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3
파트란 영지 축제 퀘스트의 미니 게임은 피지컬 절반과 운빨 절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텟을 올리는 것으로 거지같은 게임의 난이도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그 뿐. 미니게임을 하지 않고 통과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지.
피지컬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은 실력으로 해결하는 게 가능하거든?
근데 운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안 같은 경우엔 방도가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한 후 제발 성공하기를 빌며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것 말고는.
실패 확률이 1%인데 실패해버렸을 때는 너무 열이 올라서 아무런 말도 안 나오더라.
본래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운적인 요소였다.
피지컬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떻게든 넘어설 수 있으니 만에 하나의 확률을 없애는 게 중요했지.
허나 지금은 정 반대다.
운은 괜찮다. 찍기로 시험에서 평균 이상의 성적을 지닐 수 있는 나는 다이스 갓의 보우를 받고 있으니까.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두진 못할지언정 꽤 괜찮은 성적을 가져다 주겠지.
근데 항시 믿음직스럽던 피지컬에 문제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약화되어버린 내 육체는 평소의 고된 훈련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할배의 판단에 따르면 조이한테도 몸싸움으로 질 레벨이라고 했다고!
이 따위 쓰레기 몸을 가지고서는 축제의 미니 게임을 통과할 수 없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간다면 페도 변태인 아르마디님의 욕망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
저택에 돌아온 후 루시의 옷장 속 여러 옷들을 눈에 새겼던 나는 왕국 무역 도시 니그의 경매장이 열리자마자 그 곳에 방문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입기에 적당한 드레스가 있으면 그냥 실패하고 그걸 입을 생각이었거든?
이야. 진짜 루시 옷들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깜짝 놀랐다니까.
어떻게 옷장 속에 지뢰밖에 없을 수가 있지?
아무리 좆망겜이여도 안전구획 하나정도는 주는 게 예의잖아!
‘얼빠 여우…’
“얼빠 여우…”
“멀미를 없애달라는 게지?”
얼빠여우의 도움으로 멀미에서 빠져나온 나는 에린의 부축을 받으며 순간이동진이 설치된 곳 바깥으로 나왔다.
무역 도시 니그의 모습을 눈에 새긴 순간 난 절로 새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짜 사람 더럽게 많네. 게임 속에서도 바글거리는 인상이었으니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도를 넘었어.
이 정도 수준이면 인파가 아니라 인벽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앞으로 갈 수가 없잖아.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멀미가 재발하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포셀이 나를 훌쩍 들어서 자기 어깨에 올려 주었다.
“저만 믿으시죠. 편하게 갈 수 있을 겁니다.”
아기가 본다면 울게 분명한 웃음을 짓는 포셀이 오늘 따라 무척이나 듬직했다.
그래. 인벽이고 나발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하겠지.
오늘 내 호위를 맡은 것은 칼이 아니라 포셀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칼 그 녀석. 알른 가문에 돌아오고 나서 진짜 수련하다 죽을 것처럼 구르고 있거든.
메네스테일 던전에서 카리아한테 아무것도 못하고 발린 게 마음의 짐이 됐다나.
개인적으론 카리아가 과할 정도로 강했을 뿐 칼은 충분히 해줄 만큼 해줬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이 만족하지 못한다니 어쩌겠어.
그렇게 칼이 사라졌으니 다른 사람이 호위로 붙어야 하는데 내 몸 상태가 몸 상태다 보니 베네딕이 어지간한 사람은 호위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거친 끝에 선정된 것이 바로 포셀. 알른 가문에서 무력으로 2인자 자리를 차지하는 기사. 그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예전에 들은 건데 포셀은 베네딕을 상대로 이기지는 못해도 승부를 질질 끄는 건 가능한 사람이라더라.
그 때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랐거든?
지금은 알아. 아무리 불완전하다지만 악신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칠 수 있는 인간을 상대로 지구전이 가능한 사람이라니.
상대의 입장에서는 끔찍하고 아군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인재야.
<뭐. 그래봐야 인간의 범주지만 말이다.>
인파를 가뿐히 뚫고 나가는 포셀의 모습을 보며 믿음직스럽단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할배가 목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크흠. 뭐 악신과 대결하던 본인과 동료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란 이야기다.>
아아. 그러니까 할배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내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까?
푸하핫. 평소에는 잔소리많은 꼰대 할배인데 가끔씩 귀여울 때가 있다니까.
‘진짜요? 할아버지 베네딕보다 강했어요?’
<물론이다. 지금도 내가 몸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베네딕 같은 아해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었을 터.>
‘에이. 거짓말. 증명 못 한다고 너무 허풍을 떠신다.’
<진짜래도?! 난 루엘이다! 세상을 구한 성기사 루엘! 불완전한 악신을 상대로 고전하는 기사에게 질 리가 없잖으냐!>
할배의 말은 사실일거다.
봉인에서 완전히 풀려난 악신을 상대로 전투해 승리를 거둔 것이 성기사 루엘을 비롯한 용사 일행이니까.
전성기의 할배는 분명 인간의 격을 벗어난 괴물이겠지.
그렇지만 말이야. 평소에 잔소리만 해대던 꼰대 할배가 칭찬을 듣고 싶다며 투덜거리는 게 재밌어서 도저히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더라.
‘원래 옛날 이야기는 과장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내가 할배와 놀고 있는 동안에도 포셀 익스프레스는 저 알아 자율 주행을 하며 날 경매장 앞에 내려다 주었다.
상인과 고객으로 붐비는 거리와는 달리 경매장 주변은 비교적 한산했다.
거상이나 일정 지위 이상의 귀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만큼 삼엄한 경계가 유지되는 이 곳은 인파로부터 안전한 것이다.
이제 겨우 숨을 쉴 수 있겠단 생각에 기지개를 펴던 나였지만 그 행복감은 순식간에 박살이 나버렸다.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영애께선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어디선가 경매장의 관리인이 다급히 달려와 나를 가로막은 것이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백작 영애다.
그것도 평범한 백작 가문이 아니라 대륙에 드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알른 가문의 영애란 말이다!
니그 경매장의 입장조건을 충족하고도 남는 수준일 텐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제가 왜 못 들어가는 거죠?!’
“야. 빡대가리. 왜 안 되는 건데? 납득가게 설명해 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 기색을 드러내며 따지고 들었더니 관리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과거의 루시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 루시는 사치를 즐겼다. 화려한 거라면 사족을 못 썼지.
그런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구하기 위해 니그 경매장이 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신조차 모욕하는 사상최악의 망나니였던 루시는 가는 곳마다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일종의 전략병기였으니 당연하게도 니그 경매장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자신이 바라는 물건을 사는 데 실패하자 자기보다 상위입찰을 한 상대에게 찾아가 깽판을 친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상습적으로.
덕분에 루시의 패악질을 두려워한 이들이 경매장에서 발을 돌리자 니그 경매장은 결단을 내렸다.
문제의 원인이 되는 루시 알른의 입장을 전면금지한 것이다.
<여아야. 과거의 그대는 도대체…>
억울했다. 저건 내가 벌인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억울하다고 해서 이 몸에 존재하는 업보가 사라지진 않는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것은 그대의 옛 버릇이 남은 탓이겠구나. 무서워라. 무서워.>
방금 전까지 놀려먹었던 복수인지 빈정대는 할배의 목소리에 입술을 가볍게 씹었더니 경비대장이 땅에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규정이 그런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떤 패악질을 부릴지 몰라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제 할 말을 하는 관리인에게선 사회인의 회한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작은 희망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난 경매장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버렸으니까.
입술을 곱씹으며 머리를 굴리던 나였지만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문제가 있을 거라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탓이 컸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왔을 텐데!
…한 번 메스가키 스킬 풀로 발동해서 패악질을 부려봐? 쟤네들이 먼저 공격하게 만들어서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면.
“아가씨.”
포셀의 목소리에 사고에서 빠져나온 나는 고갤 들어 눈으로 포셀에게 물음을 던졌다.
뭔데. 무슨 방법 있어?
“주변을 둘러보시죠.”
주변?
그제야 옆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이 쪽을 향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기심. 가십에 대한 흥미. 걱정. 두려움. 불안.
“당장은 물러나는 게 나을 듯 합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여기서 이 이상 일을 벌였다가는 루시의 악명에 한 줄이 더 추가 될 게 분명했다.
여기서 더 떨어질 곳이 있나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몇 있으니 신경을 쓰긴 해야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포셀은 다시금 날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
경매장 입구에서 물러선 나는 니그에 존재하는 뉴먼 가문의 거점을 찾았다.
여러 귀족과 거상이 모이는 경매장이다. 지금의 나 혼자서 그런 곳에 부정한 방법으로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셀의 힘을 빌린다면 무력으로 뚫는 거야 가능하겠지만 그래서야 경매에 참여 못하잖아?
난 물건을 사고 싶은 거지 뺏고 싶은 게 아니라고.
예상치 못한 일에 하나도 대비하지 못한 지금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뉴먼 가문 뿐이었다.
대륙 이곳저곳에 망을 구성해 둔 뒷세계의 거물. 그 곳의 힘을 빌린다면 무언가 답이 나오겠지.
니그에 존재하는 뉴먼가의 거점은 허술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여행을 하느라 신이 났을 때는 예뻐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잡동사니가 되어버리는 그런 물건들이 가득한 가게 말이다.
그 곳의 점원은 우리 일행을 처음 보았을 때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여러 물건들을 추천해 주었지만 내가 까마귀의 인장을 내밀기 무섭게 다른 말을 꺼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좋은 물건들이 훨씬 많답니다!”
당연하게도 안 쪽에 있는 것은 더 많은 기념품이 아니었다.
뉴먼 가문의 아래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
혹시 놀랄까봐 에린과 포셀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거점 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반갑습니다. 뉴먼 가문의 은인이시여. 이 거점의 관리를 맡고 있는 키라고 합니다.”
정보원치고는 다소 가벼운 인상을 주는 남자는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지만 그는 별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키.’
“그래. 반가워. 양아치. 남의 여자를 좋아할 것처럼 생겼네?”
메스가키 스킬이 그를 양아치라 규정한 순간 그의 호칭은 양아치로 고정되었으니까.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짓는 그에게 지금 내 사정을 설명했다.
경매장에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갈 수 없다. 무슨 방법이 없느냐.
“몇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양아치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그리 이야기를 했다.
니그 경매장의 경비가 촘촘하긴 하지만 뚫을 구석이 없는 건 아니라고.
“그렇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영애께서 너무도 아름다운 나머지 눈에 띈다는 것이죠.”
허나 그 안으로 들어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불법적인 루트로 안에 들어 가봐야 존재를 들키는 순간 쫓겨날 뿐.
“그래서 제안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만. 변장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