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5
양아치가 가져다 준 고스로리 의상은 상당히 입기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에린을 비롯해 도와줄 사람이 여럿 곁에 있는 게 아니었더라면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좋은 옷이네요. 장인 분께서 여러모로 신경 쓴 티가 나요.”
싸구려보다는 좋은 물건이 낫기는 한데.
그런 게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너네 중에서 이런 옷 입을 사람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양아치의 개인적인 취향 아냐?!
내 마음 속에서 양아치라는 인간의 평가가 떡락하는 와중에도 에린과 뉴먼 가문 측 사람들은 손을 멈추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변장이 완료됐다.
양아치가 가지고 온 거울 속의 나는 약간 음침한 기색이 묻어나는 미소녀였다.
기다란 붉은 색 머리카락은 모자 안에 감춰버렸고,
날 선 눈매는 챙에 감춰졌으며,
눈에 렌즈를 넣어 색을 바꾸고,
화장을 통해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었더니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마 건드린 것도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바뀐다고?
아예 다른 사람이잖아!
징그러운 변태인 양아치지만 그 안목과 실력 자체는 진짜라는 건가.
옷이 제대로 입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잘 어울리긴 하네.
살아 움직이는 인형 같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에 감탄하고 있으려니 그 옆에 있던 얼빠여우가 입맛을 다셨다.
“호오오. 이건 이것대로. 츄릅.”
‘적당히 좀 해주실래요?…’
“얼빠여우. 알른 가 기사단 세탁물에 처박아 버리기 전에 적당히 하지?”
“그런 끔찍한!”
당연하게도 목소리나 어투 동작에는 변화가 없었다.
메스가키 스킬이 있는데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양아치도 그를 기대하지 않은 듯 경매장에 가기 전 내게 몇 가지를 부탁했다.
말하지 않을 것. 앞에 나서 행동하지 않을 것. 할 말이 있으면 수첩에 적어 보여줄 것 등.
그 모든 내용을 요약하면 경매장 안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나는 양아치를 비롯한 사람들 뒤에 인형처럼 서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쉽네.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라니.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포셀이나 뉴먼 가문의 사람은 불안한 듯 나를 바라봤지만 에린처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예전의 루시도 아니고.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걸 급발진해서 망칠 리가 없잖아?
<불안하구나.>
‘할아버지? 저 못 믿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배가 왜 그래요!
제 본모습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면서!
<아니까 그러는 게지.>
‘제 어디에 문제가 있는데요!’
억울해서 따져 물었지만 할배는 그 이상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다.
흥. 할 말도 없으면 억까하시긴.
보세요! 이번 경매에서 전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
뉴먼 가문의 거점 바깥으로 나와 거리를 걷는 와중에도 나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다만 그 시선의 의미는 이전과 달랐다. 루시의 모습으로 바깥을 걸을 때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단순히 루시 알른이라는 이름이 사라졌을 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에는 호의가 가득하다.
높은 매력 수치의 힘이라는 거겠지.
다만 이 높은 매력수치가 언제나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나약해 보이는 이가 지닌 매력이라는 건 나쁜 손을 불러오거든.
군중 속에서 한 남자가 내 쪽에 손을 내미는 게 보였다.
평범한 쓰레기다.
지금의 나라면 한 손으로도 가지고 놀 수 있는 잡몹.
녀석이 내민 손을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지만 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기로 약속한 것도 있고, 믿는 구석이 있기도 하니까.
“죽고 싶나?”
내가 변장을 한 것처럼 포셀이나 에린도 최소한의 변장을 했다.
이 둘은 루시만큼 특징이 강한 게 아니라 변장을 하기도 쉬웠지.
인상 나쁜 덩치 아저씨가 된 포셀과 그에 어울리는 묵묵하고 성질 나쁠 듯한 여인이 된 에린이 남성을 노려보자 남성은 기겁을 하며 바닥에 부복했다.
포셀이 보여 준 위압 덕분일까.
그 한 마디가 흘러간 후로는 자연스레 길이 열렸고 난 다른 사람들의 뒤에 숨어 앞으로 향했다.
<싫다 그러더니 생각보다 평온하구나.>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이러지 않으면 경매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체념한 것도 있고.
지금의 난 루시 알른이 아닌 별개의 인물이기도 하니까.
한 순간에 흘러갈 백일몽이라면 마음에 담아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본심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요.’
지금도 일초에 한 번씩 숨을 쉬는 것처럼 후회를 하고 있다.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 쪽을 쳐다보는 거야!
내가 본모습일 때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던 녀석들이!
아아. 빨리 일 끝내고 이걸 벗어 던지고 싶어어어어.
속으로 그리 투덜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경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매장에 들어가는 일도 별 어렵지 아니했다.
맨 앞에 서 있던 양아치는 경비병에게 복잡한 이름의 귀족 명의를 대며 우리를 소개했고, 양아치와 잘 알고 지내는 게 분명한 경비는 별 의심하지 않고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경매가 열리기 직전이라 그런지 경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스쳐 지나갔다.
예쁘다는 감탄. 어느 가문의 영애냐는 궁금증.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끈적한 시선.
수많은 단련을 거치며 날카로워진 감각은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으음. 할배가 왜 가만있을 수 있겠냔 말을 꺼낸 건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자. 영애님. 저 안으로 가시면 됩니다.”
양아치는 허술한 인상을 지녔으면서도 일처리를 빠르고 확실하게 했다.
그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경매장의 개인실이었다.
군중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있을 수 있는 곳.
“여기선 긴장을 푸셔도 됩니다만 큰 소리는 내지 말아주십시오. 누가 들을지 모르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경매의 진행을 맡은 푸르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매장 한 가운데 무대의 커튼이 걷히며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은 귓속으로 파고드는 선명한 목소리를 내며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경매 초반부에 나오는 물건들은 대개 과거의 루시라면 환장했을 물건들이었다.
그러니까 사치품이었다. 진귀한 보석이 박힌 반지나 목걸이. 대충 그런 것들 말이다.
경매에 참가한 귀족 부인들은 거기에 금화를 내던졌지만 난 그를 따분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게이머의 입장에서 저런 물건은 잡템일 뿐이니까.
초반부가 지나가자 그제야 좀 쓸만한 물건들이 여럿 나왔다.
그 중에는 내가 타인에게 선물로 주고자 마음먹은 물건들도 있었다.
허나 나는 그것조차도 넘겨버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예산을 온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다시 기다리던 중 바라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을 담으면 빛나는 석판.
“이 석판은 평범한 물건이 아닙니다. 신께 귀의하신 분께서 자신의 신앙을 담으면 따스한 빛을 내죠. 전지하고 전능하신 주신의 뜻이 담긴 물품이라는 소리입니다. 또한 여기를 보시면 먼 과거에 새겨졌으나 여전히 선명한 문구가…”
진행자는 물건을 비싸게 팔기 위해 최선을 다해 포장하고 있었지만 난 그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대신 감정 스킬을 사용했다.
경매가 이어지는 무대와는 꽤나 긴 거리가 존재했지만 오랜 기간 숙련도를 쌓아온 감정 스킬은 제 역할을 다했다.
[신성을 담으면 빛나는 석판.]
[신성을 담으면 밝은 빛을 내는 석판. 그 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수호하고 지켜라’]
눈을 부릅뜨고서 그 문장을 읽던 나는 웃음과 함께 주먹을 꼭 쥐었다.
저건 열쇠다.
숨겨진 물건을 얻기 위한 열쇠.
너무도 평범한 곳에 존재해서 유저 중 그 누구도 거기에 무엇이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한 곳에 존재하는 문을 열기 위한 물건.
흑역사를 만들 각오를 하고 고스로리를 걸친 나! 잘했어!
부끄럽다고 도망쳤다면 저 귀한 걸 얻지 못했을 거 아냐!
그를 확신한 후 양아치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양아치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저 물건은 꽤 비쌀 겁니다. 어디까지 가능하십니까?”
‘삼백 골드.’
“삼백 골드.”
이 돈은 게오르크 가문에서 뜯어낸 것이다.
그 쪽 아들 때문에 고생한 것에 더해 메네스테일이 멸망할 위기를 구원해 준 대가를 내놓으라고 그랬거든.
본래는 적당히 받고 말 생각이었는데 이 협상에 카리아가 개입하며 이야기가 바뀌었다.
한 때 왕국의 뒷세계를 지배했던 그녀는 거래에도 무척이나 익숙했으니.
카리아는 내 대리인이라는 지위를 내세우며 게오르크 백작의 골수를 빨아먹었다.
그 결과 난 게오르크 가문으로부터 여러 물약이나 스크롤, 인챈트 된 아이템은 물론이요. 막대한 양의 골드까지 받아냈지.
그 땐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리아가 가지고 온 보상은 지금 내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반드시 구매하실 겁니까?”
‘당연하죠.’
“말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위대하신 주신과 관계가 있는 물건답게 시작가는 높습니다! 십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경매가격이 가파르게 올라간다.
십에서 시작한 물건이 어느새 백에 달하는 가격에 도달하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백에 도착해 있었다.
그 때가 되자 저를 노리는 이들도 슬슬 부담을 느끼는 듯 표지판을 드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양아치는 보란 듯 표지판을 들어 큰 소리를 낸다.
“이백십오!”
“네. 이백십오골드 나왔습니다!”
단번에 가격이 훌쩍 오름에 따라 경매장의 좌석에서 표지판들이 하나 둘 내려가기 시작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양아치의 외침이 저들의 구매 의욕을 무너트린 모양이다.
“다른 분 안 계십니까? 이제부터 세 번 호명하겠습니다! 이백십오!”
이백십오 골드인가.
큰 지출이긴 하지만 괜찮아.
저 석판을 얻은 대가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지. 아아. 이럼 방학 때 할 일이 많아지는데.
“이백십오!”
베네딕의 선물을 산 후에 그걸 주면서 한 번 더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부탁을 해봐야겠네.
아. 지금 몸 상태로는 어려우려나.
으음. 그러면.
“이백십!…”
“이백오십.”
석판이 내 손 안에 들어올 것을 확신하고 머리를 굴리던 중 경매장의 한 쪽에서 한 사람이 표지판을 들었다.
이백오십 골드?!
한 번에 그만큼 가격을 올린다고!?
진행자마저 놀라 경매장이 침묵하던 그 때에 나는 눈에 신성을 집중하며 표지판을 든 사람을 확인했다.
이를 노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사벨 아르테아.
해안을 맞대고 있는 영지인 아르테아의 여주인이자 자신이 지닌 상재를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쥔 자.
귀족답지 않은 욕심을 지녔다며 비난받지만 세상 대부분의 일은 돈이면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그리고 가장 큰 특징.
저 인간 주신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광적으로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
이거 좆 된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