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투명한 푸른 하늘에서 따사로운 태양 빛이 나무 위로 내려왔다.
그늘을 만드는 나뭇잎 위에서 흩어지는 태양 빛을 보고 있으면, 정오의 행복한 한 때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양 빛을 받는 나뭇가지에는 햇빛을 좋아하는 황금 사신들이 드문드문 달라붙어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평화롭네.’
지난 몇 달 동안, 큰 사건이 없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매일매일 쉬지 않고 불길한 내용을 퍼 나르고 있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한복판에 오브젝트 위험 구역 지정!>
<마포구 연쇄 살인의 모방범? 공포에 떠는 마포구.>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세희 연구소와 달리, 뉴스에 비치는 세계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세희 연구소 뒤뜰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뉴스를 듣다 보니 하늘을 수놓은 커다란 원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빛의 고리 두 개가 동심원을 그리며 하늘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교주가 ‘눈동자’라고 불렀던 빛의 고리는 아귀 사신을 처치한 뒤, 두 개로 늘어나 버렸다.
하지만 왠지 저 ‘눈동자’를 볼 때마다 불안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능력 무효화’ 그리고 ‘공격 회피’라는 터무니없는 능력을 가진 빛의 고리였지만, 이상하게 별로 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탁!
화창한 태양이 내리쬐는 뒤뜰에서 나무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작은 발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폴짝폴짝 뛰는 소리.
시선을 돌려서 뒤뜰 안에 마련된 공터를 바라보자, 황금 사신들이 나뭇가지를 깎아서 만든 목검으로 서로 칼싸움하는 것이 보였다.
요즘 들어서 자주 칼싸움을 연습하던데, 그 원인을 모르겠다.
보통은 금세 질려서 다른 놀이를 찾는 황금 사신들이었지만, 이번 칼싸움은 이상하게 오래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놀이에 그치지 않고, 수천 마리의 황금 사신들이 체계적으로 리그전을 치르는 느낌까지 받았다.
칼싸움이 멋진 영화나 드라마를 봐서 저러는 걸까?
해맑은 표정으로 즐겁게 웃으며 조그마한 나무칼을 휘두르는 황금 사신들의 표정은 칼싸움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놀이를 즐기며 즐겁게 웃는 표정.
하지만 칼을 휘두르는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조금 인상이 바뀌었다.
앞뒤로 발을 끌며 미끄러지듯 신속하게 간격을 재는 발걸음.
틈을 노리고 번개처럼 내리치는 일격.
표정이 아니라 동작을 보면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라 검도 시합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칼을 휘적휘적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나는 따라 하지도 못할 만큼 고수가 되어있었다.
“오오!”
그리고 그렇게 싸우는 황금 사신들을 구경하며 감탄하는 세희 연구소 직원들이 뒤뜰에 잔뜩 몰려 나와 있었다.
하지만 콜로세움 때처럼 소소하게 점심값을 걸고 내기를 하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중뢰가 연구소 내 도박을 근절한다면서 묵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뒤뜰 구석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어떡해!”
머리 위로 일격을 맞은 황금 사신이 졌다는 것처럼 바닥에 누워버리자, 세희 연구소 연구원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달려와서 황금 사신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옴뇸뇸.
그리고 연구원은 상심하지 말라고 계속 말을 걸면서 황금 사신에게 푸딩을 조금씩 먹이기 시작했다.
푸딩을 맛있게 먹은 황금 사신은 시무룩한 표정을 순식간에 지우고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을 챙겨주는 연구원은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왔는지, 작은 손수건으로 황금 사신의 입가까지 닦아주었다.
그 행동에 ‘히히’하고 왠지 간지럽다는 것처럼 웃던 황금 사신은 다시 바닥에 내려서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 뛰어나갔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 애착 인간인 연구원을 향해서 손을 흔들어 주면서 환하게 웃었다.
“힘내!”
연구원은 큰 소리로 황금 사신의 인사에 답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나도 가끔 황금 사신이 구분이 잘 안돼서 헷갈리는데, 세희 연구소 연구원들은 잘 구분하는 것 같았다.
관찰력이 뛰어나서 그렇다기에는 황금 사신들은 뿔 황금 사신처럼 특이한 애들 말고는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말이지.
검술 시합을 하는 뒤뜰의 분위기는 어느새 어디선가 본 적 있었던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승리를 위해서 열심히 작은 팔다리를 움직이는 황금색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응원하는 수많은 연구원.
점심시간을 맞이한 세희 연구소 뒤뜰은 어느새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분위기로 변했다.
응원하는 보호자들과 애착 인간을 바라보며 투지를 다지는 황금 사신들.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같이 앉아서 식사하기까지 하니, 더욱 그랬다.
세희 연구소, 괜찮은 거 맞나?
이럴 때마다, 내가 다녔던 서울 연구소는 뭐였나 싶었다.
뭐, 미니 사신들이 행복해 보이니까, 괜찮은 거겠지.
***
흉흉한 소문이 돌아다녀서 한산해진 마포구.
퇴근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돌아다닐 시간이 되었지만, 길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돌연사한 연쇄 살인범의 모방범이 돌아다닌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벌써 10명이나 같은 모방범에게 죽었을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아마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피해 규모에 비해서 범인 색출이나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위험한 오브젝트가 돌아다니는 시대인지라, 인간 범죄자에 대한 수사 인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런 한산한 저녁 상점가 거리를 2인 1조의 경찰들이 천천히 순찰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돌아다녀서 잡을 수나 있을까요?”
후배 경찰이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순찰이 기본이야. 기본. CCTV에도 안 잡히고 아무런 흔적도 안 남기는 놈들은 이런 식으로 잡아야 하는 거지. 원래 머리 좋은 놈들은 이런 우직한 방법이 잘 먹힌다. 이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선배 경찰은 대답을 해준 뒤, 정신 차리라며 후배의 등을 강하게 후려쳤다.
현재 나타난 모방범은 오래전에 잡혔던 살인범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대중에 밝혀진 것부터, 밝혀지지 않은 것까지 전부.
밤거리에서 짧은 접이식 칼 한 자루로 사람을 습격하던 미치광이.
심장과 목만 노리는 과격함과 증거를 도통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모두 갖췄던 살인범.
하지만 결국 잡혔던 살인범과 달리, 이번 모방범은 도무지 잡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 모방범이 오브젝트라는 이야기도 돌더라고요.”
“뭐? 누가 그딴 소리를 해?”
후배의 터무니없는 소리에 선배는 후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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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 중이던 살인범이 갑자기 죽은 다음부터 튀어나온 데다가, 증거도 하나도 없으니 답답해서 그런 거겠죠.”
“아니. 그런 소리를 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좀 힘들다고 오브젝트니, 뭐니, 헛소리나 하고 다니다니. 나 때는 말이야….”
갑자기 시작된 선배의 꼰대스러운 정신론을 흘려들으며, 후배는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것만 빼면 완벽한 밤이다.
노랗게 빛나는 커다란 보름달과 한적한 밤거리.
후배는 이런 밤거리를 혼자서 돌아다니다 보니,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선배? 어디 계세요?”
뭔가 이상해서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탁. 탁.
그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솟은 계단과 그 계단을 뒤덮은 커다란 보름달이 보였다.
고양이의 눈처럼 노랗게 빛나는 달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계단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정말, 좋은 밤이야.”
나지막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푸욱.
정확하게 심장을 뚫고 들어가는 짧은 칼날.
계단 위에 서 있던 남자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피를 토하며 뒤를 돌아보자,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연쇄 살인범이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정말 죽이는 달이야.”
살인범은 죽어가는 경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단 위에 크게 비치는 보름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둥실둥실.
격리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주황 사신과 새싹 사신이 공중을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저 둘은 어느 순간부터 자주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특이한 점은 언제나 잠들어 있던 새싹 사신은 눈을 뜨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주황 사신은 원래부터 눈을 감고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자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침대 위에 반쯤 바닥에 흘러내리듯이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더니, 격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예린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 들어왔다.
또 서아나 김중뢰에게 쫓기는 중인 건가?
“지하 시설이 전부 완성됐어!”
하지만 예린이가 전해준 소식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 황금상이 놓인 거대한 욕실 비슷한 무언가가 드디어 완성됐다는 소식이었다.
‘오!’
내가 감탄하며 침대 위에서 일어나자, 나를 따라서 축 늘어져 있던 미니 사신들도 두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목욕탕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나와 미니 사신들을 위해서 만든 시설이라고 해서 조금 기대가 되었다.
나를 본뜬 황금상에다가 벽면에 미니 사신들의 벽화와 조각으로 도배를 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생겼을까?
황금상은 이미 봤었지만, 벽면에 새긴 미니 사신 조각이나 벽화 같은 것들은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가서 보면 되겠지.
미니 사신들도 즐거운 것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단순히 재밌어 보여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조금 뿌듯한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
미니 사신들이 공사를 많이 도와줬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 것 같았다.
‘자, 가자!’
온갖 종류의 미니 사신들이 모두 모여들자, 나는 예린이의 뒤를 따라서 뚜방뚜방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