버스를 타는 날이 오다니!
항상 NPC들 레벨링 시켜 준다고 고생만 하다가 NPC한테 얻어 먹게 되니까 기분이 남다르네.
흠. 잠깐만
기사들한테 버스를 타서 레벨을 할 수 있다는 건 잘만 하면 이번 훈련에서 레벨 10을 달성할 수 있단 소리 아닌가?
포셀이 말하길 이번 훈련은 대충 일주일 가량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그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이 던전을 공략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4인 파티 기준으로 에반스의 던전을 최단 공략할 때 얻는 경험치는 알고 있으니까 그걸 기준으로 계산을 해보면…
가능해. 내일 루엘의 시련을 돌파해서 메이스를 구한다면 말이야.
이전에도 말을 했지만 루엘의 둔기에는 경험치 획득량 증가가 붙어있다.
그 효과만 받을 수 있다면 레벨 10을 찍는 건 어렵지 않다.
레벨업을 할 때의 느낌이 어떤 건지는 알았으니까 내가 헷갈리지만 않으면 레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는 건 내가 레벨업을 조절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더 이상 레벨업을 망설일 이유도 없다단 소리다.
좋아. 에반스의 던전을 반복하는 건 여전히 비효율의 극치라 생각하지만 편하게 버스를 탈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레벨 10만 찍어둔다면 아카데미 시험까지 남은 두 달 동안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성장 동선을 짤 수 있다.
최적화에 고민을 좀 해봐야겠지만 소울 아카데미 고인물인 나에게 그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사들을 따라오길 잘했네.
“아가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드니 칼이 나를 걱정스러운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니? 나야 완전 멀쩡하지!
소울 아카데미 고인물로써 이만큼 행복한 상황이 어디 있겠냐!
계속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잘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는데 이대로만 가면 특별 입학은 따놓은거나 마찬가지야!
어쩌면 아카데미물의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할 수 있을지도 몰라.
대련에서 말도 안 되게 강한 사람을 이기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거지.
소울 아카데미의 주요 캐릭터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거야!
상상만 해도 즐겁네. 설마 아카데미 시험이 기다려 질 줄이야.
“손이 떨리고 계십니다.”
칼의 말에 입술이 살짝 굳었다.
거기서 티가 났구나.
표정은 괜찮지?
얼굴이나 행동 같은 것도 메스가키 스킬의 보정을 받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예전에 실험을 해 본 건데 루시 알른의 얼굴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항상 얄미운 웃음이 지어져 있더라고.
극한 상황에 처해서 공포에 질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멀쩡하겠지? 아마도?
방패를 돌려서 거무죽죽한 피를 닦아내고 거기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루시 알른 영애께서는 여전히 얄미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메스가키 스킬이야.
한치의 빈틈이 없다니까.
근데 빈틈이 없을 거면 손이 떨리는 것도 좀 보정을 해주지 그랬냐.
봐봐. 방패를 잡은 손이 떨려서 방패에 비친 알른 영애가 벌벌 떠는 것처럼 보이잖아.
이러니까 걱정을 하지.
“조금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칼의 걱정 위에 포셀의 걱정이 더해졌다.
으음. 다 들켰나?
하긴 포셀이 나 같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봐왔겠어.
연륜으로 가득한 저 아저씨를 내가 어떻게 속이겠냐.
그런 게 됐으면 게임폐인이 아니라 연기자를 하고 있었겠지.
그래도 걱정을 받는 게 기분 나쁘진 않네.
처음 루시의 몸에 빙의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한테 걱정 받을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난 괜찮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너희가 왜 그렇게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나 엄청나게 엄살이 심한 사람이거든?
못 버틸 것 같았으면 진작에 때려 쳤어.
스킬의 영향이든 뭐든 간에 그럭저럭 버틸만 하니까 여기에 있는 거라고.
“정말로.”
그러니까 걱정 하지 마.
‘기사단장님…’
“바보 포셀. 너 내가 만약 다른 초짜 기사였으면 어떻게 했을 거야.”
“…아무런 생각도 못할 정도로 힘들게 몰아붙였을 겁니다. 괜히 생각할 시간을 주면 더 힘들어 지니까요.”
‘그럼 저도 그렇게 할 게요.’
“그럼 나도 똑같이 할 테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마. 멍청아.”
어차피 이 소울 아카데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익숙해져야 할 일이야.
언젠간 이것도 덜 좆같아 지는 날이 오겠지. 그 때까지만 버티면 돼.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있으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어?
포셀은 가만 내 말을 듣고는 살짝 눈을 치떴다가 이내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께서 바라신다면.”
…어. 야. 근데 숨 쉴 여지는 남겨주는 거지? 그치?
백작영애님을 막 다른 기사들처럼 잠도 못 자게 굴리는 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