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7
“…괜찮겠니?”
파트란 가문 축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베네딕은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자기 딸이 부탁하는 거라면 대개 허락하는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말이야.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다.
과거 루시가 사교계에서 저질렀던 수많은 패악질들.
그 모든 일들을 수습해야 했던 베네딕의 입장에서 어찌 이 일을 환영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자신이 지위로 찍어누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 파트란 공작 가문에 방문하겠다는데.
축제에 가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주마등처럼 옛 기억이 떠오를 테고 나를 말릴 방법을 찾아 헤매는 게 정상이지.
베네딕의 위장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나는 이 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허접 주신이 내어준 퀘스트가 있는 것도 이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이유도 존재한다.
최애캐가 나랑 같이 놀자고 그랬단 말이야!
이걸 포기하라고!?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자 덕후인 내게?!
헛소리 하지 마! 절대 포기 못 해!
베네딕은 나를 말리지 못했다. 자기 딸이 친구랑 놀겠다는 데 이 딸바보 아저씨가 어떻게 고개를 젓겠는가.
그 대신 베네딕은 내 머리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레 내 손을 다잡으며 간절히 부탁했다.
“루시. 영지의 일이 끝나면 나도 파트란 영지 쪽으로 향하마. 그러니 부디 제발 내가 도착하기 전에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다오.”
사건 사고를 일으킬 거라면 자기가 수습할 수 있을 때에 해달라는 그의 부탁에선 지난 세월 동안 베네딕이 거쳐야 했던 고생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거기에 차마 말을 덧붙일 수 없었던 난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준비 과정이었다.
공작가 쪽에서 나 개인의 시중을 들 사람을 정하고, 호위를 붙이고, 얼빠여우를 보살펴줄 사람을 찾고, 그 곳에서 입을 옷가지를 챙기고, 과거 루시의 삐까뻔쩍한 옷을 바라보며 마음가짐을 다잡고.
이런 절차가 빠르게 진행된 덕분에 내가 파트란 영지에 도착한 것은 축제가 시작되기 이틀 전 저녁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알른 영애.”
거의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조이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꾸준히 체력단련을 한 탓에 몸의 군살이 줄어든 정도일까.
안 그래도 예쁘던 사람이 관리까지 하니까 더 예뻐졌네.
이 정도면 게임 속 일러스트를 가볍게 발라먹을 수준 아냐?
“여기저기서 영애의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정말이지. 어디를 가도 조용히 계시질 않는 군요.”
루시의 몸에 빙의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조이가 쓴웃음과 함께 말을 꺼냈다.
내 이야기? 퍼질 게 있나?
메네스테일에서 돌아온 후로는 영지에 처박혀 있었는데.
…설마 경매장에서의 일이 퍼진 건가?!
에린이 슬쩍 언급할 때마다 그걸 못 본 게 천추의 한이라며 칼이 발버둥치는 그 흑역사가?!
애버리! 난 네 소심함을 믿었거늘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하다니!
결코 용서하지 않겠어.
상호확증파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지 알려주마.
“타국의 백작 영식을 짓밟으시다뇨.”
지레 짐작하고서 이를 갈고 있었지만 조이가 언급한 것은 다른 내용이었다.
내가 경매장에 가기 전. 메네스테일에서 게오르크 영식을 때려눕힌 것.
“이야기를 듣고서 통쾌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과하셨어요.”
굴욕을 당한 게오르크 영식이 소문을 통제하려 노력했지만 사람의 입은 막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주제를 모르고 추파를 던진 그가 내게 참교육 당했다는 내용은 타국의 귀족마저 알 정도로 널리 퍼진 듯 했다.
다행이다. 전후사정이 제대로 들어가 있어서.
루시의 평판을 생각하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때려 팼단 식으로 와전돼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야.
“사교계 쪽에서는 알른 영애가 먼저 시비를 걸었단 식으로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니까요.”
아. 이미 와전된 상태였구나?
내 평판 또 내려가고 있는 거야?
하아. 난 목숨을 걸고서 악신의 봉인이 풀리는 걸 막았는데 취급은 이렇다니.
“걱정 마세요. 제가 그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정정하고 있거든요.”
자기만 믿으라는 듯 어깨를 펴는 조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운했던 기분이 날아갔다.
그래. 날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뭐라고 떠들든 내 알 바인가. 내 주변 사람들만 제대로 알아주면 그만이지.
‘고마워요. 조이.’
“그러니까 오히려 걱정이 되는데. 얼빵하게 말해서 이상한 왜곡을 만드는 거 아냐? 혹시 소문의 중심지가 얼빵 영애라거나?”
“네? 네?! 왜 그런 식으로 와전이 되는 거죠?!”
당연하지만 메스가키 스킬은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았다.
이것도 나쁘진 않네. 얼빵 영애가 얼빵얼빵한 모습은 귀여우니까.
타 귀족의 영지에 방문한 것이니만큼 이 곳을 다스리는 분께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이 도리겠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오늘 아침 갑작스레 생긴 급한 일정 탓에 공작 부부가 영지 바깥으로 향한 것이다.
내 입장에선 잘 된 일이었다. 공작부부를 만나는 일을 어떻게든 미루고 싶었으니까.
메스가키 스킬의 패널티를 생각해봐.
사람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괴상한 별명을 붙이는 녀석이라고.
공작부부는 어떻게 부를지 감도 안 잡혀!
언젠가는 그 별명을 확인해야 할 테지만 그게 오늘 일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도 허접 주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거기에 근심을 추가하고 싶지 않아.
공작부부의 대신이라고 할까. 나는 조이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이의 오라버니인 제프 파트란과 만나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알른 영애. 제프 파트란이라고 합니다. 동생에게 자주 이야기 들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조금씩 어색한 부분이 드러나는 조이와는 달리 제프는 동화책에 나오는 귀족 그 자체였다.
움직임이나 어투가 얼마나 깔끔했는지 그의 본성을 아는 나조차도 감탄했을 지경이었지.
허나 그의 속내는 다르다.
자신이 인정한 주변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그 영역 바깥에 있는 자에는 뼈가 시릴 정도로 냉철한 이.
이 녀석을 메인으로 공략하다보면 이딴 새끼가 어떻게 조이랑 남매인가 싶은 녀석.
루트 마지막까지 자기 동생의 이름을 언급하는 지독한 시스콘.
나란 인간이 조이가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인 이상 나에게도 잘 대해줄 테지만 그리 가까이하고 싶은 인종은 아니다.
과연 메스가키 스킬은 얘를 어떻게 부르려나.
보통 커뮤니티에선 얘를 미친 시스콘 새끼라고 불렀는데.
그 정도는 아니겠지? 그치?
제발 미움을 살 수준만 아니어라. 제발.
‘안녕하세요. 파트란 공자님.’
“안녕하세요. 음흉 공자님.”
제프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 한 게 차고 넘쳤으니까.
“그것이 제 별명인가요?”
‘죄송합니다. 그런 것 같아요.’
“네. 공자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조이에게 듣던 대로군요.”
내 옆에 조이가 서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조이가 미리 경고를 해 둔 탓일까.
제프는 고개를 끄덕일 뿐 그 이상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알른 영애. 저희 오라버니가 왜 음흉 공자인가요?”
질문은 다른 곳에서 날아들었다.
제프의 좋은 모습만 보아왔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왜 음흉하다는 단어가 별명으로 들어간 건지 이해하기 어렵겠지.
조이의 물음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려던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눈빛에 말을 바꿨다.
“얼빵영애가 얼빵영애인거랑 비슷한 거야♡”
“…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해줬어. 조이. 더 이상은 말 못해.
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난 그를 못 본 체 하며 식기를 들었다.
괜한 말을 했다간 원수가 한 명 생길 것 같았으니까.
공작 가문에서 제공해준 식사는 맛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눈치를 주는 제프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즐기진 못했지만.
식사가 끝난 후에 조이는 내게 공작 가문을 안내해주겠다며 나섰다.
악역영애의 가면 위로 들뜸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이 순간을 무척이나 고대했던 모양이다.
제프는 눈치 없는 체를 하며 여기에 동행하려 했지만 그건 조이에 의해 가로 막혔다.
“오라버니. 죄송하지만 저는 둘이서 다니고 싶어요.”
“그렇지만 조이.”
“자꾸 그러시면 저 오라버니가 싫어질 것 같아요.”
오빠 싫어! 선언 앞에 제프의 음흉함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자신의 좌절하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인데.
아. 기억났다. 베네딕이 자주 저래.
지금쯤 다급하게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하고 있을 베네딕의 모습이 떠오른 나는 왠지 모를 동정심이 생겨 제프의 곁으로 다가갔다.
“할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알른 영애?”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자신의 음흉함이 들킬까봐 걱정이신 공자님께 좋은 소식. 제 입은 무거울 거랍니다? 아마도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새 나오는 키득거림에 제프의 눈빛이 미묘해진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제가 음흉하다니.”
‘그런 걸로 하죠.’
“크흡. 큭. 네에.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음~흉한 공자님.”
제프의 손이 주먹을 쥔 것을 본 나는 이 말을 끝으로 다급히 도주했다.
얘를 상대로도 이 꼴인데 공작 부부를 만나면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냥 베네딕이랑 같이 올 걸 그랬나.
*
조이와 함께 공작 저택을 둘러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이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제 늦어서 못 보여드렸던 저희 영지의 멋진 것들을 보여드릴게요!”
이 날을 얼마나 고대한 것인지 자신의 수첩에 계획서까지 적어 놓은 그녀는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나를 데리고서 저택 바깥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에 슬쩍 둘러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파트란 영지는 상당히 활기찬 곳이었다.
곧 축제가 시작되기에 흥이 오른 것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의 얼굴이 밝았다.
얼굴은 사납다 못해 공포를 살 정도지만 성격과 능력은 좋은 공작부부가 영지를 잘 다스린 덕분이겠지.
“여기는 말이죠…”
그런 공작부부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조이는 자신의 영지를 사랑할 줄 아는 아이였다.
자신의 영지를 소개하는 그녀의 어투에서는 이 곳에 대한 애정이 절로 묻어나왔다.
그런 조이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영지민들도 조이를 반가워했다.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넬 정도로 말이다.
나로써는 부러운 일이었다. 알른 가문의 영지에 사는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면 머리부터 박던데.
그렇게 조이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던 나는 파트란 축제를 위해 설치된 상점의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곳은 촉이 없는 화살을 쏴서 점수판을 맞추는 곳이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조이가 먼저 권유를 했다.
“한 번 해보고 싶으세요?”
‘네.’
“허접하게 생겼지만 재미는 있어 보이네.”
조이가 한 번 해봐도 괜찮겠냐고 묻자 그 곳의 주인이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아직은 축제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퀘스트에 카운트되진 않겠지.
그래도 연습하는 셈치고 한 번 활을 쏴 보자고.
유희의 팔찌 효과가 제대로 발동되는 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주인으로부터 화살을 받은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서 활시위를 당겼다.
<오.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구나. 어디서 활 쏘는 법이라도 배웠느냐?>
‘아뇨. 그런 적 없어요.’
<흠?>
활시위를 놓음에 따라 날아간 화살은 10이라고 적힌 점수판에 정확히 명중했다.
좋아. 유희의 팔찌 효과는 제대로 발동하고 있어.
허접 주신!
내 평판을 어떤 식으로 올려줄 지는 생각해 놨겠지?!
기다리라고! 보상을 받으러 갈 테니까!