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0
요한이 주신을 향하여 경외를 부탁드릴 때였다.
갑자기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온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따스함이 사라지고, 어둠을 걷어내던 빛이 흩어짐에 따라 공동이 어둠에 물든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털썩 하고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루시!”
베네딕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당혹 속에서 눈을 뜬 요한은 바닥에 쓰러지려는 루시를 받아내는 베네딕의 모습을 마주했다.
“요한 주교! 바라만 보고 있을 때인가!”
“…아! 금방 가지요!”
다급히 그 옆으로 달려간 요한은 자신의 몸 안에 남아있는 신성을 긁어내가며 마법을 펼쳤다.
주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분명한 아이다.
길고도 긴 시간 동안 침묵하던 주신이 택한 아이란 말이다.
방금 전 내 눈 앞에서 기적을 펼쳐 보인 그녀가 잘못되어서야 곤란하다!
과거 여러 불우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봉사를 했던 그다.
이런 진단과 치유의 작업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숙련된 상태였으니.
요한은 머잖아 루시 알른의 진단을 끝마칠 수 있었다.
신성마법이 사라진 후 식은 땀을 닦아낸 그가 처음으로 입 밖에 낸 것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괜찮습니다. 다소 무리하게 힘을 쓴 탓에 탈진했을 뿐.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정말인가?! 만일 우리 딸아이가 잘못 된다면!”
“지금 그녀의 상태는 제게도 소중합니다. 베네딕 경.”
루시에 대한 걱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베네딕이었지만 그는 요한의 눈을 마주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노쇠하여 주름이 가득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렬하고 굳건한 눈빛.
베네딕이란 괴물을 앞에 두고서도 물러섬이 없는 그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본래 영애께서 일으킬 수 없고 일으켜서도 안 될 기적을 실현한 것이니까요. 허나 머잖아 깨어나실 것은 분명합니다.”
“…믿도록 하지요.”
베네딕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섬에 따라 공동에 다시금 침묵이 자리 잡는다.
허나 그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백작이 자신의 마법으로 불꽃을 일으켜 공동을 밝혔으니까.
“두 분. 말씀을 나누는 것은 좋습니다만 중요한 걸 하나 잊지 않으셨습니까?”
“흠?”
“저희가 말입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문을 표하는 두 사람 앞에 백작이 거대한 실뭉치 하나를 내려놓았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실에 보호 받고 있는 것을 본 순간 베네딕과 요한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
“상태는 어떤가.”
옛 동료의 물음을 들은 카리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그저 그래.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악신의 저주에 당해 길고도 긴 세월 동안 수면을 취하다 간신히 구원 받은 카리아지만 정작 그녀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신에 의해 몸을 빼앗긴 그녀의 의식은 깊고도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었으니까.
저주와 주도권을 다투던 시절의 오락가락하던 기억은 있지만 딱 거기까지.
카리아에게 있어 그녀가 행방불명되었던 기나긴 세월은 하룻밤 사이에 지나가버린 꿈만 같을 뿐이었다.
그나마 카리아의 기억에 남은 것이 무어냐 묻는다면 하나 뿐이겠지.
빛.
너무나도 밝은 빛.
따스하고도 포근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던 태양과도 같은 빛.
그리고 그를 치켜들고 있던 아름답고도 귀여운 여자아이의 모습.
거대한 사악을 앞에 두고도 당당하게 어깨를 피던 아이의 뒷모습.
“카리아?”
멍하니 그 풍경을 되새기던 카리아는 동료의 부름에 다시금 정신을 되찾았다.
“아냐. 괜찮아. 베네딕.”
카리아의 잠이 너무도 길었던 탓일까.
과거 그녀와 함께 최전선에서 움직이던 불굴의 기사는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젊었을 적에도 충분히 늙어 있어서 더 이상 늙을 곳이 있나라는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말야. 있긴 하구나.
주름이 잔뜩 늘었고, 머리 이곳저곳에 새치가 올라오기 시작한데다가, 여러 잔 상처도 많아 졌어.
여전히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세월이 느껴지네.
“그보다 너는 어떤데? 내가 보기에는 몸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저주에서 해방되는 과정에서 본래 지니고 있던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린 카리아지만 그녀가 지녔던 눈썰미는 그대로다.
“내가?”
“하나하나 짚어 줄까?”
“어디 한 번 해봐라.”
근육이 터져 나올 듯한 양복을 입고 있는 베네딕은 짐짓 멀쩡한 체를 하고 있었지만 카리아를 속이기에는 모자랐다.
이 쪽은 카리아의 전문분야였으니까.
“옷 아래에 화상 자국. 거슬린다며 장갑을 낄 생각도 안하던 녀석이 낀 장갑. 앉을 때 통증 탓인지 잠시 찌푸려진 미간. 힘이 살짝 들어가 있는 어깨. 거기에다…”
“됐다. 거기까지 해라.”
하. 오랫동안 자다 깨어나도 도저히 네 녀석의 눈은 그대로구나.
베네딕은 그리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흘리다가 무언가 잘못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리했구나?”
“딸아이에게 파파의 멋진 모습을 보여 줄 기회였거든. 오랜만에 최선을 다했지.”
오랫동안 영지에 처박혀 있다가 무리를 한 탓에 몸에 멀쩡한 곳이 없다면서 너털웃음을 흘리던 베네딕은 이윽고 통증에 어깨를 들썩였다.
“딸이라면 예전에 그 문제를 많이 일으키던 아이인가?”
“그래.”
“지금은 어때. 철이 좀 들었어?”
“요 1년 새 급격하게 사람이 바뀌었지. 다만 과도하게 바뀐 탓에 매일 이 파파를 다른 의미로 긴장하게 만들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 바뀌었길래?”
“들을 테냐?”
카리아는 별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 탓에 왕국의 수호신 취급을 받았던 괴물의 입에서 딸을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는 한탄을 나오게 했던 아이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듣고 싶었으니까.
허나 그녀는 머잖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말았다.
“우선은. 그래. 우리 딸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지부터 이야기를 해야겠지.”
딸아이가 신의 축복을 받은 일.
소울 아카데미 입학시험 수석을 차지한 일.
그 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천재들을 상대로 승리하고 새로운 신성이라 여겨진 일.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불안했던 아이가 여러 사람들을 가까이 두게 된 일.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 악귀 같던 기사가 주책 맞은 아버지가 된 것이니까.
비슷한 경험이 있는 카리아이니만큼 저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지.
허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말이다. 이 아버지를 다시 파파라고 불러줬다! 파파! 이 얼마나 달콤하고 귀여운 울림이란 말인가!”
자신의 딸아이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잘해주는 지를 설명하는 그 모습은 도저히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좀 징그러웠다.
루시. 용케도 더 엇나가지 않았구나.
이런 바보가 아버지여서 싫었을 텐데.
장하구나. 장해.
“이런. 너무 주책을 부렸나?”
“이미 할 이야기 다 했잖아. 멍청아.”
“하하. 미안하군.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니 슬슬 일어나야겠지.”
“아니 그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어.”
“흠?”
카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은 태양을 치켜 들던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단순히 자신이 본 환상일 뿐인지. 혹여 두 눈에 담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 여자아이의 정체는 무엇인지. 만날 수 있는지.
여태까지 카리아가 참고 있었던 여러 말들을 모두 귀담아 들은 베네딕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걱정하지 마라. 머잖아 만나게 될 테니까.”
“…꿈이 아니었구나.”
“그래. 그리고 하나 더. 너를 발견했으며, 구하고, 정화한 것은 모두 그녀다.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나 전하도록.”
“뭘 걱정해. 내가 은혜를 저버릴 사람이냐?”
“아니지. 알고 있다.”
“그리고 베네딕. 고맙다.”
카리아가 감사인사를 전했지만 베네딕은 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손을 흔들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서 교차하듯이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안에 들어오자마자 카리아의 얼굴을 보고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구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걸 보면 나랑 보통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얼굴을 이목저목 살피던 카리아는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갤 저었다.
그 멍청이는 저렇게 정중함이 몸에 밴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스승님.”
허나 그 부정은 남자가 목에 잠긴 채 내뱉은 말에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알새틴. 너냐?”
“예. 당신의 바보 같은 제자입니다.”
“진짜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카리아가 재차 내뱉은 물음에 알새틴은 자신의 손동작으로 대답을 건넸다.
그는 카리아와 알새틴만이 알고 있는 암호문이었다.
진짜였다.
떠나가지 말라며 펑펑 울던 꼬맹이는 어느새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란 게 참 무섭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틱틱거리던 건방진 꼬맹이가 이렇게 자랐다니.
“그래도 나이가 드니까 철이 드는 구나? 존댓말도 할 줄 알고.”
“언제까지고 뒷골목의 부랑아로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됐어. 재잘거리지 말고 이리로 와봐.”
카리아는 말을 더하는 대신 알새틴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 녀석. 더럽게 많이 컸네.
“그리고 있잖냐. 네가 존댓말을 하니까 너무 어색해 돌아버릴 것 같거든?”
“그렇지만 스승님.”
“닥치고 하던 대로 해.”
“…알겠어. 빌어먹을 아줌마.”
“그래. 이래야 썩을 꼬맹이지.”
서로 비속어를 내뱉으며 키득거리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눈에서 흘러나온 물에 잠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정산 중…]
잠에서 깨어난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보상이었다.
아무리 허접 주신이 뻔뻔한 페도 변태긴 하지만 언제나 보상은 제대로 챙겨주니까.
이번에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한만큼 무언가를 쥐어주리라 기대했지만 내가 보게 된 것은 정산 중이라는 문장 뿐이었다.
아니. 허접 주신님.
할배의 말에 따르면 제가 쓰러지고서 하루라는 기간이 지났다고 하는데 왜 정산 중이라는 문장이 나오는 거죠?
당신 그 동안 대체 뭘 한 거야?!
일 하라고!
당신 사도는 당신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너는 백수마냥 쳐 노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속으로 고함을 지르던 나는 머리가 핑하는 느낌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안정을 취하라고 내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하느냐. 안 그래도 안 좋던 몸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탓에 지금 네 상태는 최악이다. 휴식이 필요하단 말이다.”
<여우의 말이 옳다. 여아야. 네 몸을 신경 써야지.>
‘저도 그건 아는데요…’
“시끄러워. 얼빠 여우. 개허접 변태인 너도 아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지금 내 몸상태는 최악이었다.
안 그래도 얼빠 여우가 생기를 끌어 쓴 탓에 안 좋았던 몸으로 본래 이룰 수 없는 기적을 펼친 것이다.
어느 하나만 하더라도 당분간 휴식을 취해야 할 마당에 두 가지 모두를 함께 했으니.
얼빠 여우가 이야기하길 이 정도로 끝난 것도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당분간 이전에 농담처럼 이야기했던 병약 메스가키 미소녀로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지.
곤란한 일이었다.
방학 동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몸으로는 제대로 된 수련 하나 못한다고!
으으. 남은 두 달을 모두 다 날리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 뼈아픈데.
어떻게 방법이 없으려나. 몸 상태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신의 피해자를 구원한 걸 확인했습니다. 보상이 추가됩니다.]
…어?
[불의 악신 바흐디의 봉인이 풀렸으나 그를 제압하고 다시 봉인했습니다. 보상이 추가됩니다.]
아니. 저기요?
[악신 아그라가 개입했으나 그를 물리치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보상이 추가됩니다.]
아르마디님?
[정산완료.]
[‘메네스테일의 구원자’ 퀘스트의 완료를 확인]
[보상이 지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